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특별기고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 이승우 장편소설 『생의 이면』에 부쳐

글 장 클로드 드크레센조(Jean-Claude DE CRESCENZO) ㅣ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교 아시아학 연구소 연구원,
한국문학 문예지 《글마당》 대표, 드크레센조(Decrescenzo) 출판사 편집위원. 1952년생

문학의 쓸모란 무엇인가. 이승우의 장편 『생의 이면』 은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 그리하여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답변을 모색해온 이 질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대답은 오히려 간단할 것이다. 문학은 쓸모 가 없다. 혹은 카를로 이솔라가 『우리 근원의 미래(L’Avenir de nos origines)』1)에서 단언했듯, “문학의 효용은 고독의 노래처럼 번져 나 가는 데”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나는 기꺼이 한 가지 대답을 덧붙이고 싶다. 문학의 효용은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데 있 다. 어쩌면 문학은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느리고 지난한 과정일는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상소2)의 말처럼 “우리의 온 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문학은 쓰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문학에 대 해 내릴 수 있는 정의란 것들은 전부 방어적이고 흐느적거리다 결국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되고 말 뿐인데, 그런 마당에 한 작가의 문학 프로젝트라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만일 문학 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라면, 미래를 예측하려는 사람들의 몸부림 또한 과연 필요한 일일 까? 미래에 대한 예측이란 곧 기획이나 계획의 다른 말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만일 모든 예측 이 금지되거나 불필요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면, 가령 프랑스 작가들의 경우 발자크나 루소가 얘기 하는 문학적 프로젝트를 과연 어떻게 해석하는 게 좋단 말일까. 프로젝트라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 없이 주어지는 걸까. 작가조차 인지하지 못한 프로젝트라는 게 있을 수 있나. 육안으로 확인 되는 프로젝트가 존재하려면 일관성 있는, 아니면 적어도 설득력 있는 작품이 있어야 한다. 샤를 모롱이 자신의 첫 번째 정신분석 비평서에서 이미 제안했듯3), 고착된 연관성들의 네트워크와 작가 의 다소 무의식적인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해당 작가의 여러 텍스트들을 통해 흔적을 추적 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스스로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생의 이면』은 문학 프로젝트의 원 형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어떤 의식도 의도도 없이 그저 작가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독자 역시,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모티프, 생각의 연쇄, 꿈이 가진 두 겹의 의미, 고착된 생 각 등을 마치 덤불 숲속을 헤매듯 헤쳐 나가다가 언제부턴가 이 작품에 한껏 매료된 자신을 발견 하게 된다. 보물찾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이란 것이 이렇게 존재하는 법이다.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낼 때마다 우리는 수수께끼의 답으로부터 오히려 점점 더 멀어져만 가지만, 거기서 오히려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
이승우의 작품이 바로 그런 행복을 지녔다. 그의 작품들 중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출간된 『생 의 이면』에 대한 내 첫인상은 물론 원숙한 고민과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었 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다시 말해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 은 어떤 한국 작가의 소설일 뿐이었다.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라는 소설의 모양새가 문학 독자들에 게 매혹적인 요소가 되었음은 부인하지 않겠다. 6년 뒤, 『식물들의 사생활』이 서점가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긴 하였으나, 작가의 책 한권 한권으로 증명되는 총체적 프로젝트, 하나의 작품 세계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시 6년이 흘러 2012년 『그곳이 어디든』이 출간되었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 라가 작가의 한 편의 소설과 다른 소설을 연결시켜주는 어떤 힘찬 끈이 하나의 ‘작품OEuvre’ 세계 를 완성시키기 위해 나아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끈은 우리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 는다. 이후 다른 책들이 출판되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주제들은 더 선명해지고, 반복되고, 집착 하는 모습이 되었다. 고정점들이 하나 둘 노출되면서 틈이 벌어진 단층들은 이제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출간된 『한낮의 시선』과 『지상의 노래』는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정 녕 출간마다 어떤 진행 상태를 보이는 하나의 프로젝트, 하나의 작품 세계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 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곧 문학 프로젝트가 되는 건 아니라고 누가 말했나. 작가 이승우에게는 타 인과의 소통을 향한 의지나 의도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라는 게 없다. 어쨌든 우리 눈에 그는 그렇 게 보인다. 프로젝트는 작가인 그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 작가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다른 소설가 들의 경우 작품마다 다른 주제를 찾아낸다면, 이승우의 작품에서는 언제든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제 아무리 변화무쌍한 상황에서라도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영원 불변한 주제의 출현이 목격된다. 그리하여, 그 영원 불변의 주제라는 것이 출발점에서부터 잠복상태였음을 확인하기 위 해 독자는 번번이 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한다. 바로 이 주제의 뼈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지점 이 장편 『생의 이면』이다. 너무 일찍 잃어버린 아버지, 타인으로부터의 거부, 사회의 단면, 추방, 어 딘가에 절대로 매이지 않겠다는 욕망과 의지, 은신처와 같이 비좁고 어두운 공간들, 고독의 지표 로서의 책 읽기, 집착하는 사랑과 거기에 수반되는 폭력성, 신과의 관계, 덧없는 세상과 영원한 다 른 세계의 주제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각 다른 소설 작품들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작가가 된다는 것, 그것은 발음하기도, 글로 적기도 결코 쉽지 않은 불어 동사 ‘OEuvrer’에 행위 를 부여하는 일이다. 일하다, 또는 움직이다 라고 구태여 번역할 수 있을 뿐, 이 동사에 딱 들어맞 는 한국어 동사는 모름지기 찾기 어렵다. 불어 사전은 OEuvrer 동사를 ‘중요한 어떤 일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것, 중요한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실행을 감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시 말해 OEuvrer는 본질적으로 건축적 의지가 담긴 행위이며, 어떤 목표를 향한 육체적 긴장 상태이 다. 도달하지 못한다면 깊숙한 고뇌 속으로 우리를 침잠시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솜씨 좋게 유 도하는 충동의 의도적 긴장 상태. OEuvrer, 그것은 실제 세계에 합류하라고 환상을 향해 내리는 명령이다. OEuvrer,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짓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도구들

을 허공에서 붙잡으려는 의지이다. 그것은 우 리 기억의 벌어진 틈새 속에서 이 미 길들여진 말들이 끝없이 뿜어 내는 분출물들을 길어 올리는 행 위이다. 틈새가 가리키는 것들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글을 쓴다. 틈 새는 벌어진 것, 열린 것. 그것은 거기에 어떤 이름이나 단어를 올 리는 것조차 헛된 일에 지나지 않는 원초적 상처이다. 틈새는 다나이데스의 물통4)이라 부르는, 영 원히 채워질 수 없었던 곳에 머문다. 채울수록 점점 더 비워지는 물통 다나이데스. 우리 세상의 틈을 메우겠다는 개인의 노력들은 정녕 부질 없다. 한번 더 말하지만, 채워지는 것은 다만 빈 것 일 뿐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부재가 지르는 비명을 소거할 수 없는 법이다. 오십 명의 다나 이데스가 노력한다 해도 사방이 뚫린 물통을 채울 방법은 없다. 소설 한 편 한 편,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나이데스의 통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누구도 바닥을 메우지 못한다. 항성과도 같은 텅빔이 작가를 에워싼다. 그런데 어쩌면 소설가가 되는 건 좋은 일일까.

열린 상태의 운명이란 욕망과 못지 않게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열린 상태는 아메바처럼 세포 분 열을 해서, 제 몸을 갈라 다시 생성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열린 상태와 욕망은 그들이 침묵의 의지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런데 열린 상태와 욕망은 입을 다무는 법이 절대 없 다. 컴컴한 운명과도 같은 이들보다 글쓰기를 더 강렬하게 자극하는 것은 없다. 열린 상태와 욕망 은 서로 경쟁과 지배의 관계를 이루고, 견뎌낼 수 있는 정도의 차원에서 고통을 유지해준다. 이들 은 우리의 고통을 보살피고, 상처를 한땀 한땀 바라보다가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그림자 속에 상 처를 놓아두는 건 아닐까 염려한다. 확실히 작품이란 이런 가치가 있다. 작품은 욕망과 열린 상태 사이에서만 흔들린다.


- 번역 이현희5)


1) 카를로 이솔라, 『우리 근원의 미래』, 밀롱 출판사, 2004
2) 프랑스 작가, 인류학자(1928~2005)
3) 샤를 모롱, 『강박적 변신에서 개인적 신화까지(Des métaphores obsédantes au mythe personnel )』, 조세 코르티 출판사,1962

4) 그리스 신화에서 50명의 다나이데스들이 지옥으로 가서 구멍 뚫린 물통에 물을 채우라는 벌을 받는다.
5) 문학 전문 번역가. 1974년 서울 출생. 프랑스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대학에서 비교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녀, 아델』 『섹 스와 거짓말』 『세상의 마지막 밤』 등 다수의 프랑스 소설을 한국어로 옮겼으며,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