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서시序詩

“내 소설의 장점은 시간을 모험적으로 다루는 것”

「운수 좋은 날」 줄거리 ①죽은 아내와 하룻밤 ②그날의 심증 ③치삼과 소년 ④개똥만 한 사람이 ⑤운수 좋은 날 ⑥휴가

문학교과서와 친일문제, 그 해결점을 찾아서

악당을 구분하는 능력

“신문물의 능동적 수용과 수평적 인간관계가 내 실학정신의 핵심”

읽다 접어둔 책과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여원』 편집장 시절의 좌담회

파도그림, 여름에 즐기는 한기(寒氣)

11미터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상의 공동체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②향학열, 반골정신 그리고 북청사람 ③가난과 고독을 동반 삼은 시조의 길

①적당한 사람,정적이 흐른다 ②말을 잇지 못하는,빛은 어둠의 속도

무구

①예술가의 독창성 ②하쿠나 마타타 ③빽

거꾸로 할머니와 바이올리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머리 위로 은총

한 권의 책이 작품 세계의 원형이 되기까지

아시아 시인들이 함께 만든 계간 『시평』의 마지막 가을

뒤죽박죽 나의 데뷔작들

허블

소설은 상상하게 하고, 영화는 선택하게 한다

시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하는가

허무맹랑한 공상? 지금 여기, 가장 핍진한 상상력 ‘SF’

논어와 탈무드

20세기 초 프랑스 여성주의 문학의 고전

시어의 미묘한 의미들 사이에서 주석의 역할을 생각하다

등장인물들이 일본어로 말하게 하는 작업의 즐거움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등

수요낭독공감 6월 행사

나의 아버지

①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 나의 아버지 김종문

글 김영한 ㅣ 김종문 시인의 차남, (주)종합건축사 사무소 가람건축 대표이사, 1951년생
김종문(1919~1981) ㅣ 시인, 비평가, 평양 출생. 국방부 정훈국장 역임, 육군 소장 예편.
『자유문학』 주간, 국제펜클럽 한국 대표,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등 역임. 시집 『벽』 『시사시대』 『인간조형』 『신시집』 등
서정과 지적인 사고를 결합시키는 시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후 불안과 문명의 허무에 대한 토로, 모더니즘 장시의 실험을 통해 폐허를 딛고
일어나려는 인간의 의지를 형상화함.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 ‘나의 아버지’ ❶

별을 내던지고 전업 시인을 택하다

- 나의 아버지 김종문



나의 아버지에 대해 써달라는 연락을 받고 나서 몇 번이고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아니 안 하겠다 고 했다. 나의 아버지란 제목은 아버지에 대한 자랑이나 사무치는 그리움을 토해내야 할 법한데 나 는 과연 그럴 만한가? 나는 또 아들로서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나 한 것일까? 가슴속 깊은 곳에 묻 혀있던 한을 토해 내기나 하면 어쩌지?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어머니가 사색이 되어 어린 나를 부르셨다. 네 아버지가 그 좋은 별을 내 던지고 집에서 시를 쓰겠단다. 그 당시는 군대에서 특히 육군에서 장군이란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권력을 가지고 기세가 등등하고 대단했었다고 한다. 별자리도 얼마 안 돼서 계급정년이나 나이 정년 같은 것도 없을 때다. 또한 군인연금제도도 없었다. 출퇴근 때는 헌병 지프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앞뒤로 칸보이를 할 때다. 어머니는 네 애비가 가까운 정신병원에라도 가서 정 신감정을 받아봐야겠다고까지 하셨다. 철없던 나도 그런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정말로 전역을 하셨고 예비역 육군 소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집에서 글쓰기 에만 몰두하셨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전업작가로 변신했던 것이다. 가세는 급격히 기울고 집안은 풍 비박산이 날 정도였다. 집안 분위기는 어두워져 갔고 가족 간의 대화도 없어졌다. 어린 시절 성북동 에서 살았는데 꽤 큰집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고 동네에서 장군 댁으로 불렸던 것 같다. 집 정원에는 고색창연한 팽나무가 한그루 있었는데 어느 날 근처 재벌집에 팔려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다른 나무도……. 그 정도로 집안이 몰락해 가고 있었다. 그날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어머니 의 그 눈물이…….
그 와중에 아버지는 어떤 가난한 시인을 위해 은행에 집을 잡혀서 돈을 주었던 기억도 난다.
군동기들은 장관이다 뭐다 한자리씩 다 하고 있을 때다. 집안이 벼랑 끝으로 치달을 때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주로 같은 이북 출신 국방경비대 창군동기들이다. 이승만 정권 때 헌병총사령관을 지냈던 원용덕, 백인엽, 장도영 장군 등이다. 그들은 가끔씩 집에 들러 어머니께 두툼한 봉투를 놓 고 가셨다. 송요찬 장군도 몇 번 들렸던 기억이 난다. 그분들도 군 시절 또는 그 후의 악연으로 박 정희와 사이가 좋지 않아 힘든 시절을 보내던 분들이었다. 동병상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이 북 출신으로 한때 같은 부대에 부하로 있었던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직접 온 적은 없었지만 매달 부하들을 시켜 생활비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육군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석방된 장도영 장군은 어느 날 서글픈 표정으로 집에 들러 어머니를 만났었고 그 며칠 후 쫓기듯 대한민국을 영원히 떠났다. 망명인지 추방이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고마웠던 분들인데……. 좋은 세 상으로 가셔서 편안하게들 계실 것이리라 굳게 믿고 싶다. 사정을 알게 된 정권실세였던 군대동기 몇 명이 힘을 써서 꽤 높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나 아버지는 거절했다고 한다. 글쓰기에만 몰두하 겠다면서…….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아버지는 딱 두 번 김종필 씨가 위원장이던 국제기능올림픽위 원회 감사와 국영기업체였던 한국에탄올 고문직을 하셨던 게 전부였다. 그나마 그것도 어쩐 일로 하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사춘기 때 아버지와 거의 대화가 없었고 그런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도 외톨이였던 기억이 난다. 대학 1학년 때 주변 친척들과 친구들이 『월간조선』을 보라고 연락이 왔다. 그 책에는 아버지 의 「패배」라는 글이 실려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고려대 입학 면접 때 교수들이 원서에 적힌 아버지 이름을 보고 시인 김종문 씨 아들이냐고 반가워들 하셨다. 나는 정색을 하고 우리 아버지는 그냥 동네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얼떨결에 둘러댔었다. 그 후 교수 한 분이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서 이 사실을 농담 삼아 말했나 보다. 그 글에서 아버지는 자신을 인생 패배자로 결론 내리셨던 것 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막내아들로부터 패배자가 되셨던 기분이 어떠하셨을까?

나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처자식을 저버린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한 번 사는 인생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뜻있고 의미있고 가치 있는 생을 사신 분일까?

그것도 아니면 어느 날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보고 깜짝 놀라 순식간에 인생관이 바뀐 것일까?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왼쪽부터 김종문 시집 『불안한 토요일』, 『인간조형』, 『강신제』(노마드북 제공)    

우리 집안에는 또 한 사람의 괴짜(?)가 있었다. 김종삼 작은아버지.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술주정뱅이(?)에 기이한 행동을 일삼던 종삼 삼촌(친근감 있게 그렇게 부 르는 걸 좋아하셨다)이셨던 것 같다. 동아방송에서 음악 담당으로 꽤 오래 근무했던 것으로 기억되 는데 밖에서 술 마시느라 월급을 한 번도 집에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한다. 방송국에서 일하실 때 도 숙모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생활비를 타가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우리 집이 잘 나갈 때 일이었다. 그 삼촌도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때려치우고 전업시인이 되었다. 우리 집안의 내력이 그러한가 보다.

나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시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 무슨 시를 썼는지도 모른다. 아니 의식적으로……. 반감으로 피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얼마 전 외진 곳 허름한 벽에 쓰여있는 시 하나를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간결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에 놀랐다. 시 제목은 “북 치는 소년” 나 는 순간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시인의 이름을 보고……. 김종삼. 대학시절 종로나 광화문에서 삼촌 을 우연히 마주치면 난 도망가기에 바빴다. 나를 유난히도 예뻐하셨던 종삼 삼촌은 얼마나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을까? 그 여리고 순수했던 종삼 삼촌의 마음에…….

대산문화재단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서 난 아버지를 다시 생각해 보고 또 내 인생을 되돌아보 는 계기가 되었다. 과연 나는 아버지보다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국립묘지 장군 묘역에도 정말 오랜만에 가 보았다. 성인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그나마 어머 니가 합장되어 있어 이따금씩 찾는 곳이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이젠 나도 늙어가나 보다. 그토록 증오했던 나의 아버 지……. 사랑과 증오는 같은 감정 안에 있는 것이라고 했던가? 아버지를 만나면 꼬옥 한번 안아 드 리고 싶다. 철없고 못난 아들이었다고…….
어린 시절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성북동 집 창문 밖에서 까치발로 서서 서재 안쪽에 앉아 시 를 쓰시던 아버지를 보았다. 그때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활짝 웃으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생각난 다. 그 순간 나는……. 나는…….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외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족들로부터 도 외면받고 폭음으로 나날을 지새우며 불우한 생을 살다간 나의 아버지……. 그래서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어느 겨울날 새벽, 아버지는 그렇게 갑자기 떠 나가셨다. 아무 말도 없이……. 그 후 그렇게 거의 사십 년이 흘러갔다. 그 사이 나는 결혼도 하고 아버지도 되었다. 결혼할 즈음에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설움도 많이 당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 고 나서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셨나 보다. 어릴 때 미국 유학을 떠났던 두 아들은 친할아버지에 대 해서 별로 아는 게 없고 관심도 없는 듯하다. 태어나기 너무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물론 얼굴 도 모른다. 친할아버지가 시인이었다는 것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모르는 듯하다. 친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도 고위 장성으로 군사령관을 지냈고 전역 후에도 한자리하신 외할아버지만 자랑거리이고 관심이 있었다. 아직 살아 계시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작동 현충원에 자리가 없어서 대전에 묻히실 텐데, 자주 가야 하는데 좀 멀다고들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외할 아버지와의 점심약속에 늦으면 안 되니 빨리 가자고 보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할아버지 앞에서…….

나는 아버지를 또 한 번 패배자로 만들었나 보다.
나의 아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