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탄실이와 주영이

라다크, 네 눈물은 신의 발등 위에 떨어질 거야

한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만들기에 대한 홀림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깎이’는 것을 읽어내는 것이 문학

특집을 기획하며 ①고양이 사냥의 추억 ②최초의 반려묘 까맹이부터 이백 살 사이보그 고양이까지 ③펫은 실전이다 ④해방촌의 반려종들을 위하여

텍스트에 대한 경의

자파(自派)의 탄생

한 사람이 곧 하나의 우주이다

『반노』는 ‘인간’을 지키자는 처절한 투쟁기였다

하루 2천640번 금형을 드나든 손의 기록

아름다움에 다다르려는 맹렬한 노력

홍진에 묻힌 분내……

추운 날의 벗, 세한삼우(歲寒三友)

노을바다의 장엄

양요리루 의자에서 커피를 압음하니 문명개화 이 아닌가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제2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리뷰-시 부문 수상작 리뷰-소설부문 수상작 리뷰-번역부문

얇아지는 장편, 환영할 일인가

①소각,저작 ②외경,당신은 시를 쓰는 사람인가요

①30년의 끝 ②양들의 침묵

새(NEW)

거울의 미로

①녹색문명(綠色文明) 시대의 숲 ②새끼 ③재와 유리의 미래

소설답지 않은, 그래서 더 공감하는

이광수, 일본에서 크게 취하다

머릿속에 쌓인 문제를 풀 수 없을 때

불안과 행운 사이에서

엘리엇 업데이트하기

‘더듬더듬 먼 길’을 가는 시와 번역

경계없는 예술 향한 10년여의 노정

대산창작기금,대산세계문학총서

대학생 아시아 대장정 3차 리더십 캠프 및 아시아프론티어클럽(AFC) 발대식 개최

단편소설

②양들의 침묵

고광률 | 소설가, 1961년생
소설집 『어떤 복수』 『조광조, 너 그럴 줄 알았지』 『복만이의 화물차』, 장편소설 『오래된 뿔』 등

1

차가 허방을 헤매 도는 것 같았다. 전조등과 안개등이 질펀한 새벽안개에 잠긴 도로를 밝히지 못했다. 편도 일차선 도로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좌우로 휘어지고 풍랑인 양 상하로 굽이쳤다. 노면 곳곳이 떨어져 나갔고 중앙선도 닳아서 뭉개졌거나 지워져 있었다. 이게 유원지 가는 길이 맞나 싶었다.
“와 보시면 안다니까요.”
유성헌은 잔뜩 굳은 목소리로 당장 장태산 휴양림으로 와달라고 했다. 탁상시계가 4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오라 하냐고 재차 물었으나, 불문곡직 와보면 알 것이니 빨리 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사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새벽시간에 전화를 걸어 무조건 산으로 와달라고 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내비게이션을 찍으니 장태산까지 차로 50여 분 거리였다.
시 외곽을 벗어나 야산과 들판 사이로 뚫린 지방도로를 20여 분쯤 달리자, 촌락의 희뿌윰한 불빛이 보였다. ‘김기사’가 ‘묵석 네거리’라고 쓴 도로표지판을 지나 좌회전하라고 했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자 차선을 분간 못할 비좁은 도로가 나타났다. 형주는 속도를 줄이고 길을 더듬었다.
그렇게 십 분을 달렸을까, 맞은편 산모퉁이에서 점멸하는 불빛이 튀어나왔다.
형주는 교행이 가능한지를 가늠하다 말고 급히 길가로 비켜서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경광등을 켠 경찰차가 꽁무니에 앰뷸런스를 달고 지나갔다.

형주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미 지나간 차를 불러 세워 물어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저수지 언저리로 뻗은 다리를 건너 오 분쯤 더 오르자, 장태산 휴양림 입구라고 쓴 표지판이 보였다. 불빛도 인가도 전혀없는 무인지경이었다.
차에서 내린 형주는 트렁크에서 비상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전등 빛을 앞세운 형주는 휴양림 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유성헌을 소리쳐 불렀다. 밤안개 속에서 메아리만 들릴 뿐, 인기척이 없었다. 정말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형주는 내친걸음인지라, 전등 빛을 휘저으며 십여 미터가량을 걸어 올랐다. 그는 성헌뿐만 아니라, 민철구, 임종춘, 모주향을 목청껏 불렀다.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길이었다.
무저갱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더는 걸을 용기가 없었다. 걸음을 멈춘 형주는 제자리에서 외손 나팔로 몇 차례 더 이름을 외치고 차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좀 전에 마주친 경찰차와 앰뷸런스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바르르 떨었다.
“간사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성헌의 지청구였다. 경찰차 안에서 소리쳐 부르기도 했고, 휴대전화도 수십 번 걸었다며 타박을 했다. 그러고는 당장 ‘묵석치안센터’로 오라고 했다.
좀 전에 지나친 길인지라 묵석 네거리까지 단숨에 달려온 형주는 치안센터 앞도로가에 차를 세웠다. 한갓진 촌락인 데다 새벽 시간인지라 도로가 텅 비어 있었다.
술 냄새가 감도는 가운데 불안감에 떠는 성헌과 철구가 죄인처럼 고개를 박고 앉아 있었다. 형주를 본 성헌이 눈인사로 반겼다. 철구는 고개를 사타구니에 처박은 채 미동도 없었다. 이파리 네 개짜리 경찰관은 형주를 보고도 알은척조차하지 않았다.
종춘과 주향은 보이지 않았다. 궁금했으나, 물어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느적느적 모니터를 켜고, 성헌과 철구의 신분증을 확인한 뚱뚱한 경찰관이 계속해서 마우스를 빙빙 돌려가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그쪽에게 쭉 물을 테니 사실만 답하시오.”
경사가 성헌에게 신중하고 책임 있는 답을 해달라고 요구했다.
“……예.”

성헌이 한참 만에 답을 했다.
그러나 신문을 고지하고 성헌을 노려보던 경사가 여전히 마우스만 빙빙 휘저으며 머뭇거렸다.
“아니, 얘를 대체 어디다 처박아 둔 거야?”
이윽고 경사가 짜증을 부렸다.
그때 숙직실 문을 빠끔히 열고 나온 장발의 경찰관이 어기적거리며 경사의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슬리퍼를 신고, 발꼬랑내와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순경이 경사의 마우스를 낚아채 몇 번 휘젓다가 눈을 부라리며 턱짓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어디서 찾은 거야?”
멋쩍은 질문을 한 경사가 목격자조서양식을 열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두 사람의 신분증과 자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름 주민번호 현주소를 차례로 입력했다. 경사는 닭이 모이를 쪼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순경이 ‘비타500’을 마시며 이런 경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로들 어떤 관계요?”
인적 사항을 기록하느라 족히 오 분 넘게 자판과 씨름한 경사가 물었다.
“학교 선후배 사입니다.”
성헌이 차분하게 답했다.
“새벽시간에 거긴 대체 왜 간 거요?”
나무라는 질문 같았다.
“새벽에 간 게 아니라, 어제저녁 일곱 시쯤부터 거기에 쭉 있었습니다.”
“뭐요?”
새벽에 가지 않고 어제저녁에 간 것이 잘못이기라도 한 양 경사가 눈을 치뜨며 째렸다. 탈모한 짱배기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자판 위로 떨어졌다.
“기말고사도 끝나고 해서…… 야유회 삼아…….”
성헌이 느릿느릿 덧붙였다.
“죽은 임종춘 학생과 모주향 학생은 서로가 어떤 관계요?”
형주는 ‘죽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불에 덴 듯 움찔했다. 종춘과 주향이 죽다니……. 그렇다면 좀 전에 마주친 앰뷸런스가……. 밤안개 속을 달리며 꺼들린 불안과 공포의 정체가 둘의 죽음이었단 말인가. 형주는 놀랍고 황망했다.

어제 퇴근 무렵, 성헌이 형주의 방에 불쑥 나타났다. 기말시험도 끝났고 해서 종춘의 소집해제 환영식을 해줄 겸, 야유회 삼아 장태산 휴양림에 가서 진하게 한잔 빨 생각이라고 했다. 학보사 전임(前任) 기자이자 대학원 석사과정 중인 성헌의 말은 보고도 아니고, 같이 가자는 제안은 더욱 아니었다. 술값에 보탤 ‘격려금’을 좀 달라는 제스처였다. 성헌과 철구와 종춘은 서로 죽이 잘 맞는 선후배 사이로 삼인방이라 불렸다. 특히 성헌과 철구 사이는 각별했다. 형주는 삼 년 전 간사 임용 초기에 학생기자들의 학보 제작거부 사태 때 이들에게 톡톡히 신세를 진 바 있었다.
형주는 종춘에게 제대한 지 이미 한 달이나 지났으니 제대 환영식은 생략하고, 2학기 개강과 함께 복학 및 학보사 재입사 환영식을 거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형주에게 종춘은 꼭 필요한 학보사의 일꾼이요, 각별히 아끼는 후배인지라 끼리끼리 급하게 모여 몇 잔 걸치는 술자리 정도로 환영식을 갈음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아무리 바쁘다 할지라도 학보사 선배이자 존경하는 간사인 형주에게 제대 인사는 먼저 올리는 것이 도리라며 종춘이 학보사에 나타난 것이다.
성헌은, 어쨌든 학교에서 만난 종춘을 그냥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면서 술자리를 급조한 것이다. 형주는 못마땅했지만 사비로 오만 원을 내줬다.
“학교 일 년 선후배 사입니다.”
무엇을 기다리는 듯 한참을 머뭇거리던 성헌이 뒤늦게 답했다.
“같은 과요?”
“아닙니다. 학보사 선후배입니다.”
성헌의 답이 늦자 형주가 대신해 답했다.
“당신은 누구요?”
경사가 끼어든 형주에게 물었다.
“예. 저는 퇴임한 선배기자이고, 또…….”
“알겠소. 그러니까, 당신도 학보사다…….”
말을 자른 경사가 짜증을 부렸다.
“예. 그러니까 저는…….”
“그만. 알았으니, 당신은 저기, 저 자리에 가 앉아계시오.”
경사가 출입문 근처의 낡은 비닐소파를 손가락질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자판과 씨름했다.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지 인상을 쓰며 중얼중얼하다가 욕을 뱉기도 했다.

“그 둘은 저수지로 왜 내려간 거요?”
지켜보던 순경이 답답했는지, 형주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껌을 씹고 있었으나,질문하는 그에게서 술 냄새와 발꼬랑내가 풍겼다.
“저, 저는……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모릅니다.”
고개를 쳐든 형주가 코를 쥐며 말했다.
순경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껌 씹는 소리와 자판을 더듬는 소리가 묘하게 뒤섞였다.
“거 참. 박 순경은 지방방송 끄고 어여 들어가서 자.”
경사는 술 취해 얼쩡대는 부하가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경사의 핀잔을 들은 순경이 형주에게 다시 다가와 담배를 빌렸다.
“그 둘은 저수지로 왜 내려간 거요?”
경사가 철구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예? 그, 그건 저, 저도 그, 글쎄요…… 잘 모르죠.”
철구가 당황해하며 버벅댔다.
철구는 거무튀튀한 개흙이 무르팍까지 더덕더덕 묻어 있었고, 한쪽 신발이 없었다.
“주향이가 취기 때문인지 덥다고 하면서 저수지 쪽으로 내려가니까, 종춘이가 걱정이 되어서 따라 내려간 게 아닐까요?”
성헌이 답했다.
“까요? 생각 말고, 확실한 것만, 확실하게 말하라니까.”
“……내려갔어요.”
성헌이 반항하듯 표현을 바꿔 말했다.
“두 사람이 싸웠소?”
경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요.”
성헌이 답했다.
벽걸이 시계에서 튀어나온 뻐꾸기가 경사의 짱배기 위에서 다섯 번을 울고 들어갔다. 어둠이 물러서고 있었다.
담배를 꼬나문 순경이 현관 밖에서 여명에 드러나고 있는 장태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은 대체 얼마나 마신 거요?”

경사가 물었다.
“넷이서 소주 열 병쯤 마신 것 같습니다.”
“그럼 각 이 병이 넘네. 죽은 두 사람은 얼마나 마셨소?”
“두 병 반 내지는 세 병쯤…… 종춘은 술을 거의 못합니다.”
“많이들 마셨구만.”
경사가 손수건으로 짱배기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사고사 원인을 술 탓으로 규정지으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렇다면 종춘 학생은 술을 전혀 안 마셨다는 거요?”
경사가 백스페이스를 눌러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이 쓴 문장을 애써 지워가며 물었다.
“걔는 체질적으로 술을 한 모금도 못합니다.”
성헌이 답했다. 답을 하는 성헌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경사는 고개를 처박고 있는 철구에게 물었다.
“둘이 사귀었나?”
“아, 예, 그…….”
철구가 답을 얼버무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경사는 자판을 쏘아 보느라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종춘과 주향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철구는 이 분명한 사실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얼버무렸다. 주향은 철구의 여친이었다. 형주는 시치미를 떼고 있는 철구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철구는 형주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을 법한데,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아니 이놈들이 뭔가 감추려는 것이 있구나 싶었다.
“아따 조 경사님, 빨랑빨랑합시다요. 지들이 사귀지 않으면 뭣빨났다고 오밤중에 둘이서만 그 진펄 속으로 기어들어갔다가 죽었겠어요. 귀신이 잡아끌었겠어요?”
다 피운 담배를 가로수에 비벼 끄고 들어온 순경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구시렁거렸다. 혀가 꼬이는지 발음도 씹혔다. 경사는 못 들은 척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순경이 받은 송수화기를 경사가 잽싸게 낚아챘다. 그러면서 다시 턱짓으로 숙직실을 가리켰다.
송화기에 대고 소속과 관등성명을 밝히던 대머리 경사가 느닷없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흐리멍덩했던 눈빛이 똘망똘망해지고, 구부정했던 허리가 에이치빔처럼 꼿꼿하게 섰다.

“아, 예. 그럼요. 별다른 문제가 있겠습니까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되십니다.”
양발을 모으고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삼 분여 가량 상대의 말을 듣고만 있던 경사가 다짐이라도 하듯이 답했다. 그는 통화 내내 단답을 할 때마다 허리를 굽신거렸다.
“암요. 여부가 있습니까. 술 마시고 발생한 안전사고 맞습니다. 전혀 심려하실 일이 아닙니다요. 목격자조서를 받고 있었는데, 방금 다 마쳤습니다. 옙. 복사본은 아드님을 통해 전해드리겠습니다.”
숙직실로 들어가던 순경이 경사를 향해 비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엄지척을 해보였다. 이해가 안 되는 상하관계였다.
“아버님이 청에 근무하셔?”
경사는 깐죽거리는 순경을 무시한 채 성헌에게 물었다. 친밀감의 표현인지 말을 깠다.
“예.”
성헌이 여유롭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표정에서 긴장감과 불안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진즉에 말을 하셨어야지.”
잠시 구시렁거린 경사가 더 이상의 질의 없이 고개를 처박은 채 자판과 한동안 씨름했다. 중얼중얼하다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판을 두드리는 짓을 반복했는데 조서를 알아서 마무리 짓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순경이 들어간 숙직실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박 순경. 학교로 조회 보낸 거, 그거 좀 취소해줘. 따로 조회를 안 해도 될 것 같아. 이 학생분 아버님이 청에 계신다네. 그리고…… 그쪽 분 교직원이시지?”
경사는 ‘청’이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천정을 두어 번 찌르고는 모니터 옆으로 고개를 빼 형주에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신분증 좀 봅시다.”
경사가 손짓으로 형주를 부르며 말했다. 고압적으로 변한 말투와 태도가 ‘청’과 통화할 때와 딴판이었다. 마치 다중인격자 같았다.
형주가 주민등록증을 건넸다.

“아니, 교직원 신분증을 달라고요. 이 양반 참…….”
지갑을 까뒤집고 나서야 신분증을 찾았다.
“서른아홉이쇼?”
“…….”
“스물아홉이라고 해도 믿겠소.”
경사는 유독 나이에 집착하는 사람 같았다. 그가 형주를 쳐다보며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나이로는 마흔하나가 됩니다.”
형주는 마치 서른아홉이라는 나이가 이번 사고와 연관이라도 있는 양 들렸다.
그래서 그는 보기보다 나이가 꽤 먹었다는 것을 잽싸게 밝혔다.

경사가 목격자조서의 사건개요를 간추려서 설명했다. 개요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사가 사건개요를 들려주는 이유가 살아남은 두 사람,특히 ‘청’에 아버지를 둔 성헌에게 아무런 연관성이나 과실 또는 일말의 책임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다만 저수지 둘레가 불투수성 점토질층이라 빠지면 혼자 힘으로 헤쳐 나오기 어렵다는 것과 사흘 전에 많은 비가 내리면서 저수량이 크게 불어나 진펄이 수면 아래로 잠겨 식별이 어려워진 것이 사고 발단의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전문가인 양 덧붙였다.

“요거 아버님께 꼭 전해드리세요.”
경사가 둘의 서명을 받은 목격자조서 복사본을 성헌에게 건네며 말했다.


2


집에 잠깐 들러 검정 양복으로 갈아입고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을 때운 형주는 직속상관인 학보사 주간과 학생과에 사고 보고를 했다. 치안센터를 나올 때 전화보고를 할까 했으나, 이미 종료된 상황으로 긴급히 조처할 사항이 있는 것이 아닌지라 서두르지 않았다.
학회 참석차 지방에 있다는 주간은 송화기에 대고 자초지종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형주는 자기들끼리 자발적으로 간 사적인 술자리이자 비공식적 야유회이고, 일체의 공금 지원 또한 없었기 때문에 주간과 간사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거듭 답했다.
학생과는 이미 관할 경찰서 담당 형사로부터 통보를 받고, 시신이 안치된 ‘성세남부종합병원’으로 학생과장이 출발했다며 형주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했다. 또,안전사고로 인한 사망사건은 해마다 겪는 일이라고 했다.
형주는 1학기 종강호 발행과 기말시험까지 마치고 학보사에 나와 하릴없이 외상 식대만 올리며 빈둥거리는 편집장과 학생기자 세 명을 뽑아 차에 싣고 성세남부종합병원으로 출발했다.
병원 장례식장의 빈소는 썰렁했다. 사망 이튿날이고 미처 부음을 못한 이유도 있을 터이지만, 이십 대 중반 청춘남녀의 사고사인지라 빈소는 더욱 썰렁했다.
열 평쯤 되는 공간을 갈라 만든 두 개의 제단에는 영정을 안치할 틀만 만들어져 있었다. 두 구의 시신은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다. 장례 절차 진행은 검찰로부터 시신을 돌려받아야 가능했다.

빈 제단 아래에서 양쪽 집 부모와 일가친척 몇몇이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모여앉아 흐느끼거나 사고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종춘 쪽은 아버지만 보였고, 주향 쪽은 어머니만 보였다. 주향의 어머니는 대여섯 명의 젊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화장과 옷차림새 그리고 말투나 행동거지 등을 볼 때 직업여성들로 보였다.
조객을 받는 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빈소와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텅 비어 있었다. 형주는 학생기자들의 가슴팍에 검정 리본을 달아 출입구와 복도에 세워두고 빈소로 갔다. 빈소 안의 분위기를 살펴가며 신을 벗던 형주가 새 운동화 한 짝을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검정색 나이키 운동화였는데, 신상품이었다. 형주는 신상품 운동화 옆에 앞축이 닳은 랜드로바를 벗어놓고 빈소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았다.
종춘과 주향 측 유족과 친지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얼결에 불려나온 사람들같았는데, 종춘의 아버지와 주향의 어머니는 마치 가수면 상태에 빠진 양 얼이빠진 표정이었다. 다만 주향 어머니 쪽의 친지들이 설레발을 치며 고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하나같이 몸매를 드러낸 옷차림에 화장이 짙고 다크서클이 또렷한 여자들이었는데, 이들이 불량한 남학생이 순진한 여학생을 꼬드겨 생긴 불상사로몰아가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세상 남자들의 기질을 성토한 뒤, 종춘의 유족측이 들으라는 듯이 정체불명의 악담과 저주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듣기 민망한 비속어와 욕설도 따라붙었다.
성경책을 손에 쥔 종춘 아버지는 죄인인 양 사타구니에 머리를 박은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졸지에 2대 독자 장남을 잃은 슬픔도 감당키 어려울 터인데,멀쩡한 남의 여식까지 꼬드겨 죽인 불한당인 양 몰아붙이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턱밑에서 떨어진 눈물이 그의 바짓단과 성경책을 적시고있었다.
철구가 이런 모습을 강 건너 불인 양 지켜보고 있었다. 주향 어머니의 ‘동생’들이 내뱉은 막말과 악담으로 인해 생긴 양측 유족 간의 긴장감 때문에 형주는 몹시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직업여성들의 좌충우돌하는 분위기와는 달리 양쪽 사고 원인과 경위를 아는 유족 간에는 불편한 낌새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조객들 사이에서는 청춘남녀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의 동반, 아니 동시에 죽은 사건인지라 무언가 편치 않은 궁금증 내지는 의혹의 전선이 형성되어져 있었다. 잠시 조용했던 주향 측 조객들이 다시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아니, 왜 오밤중에 멀쩡한 여학생을 꼬드겨서 저수지까지 데려갔대, 뭔 짓을 하려고?”
“뜻대로 안 되니까 어떻게 해보려고 거까지 데리고 간 거겠지. 언니들은 그걸몰라서 묻는 거야?”
종춘이 꼬드겼는지, 주향이 꼬드겼는지 어찌 안단 말인가. 어쨌든 사회적 인습과 통념에 따라 여학생 약자, 남학생 강자라는 보편적 프레임을 선악 구도로 환치시킨 여자들이 종춘을 가해자인 양 몰아갔다. 듣고 있던 철구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저 죄송합니다. 애비로서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죽은 여학생과 자식과의 관계를 알 수 없는 종춘 아버지가 견디다 못해 일어서서 주향 측 유족에게 사죄했다. 자신의 고통보다 상대의 고통을 먼저 챙기는 모습에서 종춘이 떠올랐다. 어쩌면 자식을 보내는 마지막 자리가 난장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 자식이 그랬다면, 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정중히 성심껏 사과한 종춘 아버지가 얼굴을 감싸 쥔 채 빈소를 빠져나갔다.
종춘은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았고, 이해득실 관계를 놓고 다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삶을 찾아서 살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어 일단 군복무를 먼저 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다. 형주는 일단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 군에 가서 시간을 갖고 찾아보고, 그래도 못 찾으면 제대 후에 이전과 달라졌을 시각으로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조언이었는데, 해주고 보니 허튼소리였다. 순박하고 예의바른 종춘은 혹시 간사님이 잡아주신다면 군 입대를 미루려고 했다면서 농반진반의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이 년 전 일이었다.
평소 종춘이 끔찍이 아꼈다던 고3 여동생이 빈소로 돌아온 아버지 곁에 붙어앉아 있었다. 여동생도 새색시인 양 아무 말이 없었다. 종춘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는데, 아들 시신을 확인하고 혼절해 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했다.
“둘이 사귀었으니까 놀러 간 거겠지.”
종춘 아버지의 사과 표명으로 일단락된 얘기가 다시 튀어나왔다. 좀 전에 있었던 주향 조객 측의 억지주장, 즉 일방적으로 꼬드겨서 놀러 갔다는 것에 대한 뒤늦은 대거리 같았는데, 말끝에 자신이 종춘의 고모라고 밝혔다.

“누님, 고정하세요.”
종춘 아버지가 자신의 누나를 감싸 안으며 주향의 유족 측에 고개 숙여 사과했다.
놀러는 둘만이 아니라 넷이 간 것이었다. 그런데 살아남은 둘의 침묵이 종춘고모의 주장을 사실인 양 만들어주고 있었다. 또한 종춘 아버지의 얼토당토않은 사과도 둘의 침묵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상대측 여자들이 맞대응하고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종춘 아버지의 사과를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아마도 일단 들쑤셔 본 것인데 문제 삼을만한 특이점이나 득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서자 얌전히 있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형주는 고개를 들어 철구와 성헌의 반응을 살폈다.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형주는 이놈들이 뭐가 있었구나, 단순한 사고사는 아니구나 싶었다.
철구는 학기 중 갑자기 군 입대를 했는데, 주향이 2학년 재학 중에 홀로 된 어머니가 단란주점을 열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철구를 차기 편집장으로 키운 형주도 곤란을 겪었다.
“학생들 지도를 어떻게 하기에, 두 명씩이나 물에 빠져 죽는댜?”
이번에는 주향의 유족이 엄한 학생과장을 닦달했다.
“송구합니다.”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반백의 학생과장이 얼른 무릎을 꿇으며 사과했다.
형주는 보기가 민망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혈기 방장한 청춘남녀들이 놀다가 생긴 사고를 가지고 왜 엄한 사람까지 잡는댜, 잡기를.”
종춘 고모가 끼어들어 학생과장을 도왔다.
“엄한 사람이라뇨? 학생지도 책임자가 어떻게 엄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학교장이라도 요구하려고?”
“죽은 사람으로 산 사람을 잡는 건 인륜이 아니랴.”
“청춘남녀가 서로 맘이 맞아 사귄 걸 가지고 왜 자꾸 문젤 삼는댜. 다 끝난 일이고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여. 우리가 이렇게 다툰다고 해서 살아 돌아오는 게 아니여.”
“망건 쓰다 장 파하기 전에 곱게 보내 줄 방도나 찾아들 봐.”

양측 유족의 말들이 두서와 계통 없이 오가며 뒤섞였다. 겉보기에는 양측의 입장과 견해차가 있어 보이나, 무언가를 공감하기 위한 내밀한 의향을 타진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마치 보색 대비가 분명한 두 물감이 물속에서 풀어져 섞이는 것 같았다. 형주는 종춘의 의사(義死)를 정사(情死)로 둔갑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철구와 성헌의 침묵이 이어졌다. 조객들까지 종춘과 주향을 연인 관계인 양 설정하고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형주가 나서서 둘 관계에 애정은 없었다고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


3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야 빈소에 영정이 놓이고 향이 올랐다.
“예쁘네.”
조객 중 다섯에 하나 꼴로 내뱉는 말이었다. 주향은 이국적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했는데, 젖은 눈빛과 도톰하고 짙은 입술은 몽환적이었다. 철구가 묘사한 바에 따른 것이다.
어쨌든 두 고인의 영정이 놓이자, 긴장감 속에 대립하던 분위기가 동정과 연민과 애도로 바뀌었다. 황당하지만, ‘청춘’과 ‘처녀’, ‘총각’과 ‘사고로 인한 동반 요절’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매개로 두 사람의 관계를 설정해보려는 움직임이 슬금슬금 감돌았다.
그때였다.
“양쪽 대표로 한 분씩 나오시죠.”
빈소에 고개를 빼꼼 들이민 재킷 차림의 중년사내가 말했다. 옆에 따라붙은 정복경찰이 그를 ‘양 계장님’이라고 불렀다. 검찰 소속 수사관인 듯싶었다.
양 계장은, 오늘이 토요일인 데다가 공사다망하신 관계로 못 오실 상황인데,참척을 당한 양쪽 부모의 절통함을 생각할 때 신속한 검시(檢屍)가 절박하다는 간청을 올려서 영감님이 이렇게 오실 수 있었다며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정복경찰은 양 계장의 재킷 안주머니에 봉투를 찔러 넣으며 과장된 동작으로 굽실거렸다. 그러고 나서 정복경찰이 성헌과 눈을 맞췄다. 성헌이 정복경찰을 뒤따라 나갔다.
양 계장이 말한 영감님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젊은 이였다. 구찌 반무테 안경에 감색 정장을 입은 야윈 체구의 검사였다. 양 계장은이 검사에게 입회할 양측 부모와 형주를 소개했다. 학생과장이 학생 사고 때마다 통상적으로 자신이 맡아온 참관인을 형주에게 떠 미뤘다.

양측 부모가 죄인인 양 주눅이 든 표정으로 검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무시한 검사가 양 계장을 재촉했다. 서두르라고 보채는 것 같았다.
“이미 보고말씀 드렸다시피 양측 모두가 부검은 원치 않는답니다요, 영감님.”
어깨가 구부정한 양 계장이 앳된 검사를 꽁무니에 달고 앞서 걸으며 말했다.
손바닥을 싹싹 비벼가며 말을 했는데, 사또를 모시는 아부쟁이 이방 같았다.
검사는 아무런 대꾸 없이 시신 보관실로 들어섰다. 갑작스런 냉기에 검사가 재채기를 하며 안경을 벗었다. 검시는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검사가 돌아서서 안경에 서린 김을 닦는 사이 보관실 직원이 철제 서랍 두 개를 열었다.
“빼서 올릴까요?
양 계장이 검사에게 물었다.
“그냥 두세요.”
검사가 반쯤 열린 철제서랍 쪽으로 걸어와 두 구의 시신을 번갈아 살폈다.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된 시신에 대한 검안(檢案)이었다. 검사는 마치 물건을 살피듯이 양옆 두 개의 철제서랍 속을 각각 삼십 초가량 살핀 뒤에 돌아섰다. 준비해놓은 고무장갑도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았다.
“양측 대표분들. 부검을 원치 않는 게 확실하죠?”
문 밖으로 나간 검사가 돌아서서 물었다.
“예.”
주향의 어머니가 머뭇거리는 사이 종춘의 아버지가 먼저 답했다.
“예.”
주향의 어머니도 답했다.
“나중에 딴소리들 하시면 안 됩니다.”
다짐을 받은 검사가 나가자 양 계장이 철제 검사대 위를 가리켰다. 바구니에 담긴 해당 유품을 알아서 챙기라는 제스처였다. 주향의 어머니가 유품을 챙길 때 형주는 낯익은 귀고리를 보고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검시 과정은 황당했다. 정확한 사인은커녕 사망시간과 신고시간과의 차이조차 확인하지 않는 수사가 이해되지 않았다. 삼십 초 남짓 걸린 검시 시늉만으로는 종결될 수 있는 죽음이 아니지 않은가.

부검 없이 검시만으로 시신을 돌려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유족과 조객들이 고무된 분위기였다.
“이제 장례만 잘 치러주면 되것네.”
빼앗겼던 시신을 되찾은 양 분위기가 들떴다.
“처녀 귀신 총각 귀신으로 따로따로 보낼 게 아니라, 둘을 맺어서 보냅시다. 어때요?”
종춘의 고모가 느닷없이 명혼(冥婚)을 제안하고 나섰다.
잠시 웅성거렸으나 동의도 반대도 밝히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초례상 간단히 차리고 원앙금침 깔아서 두 영정을 누여 합방만 시키면 되는데, 치러줍시다.”
조카를 홀로 보내는 것이 아쉬웠는지 그녀가 거듭 제의했다.
“영혼결혼식이 어디 떡 본 김에 제사지내듯 할 일인가요. 저는 싫습니다. 둘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지들끼리 결혼 약속을 하고 사귀었다고 해도 육례의 혼속을 무시한 명혼은 시키고 싶지 않아요.”
주향의 어머니가 확실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4

철구의 새 운동화를 바라보던 형주가 경찰관을 만나고 돌아온 성헌을 밖으로 불러냈다.
“철구가 주향이를 데리고 저수지로 내려간 거지?”
형주가 다그치듯 물었다.
“세 시쯤에 저는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술도 취했고, 전날 벼락치기 공부를 해서 잠을 못 잤거든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더 이상 술 마실 기분도 아니고 해서…….”
“둘이 싸웠다고? 왜?”
경찰에게 진술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싸웠다기보다 그냥 가벼운 말다툼 정도…….”
성헌이 슬쩍 말을 바꿨다. 그가 평소처럼 철구를 싸고돌았다.

“왜?”
“그거야…….”
하려던 말을 삼켰다.
“뭐야? 그거야…… 뭐냐고?”
형주가 재우쳤다.
“아, 몰라요.”
성헌이 짜증을 부리며 돌아섰다.
“종춘이와 주향이는 몇 시에 죽은 거야?”
“저는 몰라요. 철구가 깨워서 눈을 떴을 때가 세 시 이십오 분이었어요. 그때쯤 죽었겠죠.”
경찰에서 진술한 사고발생시간은 4시 경이었다. 사고가 나고 30분이 지난 뒤에 신고를 했다는 계산이 나왔다.
“철구 운동화 한 짝은 어떻게 된 거야?”
“주향이를 찾느라 저수지 둑을 헤매다가 잃어버렸대요.”
“거짓말. 저수지 둑을 헤맸는데 바짓가랑이와 신발에 개흙이 왜 묻어?”
흥분한 형주가 소리치며 다그쳤다.
“조용히 하세요, 간사님! 다 끝났어요. 대체 뭐가 알고 싶어서 이러시는 거예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본 성헌이 형주를 노려보며 대들었다.
“철구가 주향이를 데리고 저수지에 들어갔다가 주향이가 진펄에 빠져 못 나온거야. 맞지? 종춘이는 주향이를 구하려 나중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 같이 죽은 것이고, 맞잖아?”
형주가 신문하듯 다그쳤다.
“철구와 주향이가 저수지 쪽으로 먼저 내려간 건 확실해요. 그렇다고 해서 철구가 주향이를 저수지에 빠뜨렸다고 볼 수는 없잖아요? 전 깜박 잠이 들었다가 철구가 주향이를 부르는 소리에 깼는데, 잠시 후에는 종춘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형주의 짐작이 맞았다. 주향과 가까이 있던 철구는 살아 있고, 성헌과 있던 종춘이가 주향과 함께 죽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민철구. 이 자식이 종춘을 죽인 것이다. 그러고도 이 뻔뻔한 놈이 모르쇠로 종춘의 죽음을 욕되게 하고 있다니…….

“어딜 가요? 뭘 어쩌려고?”
성헌이 형주의 허리를 꽉 감싸 안으며 말했다.
“놔!”
“형! 정신 차려. 다 끝났어요. 다 잘 끝난 거라고!”
“뭐가? 뭐가 끝나?”
“둘이 왜 싸웠냐고 물었지? 대답해줄게.”
성헌이 형주를 감쌌던 두 팔을 풀며 말했다.
“형은 그 둘이 사귀는 걸 몰랐어?”
“……?”
“잘 아시면서 주향이와 서울까지 굳이 같이 다녀온 이유가 뭐야?”
“…….”
“설마 취재 지도차 동반한 것이라고는 하지 않겠지? 걔가 왜 워킹홀리데이를 갔고, 철구의 계속된 사랑고백에도 겉돌며 딴 짓을 하는지 정말 몰라요?”
“…….”
형주는 말문이 막혔다.
“왜? 행여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싶어서 우리 나이까지 들먹이며 마흔하나라고 하셨나요?”
형주는 당황스러웠으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응급실로 향하는 앰뷸런스의 경적이 이명처럼 들렸다.


5

하늘이 시리게 맑았다. 종춘 아버지의 양보로 주향의 영구차가 먼저 출발한 뒤, 종춘의 영구차가 뒤따랐다. 장례식장 앞 네거리에서 장지가 다른 두 대의 영구차가 갈렸다. 종춘은 직진했고, 주향은 좌회전했다.
성헌과 철구가 먼저 종춘의 유족을 좇아 버스에 올랐다. 셋 다 종춘을 따를 수 없어 형주는 주향을 좇았다. 주향을 실은 영구차가 도심을 벗어나 지방도로로 들어섰다. 형주는 차창을 열고 콘솔박스에서 담배를 찾아 물었다.
휴양림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주향이가 형주의 방문을 빼꼼히 열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같이 가시지 않으실래요?”
원고를 검토 중이던 형주는 그러고 싶지만 급히 마감해야 할 일이 있어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성헌 형이 간사님도 같이 가신다고 해서…….”
뒷말을 흐린 주향이가 귓바퀴를 잡은 채 얼핏 멋쩍게 웃은 것 같다. 잠시 말뜻과 웃음을 되새기다가 귀고리에 생각이 미친 형주가 복도로 달려 나갔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때 형주가 선물한 귀고리였다.
담배연기 속에서 기억을 헤집던 형주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멀어진 영구차와의 간격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