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글밭단상

①예술가의 독창성

이숭원|평론가,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955년생
평론집 『몰입의 잔상』 『시간의 속살』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미당과의 만남』 등

빈센트 반 고흐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다. 그는 37세에 세상을 버렸는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32세부터다. 그림을 그리기 전 그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는 세상의 냉대와 박해 속에서도 그림에 몰입했고 고립의 창조에서 기쁨을 느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좋은 그림을 완성했을 때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천진한 고흐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 2년 동안 정신질환을 치료받는 과정에서도 그의 창작열은 시들지 않았고 정신의 고통을 더욱 개성적이고 강렬한 화풍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어떤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참혹한 불행이 회화적 독창성으로 전환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말이다. 오히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참혹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예술 창조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는 사실, 그 결과 다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위대한 독창성이 발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천부의 재능에 불굴의 노력이 겹칠 때 위대한 작품이 창조된다.
고흐는 자신의 그림을 무시하는 당대의 평단에 분노 를 터뜨렸다. 그는 대중들이 애호하는 트렌드가 무엇인 지 알고 있었고 비평가들이 어떤 그림을 선호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지 않았 고 비평가들의 평판과 타협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개 성에 몰입하여 다른 사람이 그릴 수 없는 자신만의 작 품을 창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5년 동안의 작품을 보면 그의 회화 세계가 계속 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정된 틀에 매이지 않 고 새로운 양식을 향해 실험을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다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흐만의 위대 한 작품이 탄생했다.
정지용은 일제강점기의 가장 유명한 시인이다. 1929년에 일본에서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시를 발표하자 문단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1933년 말 그해 시단을 총평하는 글에서 문단의 재 사(才士) 양주동은 “현시단의 작품으로 불어나 영어로 번역하여 저들의 초현실적 예술 경향 그 귀족적 수준을 능가하려면 이 시인을 제하고는 달리 없을 듯하다.”라고 정지용을 평가했다. 1935 년 10월에 『정지용 시집』이 간행되자 영문학자 이양하는 “온 세계 문단을 향하여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하고 부르짖을 수 있을 만한 시인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은 서구 모더니즘 기법과 관련된 정지용 시의 현대적 감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런데 정지용은 이러한 문단의 환호에 아랑곳하지 않고 1937년 가을부터 「비로봉」, 「구성동」, 「옥류동」을 발표하고 「삽사리」, 「온정」을 거쳐 「장수산」, 「백록담」, 「예장」, 「호랑나비」에 이르는 고유 어 활용 시의 대장정을 펼쳤다. 외국에 번역해 소개할 작품은 정지용의 시뿐이라는 평가와는 아 주 차원이 다른, 외국어로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고유어 활용의 독자적인 시를 창작한 것이다. 해방 후 이에 대해 정지용은 겸손하게 “조선인적 정서 감정과 최후로 언어 문자를 고수하였던 것” 이라고 말했지만 그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우리 언어와 전통과 역사가 말살되어 가는 시대 에 사라져 가는 고어와 고유어를 붙들고 시를 쓴다는 것은 항일 독립운동에 준하는 정신력이 요 구되는 일이다. 그는 의연히 이 길을 택했고 그 결과 다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정지용만의 작품 을 만들어냈다.
세계사의 지평에서 고흐와 정지용의 위상을 비교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술가의 독창성을 중심에 놓고 보면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당대의 평가에 연 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을 창조하려고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했다. 이것이 예술 창조의 정수이자 예술사의 진실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 은 없다.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 적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