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명작순례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 콜레트 소설 『은둔의 사랑』

글 심재중 ㅣ 서울대학교 강사, 1959년생
역서 『영원회귀의 신화』 『늙은 흑인과 훈장』 『앙팡떼리블』, 공역서 『문학 텍스트의 정신분석』 등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세계명작총서(folio)로 펴낸 『은둔의 사랑(Laretraite sentimentale)』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1873~1954)라는 이름은 20세기 초 여성의 삶과 욕망, 여성주의, 여성적 글쓰기 등의 주제와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우선은 그녀가 작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과정 자체가 시사적이다. 첫 번 째 남편의 권유로 그녀가 처음 쓴 소설은 남편 윌리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뒤이어 발표한 소위 ‘클로딘 연작’도 남편과 공동 명의로 발표되었다. 『은둔의 사랑』은 1907년 윌리와 이혼한 그녀가 ‘콜레트 윌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다. 그녀가 ‘윌리’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콜레트’라는 이름만으로 글을 발표하는 것은 1923년 이후의 일이다. 20세기 전반 프랑스의 대표적 여 성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콜레트의 글쓰기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박탈당한 채 시작되었다.
또한 콜레트는 거듭된 결혼과 이혼, 동성애, 근친상간적인 사랑 등으로 점 철된 삶을 살았고, 그럼으로써 당대 사회에 끊임없이 논란과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랑 과 정열의 경험들을 고집스럽게 자신의 소설 속에 녹여냈다. 그녀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위상이나 정치적 권리 등을 문제로 제시한 작가가 아니다. 그녀는 줄기차게 여성의 사랑과 욕망, 쾌락, 관능, 고독 등의 내면 감정과 심리를 다루었다. 그래서 콜레트의 작품에 이따금 등장하는 ‘이기적인 삶’이라는 표현에서 ‘이기적’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조금 각별하다. 그것은 기존 사회의 관습과 통념, 여성의 삶을 옥죄는 사회적 시선 과 평가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감각·관능의 기쁨에 몰입하여 살고자 하는 여성의 태도를 가 리키는 표현이다.
『은둔의 사랑』 또한 20세기 초의 프랑스 사회에서 그런 ‘이기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한 여성 인물의 환희와 고통과 절망, 그리고 당대 ‘신여성’의 삶에 통주저음처럼 드리워져 있던 고독과 침묵을 형상화해 놓은 소 설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클로딘의 상념과 시선은 자신에게 감정의 동요(기쁨, 환희, 불안, 권태)를 불러일으키는 몇몇 주변 사람들, 사물들, 자연의 풍경들, 짐승들(고양이, 개, 박쥐, 두꺼비)의 테두 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의 중심에는 그녀가 사랑하지만 부재하는 한 남자가 있 다. 소설 속의 모든 문장들은 그 남자의 부재가 그녀의 삶 속에 파놓은 공동(空洞)의 가장자리에서 스멀스 멀 피어올랐다가 무수한 말줄임표들과 함께 그 심연 속으로 다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요컨대 콜레트 소설의 주제는 그 문체의 특징과 거의 분리되지 않는다. 그 문체 속에 삶과 세상을 바라 보는 화자-작가의 강렬한 도전 의식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관습과 도덕의 규범에 갇힐 수도 없고 갇혀 있지도 않은 한 여성의 욕망, 분방하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욕망이 감각적 문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신의 심정적 에너지가 투자된 것이라면 하찮고 덧없어 보이는 것들에게도 아낌없 이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 존재 전체를 거는 여성, 그러다가 결국은 상실감과 고통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끝 내 삶과 세상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 그런 여성의 섬세하고 강렬한 감각을 특징으로 하는 글쓰기가 바로 콜레트의 ‘여성적 글쓰기’이다.
『은둔의 사랑』에서 주인공 클로딘과 또 다른 여성 안니를 서로의 분신처럼 묶어 주고 있는 것도, ‘이기적 이고 단순한 삶’이라는 원칙 때문에 비슷한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여성들 사이의 강한 연대감이다. “여자는 개처럼 묶인 채 부림을 당하는” 세상에서 클로딘과 안니는 나란히, 서로 다른 방식으로, 탈주를 꿈꾼다. 예컨대 클로딘은 스스로에게 “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네 심장 소리”를 들으라고, “‘미친 듯이 춤 추고’ 싶은 욕구만 기억”하자고 다짐한다. 결국 소설의 끝에서 “세상의 끄트머리”에 혼자 남게 된 클로딘은 필생의 과제를 다시 마주한다. “요컨대 다시 사는 것!” 작가 콜레트에게, 그리고 소설의 화자인 클로딘에게, 그 재생(再生)의 동력은 자연과 짐승들 가운데서 보낸 유년의 기억, 그리고 그 기억 속에 뿌리박혀 있는 생 에 대한 어떤 원초적 감각에 있다. 어떤 맛이나 냄새, 촉감이나 이미지가 그녀에게 선물했던 기쁨과 환희 의 경험━강렬하지만 덧없고 덧없어서 더욱 강렬한 감각의 경험이 그녀(들)에게는 거의 ‘삶 그 자체’에 가깝 다. 남편의 죽음 뒤에 혼자 남은 그녀를 위로하러 왔던 무리들이 떠나고 마침내 고독을 방해받지 않게 된 클로딘은 오래된 정원의 짐승들, 나무들, 꽃들, 밤의 내음과 어둠에게 자기 삶의 동행이 되어 달라고 청한 다. 클로딘에게, 그리고 작가 콜레트에게 자연 속의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감각적·관능적 교감의 대상들이 고, 그래서 그것들에 대한 그녀의 묘사는 ‘근본적으로’ 슬프다. 이성의 논리에 억눌린 여성적 욕망과 감각 의 목소리가 슬프고, 남성성에 맞서면서 상처받은 여성성의 목소리가 슬픈 것처럼. 그러나 뼛속 깊은 상실 감과 고독에도 불구하고, 클로딘은 다음번에 찾아올 새로운 사랑, 덧없지만 충만한 사랑의 기쁨과 고통을 다시 꿈꾼다.


※ 『은둔의 사랑』은 재단의 외국문학 번역지원을 받아 필자의 번역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