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대산칼럼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글 김경욱 ㅣ 소설가, 계간 『대산문화』 편집자문위원, 1971년생
소설집 『위험한 독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 장편소설 『동화처럼』 『야구란 무엇인가』 『개와 늑대의 시간』 등

Ⓒ 백다흠    
내 나이 열 살이던 1980년. 그해 달력에서 부처님 오신 날은 유난히 붉었다. 삶이란 고뇌의 바다라는 깨달음을 준 건, 백팔배도 면벽수행 도 아닌 한 방송사에서 특별 편성(‘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함인지 무려 아침 8시 50분에)한 만화영화 였다. 극장개봉작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치기에 충 분했던 「철인 007」.
합법적 늦잠을 기꺼이 포기하고 눈곱도 떼어낼 새 없이 텔레비전 앞 으로 달려간 나는 볼을 연신 꼬집어보아야 했다. 우주 평화를 지키는 로봇의 대활약상이 펼쳐져야 할 화면이 본부로부터 교신이 끊긴 듯 지 지직대는 게 아닌가. 악의 무리들이 방해전파라도? 철인 007의 출동 을 막으려고? 남아 있던 잠기운은 안드로메다 성운 너머로 날아가고 나는 어느새 로봇 조종선에 탑승해 있었다. 지구의 운명이 내 손끝에 달린 것 마냥 안테나를 마이크로미터 단위로 조정해 보고, 수신기 메 인파워를 수백 번도 더 껐다 켜 봐도 소용없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 이 꺼지는 기분. 아니, 지구가 기어이 멸망해버린 느낌. 감당하기 힘든 분노와 원망으로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곡보도를 규탄하 는 시민들의 손에 지역방송국이 불타버렸으리라곤 상상도 못한 채. 시 민들을 향해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자행된 다음날이었다.
비운의 만화영화 제목을 39년 만에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뉴스로 접한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광주지법 근처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 창문 밖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법정에 불려온 한 피 의자를 향해.
“전두환은 물러가라.”
그해 5월 도청으로 달려가는 버스의 대학생들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전남대학교에서 멀지 않았다)밖 으로 나간 꼬맹이에게 눈을 맞춰오며 합창하듯 내지르던 바로 그 구호. 화면 속 아이들이 당시 내 또래여 서였을까. 유년의 어느 아침, 방해전파로 꽁꽁 동여매진 채 고뇌의 바다 밑바닥까지 끌려 내려갔던 만화영 화가 주먹 쥔 고사리 손들의 외침에 봉인이 풀린 듯 기억의 수면 위로 불쑥 떠올랐다.
저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목소리를 보탤 수 있었을까? 자문해보았다. 당연히, 라고 시작할 수 있다면 좋 겠지만 솔직히(무에서 창조해낸 용돈으로 만화방, 전자오락실을 기지 삼아 지구를 지키던 아이가 이토록 소심한 어른이 되어버리다니) 장담은 못하겠다. 대신 애들이 뭘 알고 그랬겠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에게 교사들이 무슨 소리를 했기에, 라며 해당 초등학교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는 뉴스 화면 하단에 나만의 자막(어디서 주워들었더라)을 적어 넣었다.
‘어른들은 비겁해서 용서를 좋아하고, 아이들은 솔직해서 정의를 좋아한다.’
애들이 뭘 모른다는 건,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기 쉽다는 건 어른들의 자기기만적 바람일 뿐. 아이 들이 정의의 편에 서는 건 정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걸 행동으로 표 현하는 능력을 아직 잃어버리지 않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조종당하는 건 오히려 어른들. 비겁한 어른들 이 시혜처럼 입에 올리는 용서, 두 글자야말로 최초 발신자는 언제나 제 심장의 가장 어두운 부분, 스스로 키워온 대마왕이 아니던가. 용서의 최종 목적지 역시도.
39년 전에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깥세상으로부터 폭도로, 불순세력으로 낙인찍히고 있던 그들, 결 의로 단단하지만 더없이 환하던 얼굴의 대학생 형 누나들이 절대로 악의 일원일 리 없다고. 도리어 쿠데타 와 민간인 학살로 권력을 쥔 자들이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목표랍시고 부르짖었다는 사실만한 아이러니도 없으리라. 만화영화 속 악당들처럼 지구 정복이라는 허황된 야욕을 대놓고 떠들어대지 않아도, 보호색 같 은 가짜 정의 아래 피 묻은 손을 감춰도 아이들은 다 안다.
어떻게? 그런 건 머리로 셈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느끼는 영역이니까. 삐리리. 쿠아앙. 등장을 예고 하는 불협화음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직감한다. 연두 빛 어린 순이 가장 밝은 쪽으로 이마를 내미는 일처 럼. 대학생들을 가득 실은 그 버스가 향하는 곳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해 준 게 언론도 어른들도 아닌 아이들, 골목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함께 뛰어 놀던 다른 아이들이었듯이.
비겁해서 용서만 편애하던 어른들이 난데없이 정의를 입에 올리는 때는 만화영화에 가둬놓은 정의가 현 실의 광장으로 뛰쳐나올까 두려워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