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대작 에세이
언론 생활 초기에 AP통신의 3인칭 객관적 화법에 관한 보도지침을 필자가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던 까닭은 영어로 소설쓰기를 공부하던 대학 시절부터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작가(invisibleauthor)”라는 개념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소설 작법에서는 심리소설이나 고백소설의 1인칭 화자가 아니라 3인칭 화법을 쓰는 전지작가(全知作家, omniscient author)라면, 쌍지팡이를 들고 앞에 나서서 독자에게 감상적이거나 사적인 설명을 강제로 주입하지 않고, 상황 전개와 내용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무성영화의 변사나 판소리꾼 또는 중세 통속소설(roman)처럼 “이 슬픈여인의 피맺힌 운명을 어찌하느냐”는 식의 푸념과 타령은 현대 문학에서 염치가 모자라는 고발 방식이라고 푸대접을 받는다. 언론의 서술 방식도 마찬가지다. 작가와 기자는 독자에게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야지 내용을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기자도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 기능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하면, 언론인은 감동하거나 감격하면 안 되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판단을 노출시켜도 안 된다. 비둘기 발표식을 가슴에 달면 안 되는 이유가그것이다. 현대 언론의 화법은 19세기 격문 작가(pamphleteer)나 요즈음 꼼수 막말 전문가의 비상식적인 직설과는 본질이 달라야 한다.
소설가의 경우처럼, 냉정한 글쓰기를 해야 하는 언론의 첫 조건은 행위자가 투명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 서술을 하려는 시각이 중심을 잡으려면 매체와 언론인은 투명하여 독자의 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사실과 진실만을 투과시켜 보여줘야 옳다. 하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이에 어긋나는 형태의 보도가 일상적인 듯싶다.
“이런 능지처참할 인간은 지구를 떠나야한다”고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는 독선과 편견의 심판자 노릇은 정통 언론이라면 더더구나 삼가야 한다. 매체는 개별적인 기자의 사유물이 아니며, 영향력이 큰 만큼 매체를 다루는 사람들의 윤리 의식과 감정 조절이 절실하게 필요한 유기체다. 베트남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 필자가 신형 M-16 신형 소총의 파괴력을 처음 확인했을 때, 총의 조작 능력이 나 자신에게 내재된 파괴력이라는 착각에 잠시 빠졌었다. 그것은 “나는 총이다”라는 단순한 동일시가 아니라, 총을 손에 들면 무기의 파괴력이 곧 나의 초인적인 능력이라고 믿어버리는 착각이었다.
언론인 활동을 할 때 역시 사람들은 비슷한 착각에 빠지는 경향이 심하다. 우리는 언론이나 정권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이 개인의 고유한 힘이라는 착각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은 집단에 소속된 동안에만 유효한 무기다. 일단 언론인이 되면, 언론의 막강한 힘이 개개인 기자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권력의 환각 현상에 사로잡히기 쉽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생겨난 듯싶다. 하지만 무기는 신분을 포장하려고 마련하는 고급 자동차나 명품처럼, 일시적으로 차용한 힘이다. 그리고 매체는 총기처럼 언론인이 일시적으로 차용하는 권력이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대두될 때마다 규제를 반대하며 나서는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에서는 “총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라는 논리를 입버릇처럼 내세운다. 총은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키는 범죄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고마운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전쟁의 양비론과 같은 맥락이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애매한 논리처럼 사람들의 판단력을 헷갈리게 만든다. 사람이 나쁘니까 죄를 짓는다는 귀납적인 인과관계를,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례를 존중하기 위해 어떻게 부정한다는 말인가?
아군이 휘두르는 총은 국민의 생존을 지켜주지만 적군이 휘두르는 총은 무자비한 비인도적 살상을 자행한다. 언론은 그와 똑같은 기능을 지닌 양면성 무기다. 국민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고 투쟁하는 언론은 강력한 보호자인 반면에, ‘생사람을 잡는’ 보복성 흑색 비방 보도나 정치적인 목적이 담긴 ‘갑질’을 일삼는 언론은 폭군으로 둔갑한다.
권력 계층에서 갑질이 가장 심각한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론 권력이다. 인권을 앞장세우는 언론이 때로는 개인과 집단의 인권을 짓밟는 살상 행위를 저지르는 잠재성을 가장 많이 내재한 무기처럼 작동한다.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용의자를 무죄로 간주한다는 법 논리가 민심을 교란하려고 작심한 악성 언론에서는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는 정치 권력의 탄압에 시달리며 고난의 시대를 보낸 비운의 한국 언론이 무방비 상태인 나약한 시민들에게 폭군으로 군림하는 듯싶은 기미가 보일 때마다 우리는 조선 시대의 시어미를 연상한다. 시어미에게 오랜 세월 시달린 며느리가 자신의 며느리에게 시어미질을 그대로 반복하는 고질적인 한풀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1981년부터 분쟁 해결과 피해 구제를 도모하는 언론중재위원회가 열심히 활동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개인이 집단적인 언론 권력에 의해 폭행을 당하면 군사독재의 희생자로 집단적인 저항을 했던 언론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개인의 노력과 반격으로는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판을 거쳐 거짓이 번복되어도 명예회복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인터넷에 남아 무기한 재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기정사실’처럼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던 거짓이 번복되더라도 이미 종결된 결과는 헐뜯기 이전의 원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은 객관적인 권위를 사적으로 남용함으로써 언론 매체가 범하기 쉬운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사실의 왜곡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횡포의 사례로 꼽힌다. 라이따이한과 베트남전에 대한 두 가지 반쪽짜리 진실이 우리 언론의 대표적인 왜곡의 본보기가 되겠다. 어용 언론과 고발 언론이 내세우던 논리는 양쪽 모두 진실을 제대로 얘기하려는 의도가 처음부터 없었다.
계몽과 선동은 목적과 행태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그리고 선무공작과 선동은 동종의 거짓말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언론이 겪은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쪽에서는 국가 시책에 부합하느라고 국익을 우선으로 내세운 애국심과 영웅 심리를 부추기며 미화하는 선무공작 수준의 왜곡이 극심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매도하려는 왜곡으로 맞불을 놓았다.
베트남전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치열하고 노골적인 시각의 대립을 촉발했으며, 두가지 거짓의 충돌은 퇴역 장군과 방송 언론의 소송 사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나고 10년쯤 지난 다음인 1982년 1월 23일에 CBS-TV가 방영한 기록물 <베트남 조작극(A Vietnam Deception )>이 뇌관이었다.
<베트남 조작극> 기록물은 패전의 분기점이라고 여겨지는 1968년 구정공세에 이후 미군이 계속 궁지에 몰렸지만 ‘군부에서 불리한 전황을 숨기고 낙관적으로 조작하여 행정부를 기만했다’고 고발했다. <추적 60분(60 Minutes)>으로 유명한 방송 진행자 마이크 월레스는 그런 사기극의 대표적인 사례로 “The President doesn't like bad news(대통령은 나쁜 소식을 좋아 하지 않는다)”고 한 주월 미군 총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말을 인용했다. ‘대통령이 나쁜 소식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관적이고 듣기 좋은 거짓말만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복무에 이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퇴역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방송국과 유명 언론인을 상대로 1984~85년 간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그가 한 발언은 “The President doesn't like bad news but 〜 (대통령은 나쁜 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진실은 알려줘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할 말은 솔직하게다 했다])”이라고 밝혀졌다. 하지만 월레스는 but (그래도) 이하의 본론을 잘라버리고 앞에 나오는 조건절 반 토막만 인용함으로써 ‘장군은 나쁜 소식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발언을 바꿔치기 했다.
좋은 소식을 나쁜 소식으로 둔갑시키는 언론의 왜곡 행위는 ‘내용을 편집하는 기법’의 형태로 우리나라 언론 역시 가끔 동원하는 묘기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어느 매체가, “광진교의 교각 하나에서 결함이 발견되어 신속하게 보수하겠다”고 한 해당 관청의 발표에서 ‘보수하겠다’는 골자를 탈락시키고 이 내용 일부를 마치 자신이 알아낸 특종인 것처럼 “광진교에서 결함이 발견되었다”고 신속하게 보도했던 경우다.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엉성하여 이른바 무보수 사이비 기자들이 창궐하던 시절에는 그런 목적성 비판이 협박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언론 생활을 하던 기간에 필자는 실제로 그와 유사한 사례를 가끔 접했다. 독재 정권을 공격하는 주요 전략 가운데 하나로 동원되기도 했던 전형적인 ‘각색’ 방식은 “서울시의 자체 조사 결과 불량한 건널목이 365군데여서 개선하기로 했다”는 발표문을 개조하여 “서울에는 365 군데 불량한 건널목이 있는데 정부에서는 아직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므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라는 식으로 비틀어 고발하는 뒤통수 때리기였다. 본디 문장과 변조 문장은 물론 둘 다 맞는 논리지만, 의미가 전혀 다르다.
해방 이후 등장한 여러 악성 ‘특종 보도’는 기자가 스스로 추적하여 찾아내는 심층취재가 아니라 남들의 정보를 자신의 공훈으로 위장한 경우 또한 없지 않았다. 전시에 발생한 오인 사살이나 다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뉘우치고 고백하면 ‘알맹이’만 뽑아서 기획 학살 폭로의 형태로 뒤집어 ‘발전’시키는 둔갑 방식 역시 그런 비양심적인 보도 행태에 속한다.
하지만 이 또한, 국토방위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인권 보호보다 훨씬 우선하고 ‘이념 대립의 구도 속에서 국가 안보와 철통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빌미로, 워낙 심하게 취재원이 국가 차원에서 봉쇄되었던 시절에 발생한 슬픈 부작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단계적인 확전(escalation)의 빌미를 찾으려는 통킹만 사건의 조작을 거쳐 본격적으로 가열된 월남전을 비판하기 위해서, 미국의 거대 언론 CBS는 정부 당국의 기만적인 조작 못지않게 편파적인 조작에 의존하는 보도 방식을 동원하여 난형난제를 이루었다. 2년에 걸친 법정 다툼은 ‘보도에 악의(malice)가 있었느냐’는 맹랑한 주변적 쟁점에 이르러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고, 결국 합의와 소취 하에 이르러 무승부로 끝났다.
정치역학적인 기능은 도외시하면서 언론과 여론은 베트남전을 부도덕하고 사악한 ‘국제 경찰 행위(유명 원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 사용했던 표현)’로 몰아붙여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전쟁이라고 일반 국민에게 인식시키고 죄의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이런 와중에서 곤욕을 치른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에게는 거대한 방송사와의 법정 투쟁이 전쟁 자체보다 훨씬 더 힘겨운 체험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전쟁 발발의 원인이야 어쨌든 미국의 파월 장병들은 가족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수치스러운 아버지처럼 조국에서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한국에서 건너간 《위싱턴포스트》의 어떤 기자를 포함하여 너도 나도 비둘기 발을 가슴에 단 시민들의 반전운동과 더불어 언론이 주도한 반국가 여론은 결국 베트남전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으로 남긴 주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가 하노이를 찾아가 미군 폭격기를 격추시키는 월맹군의 고사포 앞에 앉아 적군을 독려하고 동포를 적으로 부각하던 그런 행위는 미군들의 전투 의지를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야 긍지를 잃고 후회하는 미국인들의 자각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물론 그것은 만시지탄이었다.
여기에서는 퇴역 장군의 시각에 비중을 둔 논점을 취했기 때문에 필자의 논리 또한 언론의 입장에서는 편향적이요 부분적으로는 부당한 공격이라고 거부감을 느낄 듯싶다. 이 또한 논쟁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입증하는 참고 지표가 되겠다. 다각적인 현실을 하나의 단편으로 설명하려면 언제나 당연히 무리가 간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극도로 심한 집약적 전달 매체인 언론은 논문이나 저술처럼 장황하게 설명할 끝장 토론의 여유가 부족하고, 따라서 다양한 시각의 포괄적인 역학을 입체적으로 담기가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첨삭을 삼가는 투명한 보도를 통해, 지극히 소극적인 여과를 거쳐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합리적 언론의 이상적인 본질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중도를 가는 안전한 길이다.
하지만 언론의 존재 가치를 따질 때 안전한 소극성을 우선적인 본질로 간주하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다. 사회가 균형을 잃으면 언론이 끌어당기고 밀어서 사회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여 소임을 다 하기만 한다면 천연 자원, 경제 구조, 정치 역학과 더불어 언론은 인간 사회를 움직이고 통제하는 4대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는 사회를 전력(電力)처럼 작동시키는 그 힘은 비판 기능에서 비롯한다.
물론 이 비판 기능은 투명해야 한다. 무색(無色)이어서 균형을 잡고 올바른 진실을 보여줘야 하는 매체가 구성원들의 색깔과 성향에 따라 국민의 판단을 한쪽으로만 몰고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여론이 아니다. 일부 집단을 위해 세뇌와 선동의 앞장을 서는 편향적인 언론은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며, 전체를 대변하는 절대 시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감성적인 판단력과 공정성 인식은 어떠한가? 고래와 개와 도롱뇽은 보호하자고 열심히 부르짖으면서 인간이 소와 돼지와 닭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도롱뇽 단식 투쟁으로 인해서 경부고속철도 공사가 중단되어 수조원의 국고 손실을 가져온 사태는 통치 집단의 건설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면 질서를 파괴하고 국정을 방해하는 시민단체의 과도한 간섭이 빚어낸 표본적인 파괴 행위다.
미국이 그런 대표적인 예이지만, 민주적인 사회일수록 진정서와 고발장과 소송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방행정의 절차가 더디어진다. 생계형 범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상한 정의감은 노점상의 불법 점거로 일반인의 도로 사용과 장애인의 통행을 가로막는 폐단을 낳는다. 인간 사회는 끝없이 반복되고 번복되는 충돌의 터전이다.
1992년에 필자는 대우건설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느라고 파키스탄에 갔다가 그곳 영자 신문 사설에서 희한한 내용을 접했다. “독재가 가장 능률적인 통치 방식”이라는 수상의 발언이었다. 반대하는 자가 없으면 번거로운 의견수렴을 거칠 필요조차 없이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도 되니까, 통치는 당연히 일사불란하게 능률적으로 진행된다.우간다의 대통령이 “언론은 국가의 적”이라고 한 말은 비판적인 매체들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어 물고 늘어지니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편해진 심기를 잘 드러낸 반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완곡 화법 표현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누구에게나 할 말은 있기 마련이니까 세상은 대부분의 중요 쟁점에 있어서 쌍방 반론의 권리를 균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20세기 중반에 대두한 ‘청년문화’는 이른바 세대차라는 주제의 논쟁에서 반란의 기치를 올리며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당시에는 젊은 세대 쪽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도전적인 반항이 범세계적인 풍조였다. 이상적인 사회주의 개념의 사상적 유행에 도취했다가 깨어나면서 기성세대 규탄으로 관심이 쏠린 ‘이유 없는 반항’ 청년들은 미국에서는 청교도적 권위를 붕괴시키려는 예술적 표현의 분출에 열중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가부장적인 가치관과 유교적 윤리를 앞세우던 낡은 세대가 서양화한 젊은 세대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대가족 제도를 통해 서양보다 보수적 위계질서가 훨씬 확고했던 1970년대의 한국에서는 공격적인 청년 발언을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라고 무시했으며, 당시 청년문화의 3대 상징물이었던 청바지와 생맥주와 통기타를 부박한 일탈처럼 백안시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공권력이 단속하던 시절에는 언론 역시 청년문화를 경시하고 비판하는 시각과 성향이 뚜렷했다.
그러자 젊은 가수 양희은이 화가 나서 조선일보에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라는 짤막한 글을 하나 썼다. 자세한 내용과 구체적인 어휘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 젊은 우리는 돈이 없어서 싸고 질긴 청바지를 입고, 병맥주를 마실 돈이 없어서 족기에 담긴 생맥주를 사 마시고, 가장 싸구려 악기인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투였다. 새로운 시각의 화법으로 역습을 펼친 절묘한 발언이었다. 아직 반항 세대의 젊은이였던 필자는 양희은의 반론에서 퍽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기성세대는 반항아 영웅들에게 싸잡혀 공격만 받으며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했다. 매도를 당하며 이리저리 밀려 말문이 막혀버린 기성세대는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질서가 역전을 당하자 무기력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 미국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 공영방송에서 <전초선(Frontline)>이라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토론장을 마련했다. 늘 그렇듯이 아메리카의 젊은 세대는 맹렬하게 그들의 고민과 불만을 털어놓으며 그것이 대부분 기성세대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어느 중년 남자가 짤막하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는 항상 올바른 행동만 하고,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는 줄 아느냐”는 발언이었다.
이제는 중년으로 접어든 필자는 그 날 기성세대의 발언에서 10년 전 양희은의 발언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이를 먹는 사이에 필자의 시각이 어느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모든 명제에서는 이렇듯 쌍방의 쟁점이 공존하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존중해야 하며, 일방적인 절대 논리는 거의 대부분 독선의 양상을 드러낸다.
반항과 공격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격과 수비가 세대별로 역할이 따로 설정된다는 고정관념이 과거에는 보수적인 구세대의 방패였지만,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신세대의 특권으로 바뀌었다. 물론 양쪽 모두 잘못된 시각이다.
일방적 노선은 당연히 저항을 받기 마련이고, 이제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초기 단계를 맞아 피스톤의 왕복 현상이 다시 방향을 바꾸는 중이다. 수난을 당하는 집단은 저항하기 마련이고, 60년대 반항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나쁘다고 비난만 받다가 지친 기성세대 또한 존재감을 되찾기 위해 지금 저항을 벌이는 중이다.
우리나라의 정치판과 언론 역시 그런 회귀 단계를 거치는 듯싶다. 그리고 정치적 격랑에 떠밀려 다니는 우리 사회에서 서로 물고 물리며 끊임없이 불안하게 사방으로 흔들리고 요동치는 쳇바퀴에 얹혀 돌아가는 언론이 논리적 균형을 잡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투명 언론인의 정체
글 안정효 ㅣ 소설가. 1941년생
소설 『가을바다 사람들』 『학포장터의 두 거지』 『동생의 연구』 『은마는 오지 않는다』 『미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나비 소리를 내는 여자』 『낭만파 남편의 편지』 『태풍의 소리』 『착각』 『실종』 『미늘의 끝』 『지압 장군을 찾아서』 『솔섬』 등
|
언론 생활 초기에 AP통신의 3인칭 객관적 화법에 관한 보도지침을 필자가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별로 느끼지 않았던 까닭은 영어로 소설쓰기를 공부하던 대학 시절부터 이미 “눈에 보이지 않는 작가(invisibleauthor)”라는 개념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소설 작법에서는 심리소설이나 고백소설의 1인칭 화자가 아니라 3인칭 화법을 쓰는 전지작가(全知作家, omniscient author)라면, 쌍지팡이를 들고 앞에 나서서 독자에게 감상적이거나 사적인 설명을 강제로 주입하지 않고, 상황 전개와 내용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전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무성영화의 변사나 판소리꾼 또는 중세 통속소설(roman)처럼 “이 슬픈여인의 피맺힌 운명을 어찌하느냐”는 식의 푸념과 타령은 현대 문학에서 염치가 모자라는 고발 방식이라고 푸대접을 받는다. 언론의 서술 방식도 마찬가지다. 작가와 기자는 독자에게 상황을 보여주는 데서 그쳐야지 내용을 설명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기자도 소설가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 기능해야 한다는 원칙에 의하면, 언론인은 감동하거나 감격하면 안 되고 개인적인 감정이나 판단을 노출시켜도 안 된다. 비둘기 발표식을 가슴에 달면 안 되는 이유가그것이다. 현대 언론의 화법은 19세기 격문 작가(pamphleteer)나 요즈음 꼼수 막말 전문가의 비상식적인 직설과는 본질이 달라야 한다.
소설가의 경우처럼, 냉정한 글쓰기를 해야 하는 언론의 첫 조건은 행위자가 투명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 서술을 하려는 시각이 중심을 잡으려면 매체와 언론인은 투명하여 독자의 눈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사실과 진실만을 투과시켜 보여줘야 옳다. 하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이에 어긋나는 형태의 보도가 일상적인 듯싶다.
“이런 능지처참할 인간은 지구를 떠나야한다”고 일방적인 공격을 가하는 독선과 편견의 심판자 노릇은 정통 언론이라면 더더구나 삼가야 한다. 매체는 개별적인 기자의 사유물이 아니며, 영향력이 큰 만큼 매체를 다루는 사람들의 윤리 의식과 감정 조절이 절실하게 필요한 유기체다. 베트남에서 전쟁을 하는 동안 필자가 신형 M-16 신형 소총의 파괴력을 처음 확인했을 때, 총의 조작 능력이 나 자신에게 내재된 파괴력이라는 착각에 잠시 빠졌었다. 그것은 “나는 총이다”라는 단순한 동일시가 아니라, 총을 손에 들면 무기의 파괴력이 곧 나의 초인적인 능력이라고 믿어버리는 착각이었다.
언론인 활동을 할 때 역시 사람들은 비슷한 착각에 빠지는 경향이 심하다. 우리는 언론이나 정권처럼 자신이 속한 집단의 힘이 개인의 고유한 힘이라는 착각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그것은 집단에 소속된 동안에만 유효한 무기다. 일단 언론인이 되면, 언론의 막강한 힘이 개개인 기자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권력의 환각 현상에 사로잡히기 쉽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표현이 그래서 생겨난 듯싶다. 하지만 무기는 신분을 포장하려고 마련하는 고급 자동차나 명품처럼, 일시적으로 차용한 힘이다. 그리고 매체는 총기처럼 언론인이 일시적으로 차용하는 권력이다.
미국에서 총기 소유권에 관한 논쟁이 대두될 때마다 규제를 반대하며 나서는 NRA(National Rifle Association)에서는 “총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라는 논리를 입버릇처럼 내세운다. 총은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키는 범죄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폭력으로부터 시민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고마운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전쟁의 양비론과 같은 맥락이며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애매한 논리처럼 사람들의 판단력을 헷갈리게 만든다. 사람이 나쁘니까 죄를 짓는다는 귀납적인 인과관계를, 극소수의 예외적인 사례를 존중하기 위해 어떻게 부정한다는 말인가?
아군이 휘두르는 총은 국민의 생존을 지켜주지만 적군이 휘두르는 총은 무자비한 비인도적 살상을 자행한다. 언론은 그와 똑같은 기능을 지닌 양면성 무기다. 국민의 자유와 정의를 지키려고 투쟁하는 언론은 강력한 보호자인 반면에, ‘생사람을 잡는’ 보복성 흑색 비방 보도나 정치적인 목적이 담긴 ‘갑질’을 일삼는 언론은 폭군으로 둔갑한다.
권력 계층에서 갑질이 가장 심각한 분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론 권력이다. 인권을 앞장세우는 언론이 때로는 개인과 집단의 인권을 짓밟는 살상 행위를 저지르는 잠재성을 가장 많이 내재한 무기처럼 작동한다. 유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용의자를 무죄로 간주한다는 법 논리가 민심을 교란하려고 작심한 악성 언론에서는 실질적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는 정치 권력의 탄압에 시달리며 고난의 시대를 보낸 비운의 한국 언론이 무방비 상태인 나약한 시민들에게 폭군으로 군림하는 듯싶은 기미가 보일 때마다 우리는 조선 시대의 시어미를 연상한다. 시어미에게 오랜 세월 시달린 며느리가 자신의 며느리에게 시어미질을 그대로 반복하는 고질적인 한풀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1981년부터 분쟁 해결과 피해 구제를 도모하는 언론중재위원회가 열심히 활동하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개인이 집단적인 언론 권력에 의해 폭행을 당하면 군사독재의 희생자로 집단적인 저항을 했던 언론보다 훨씬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개인의 노력과 반격으로는 사실상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판을 거쳐 거짓이 번복되어도 명예회복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인터넷에 남아 무기한 재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기정사실’처럼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던 거짓이 번복되더라도 이미 종결된 결과는 헐뜯기 이전의 원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은 객관적인 권위를 사적으로 남용함으로써 언론 매체가 범하기 쉬운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사실의 왜곡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횡포의 사례로 꼽힌다. 라이따이한과 베트남전에 대한 두 가지 반쪽짜리 진실이 우리 언론의 대표적인 왜곡의 본보기가 되겠다. 어용 언론과 고발 언론이 내세우던 논리는 양쪽 모두 진실을 제대로 얘기하려는 의도가 처음부터 없었다.
계몽과 선동은 목적과 행태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그리고 선무공작과 선동은 동종의 거짓말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리 언론이 겪은 역사를 되돌아보면, 한쪽에서는 국가 시책에 부합하느라고 국익을 우선으로 내세운 애국심과 영웅 심리를 부추기며 미화하는 선무공작 수준의 왜곡이 극심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매도하려는 왜곡으로 맞불을 놓았다.
베트남전은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치열하고 노골적인 시각의 대립을 촉발했으며, 두가지 거짓의 충돌은 퇴역 장군과 방송 언론의 소송 사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패배로 끝나고 10년쯤 지난 다음인 1982년 1월 23일에 CBS-TV가 방영한 기록물 <베트남 조작극(A Vietnam Deception )>이 뇌관이었다.
<베트남 조작극> 기록물은 패전의 분기점이라고 여겨지는 1968년 구정공세에 이후 미군이 계속 궁지에 몰렸지만 ‘군부에서 불리한 전황을 숨기고 낙관적으로 조작하여 행정부를 기만했다’고 고발했다. <추적 60분(60 Minutes)>으로 유명한 방송 진행자 마이크 월레스는 그런 사기극의 대표적인 사례로 “The President doesn't like bad news(대통령은 나쁜 소식을 좋아 하지 않는다)”고 한 주월 미군 총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말을 인용했다. ‘대통령이 나쁜 소식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낙관적이고 듣기 좋은 거짓말만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베트남 복무에 이어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고 퇴역한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방송국과 유명 언론인을 상대로 1984~85년 간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그가 한 발언은 “The President doesn't like bad news but 〜 (대통령은 나쁜 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진실은 알려줘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할 말은 솔직하게다 했다])”이라고 밝혀졌다. 하지만 월레스는 but (그래도) 이하의 본론을 잘라버리고 앞에 나오는 조건절 반 토막만 인용함으로써 ‘장군은 나쁜 소식은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의미로 발언을 바꿔치기 했다.
좋은 소식을 나쁜 소식으로 둔갑시키는 언론의 왜곡 행위는 ‘내용을 편집하는 기법’의 형태로 우리나라 언론 역시 가끔 동원하는 묘기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어느 매체가, “광진교의 교각 하나에서 결함이 발견되어 신속하게 보수하겠다”고 한 해당 관청의 발표에서 ‘보수하겠다’는 골자를 탈락시키고 이 내용 일부를 마치 자신이 알아낸 특종인 것처럼 “광진교에서 결함이 발견되었다”고 신속하게 보도했던 경우다.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엉성하여 이른바 무보수 사이비 기자들이 창궐하던 시절에는 그런 목적성 비판이 협박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언론 생활을 하던 기간에 필자는 실제로 그와 유사한 사례를 가끔 접했다. 독재 정권을 공격하는 주요 전략 가운데 하나로 동원되기도 했던 전형적인 ‘각색’ 방식은 “서울시의 자체 조사 결과 불량한 건널목이 365군데여서 개선하기로 했다”는 발표문을 개조하여 “서울에는 365 군데 불량한 건널목이 있는데 정부에서는 아직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므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라는 식으로 비틀어 고발하는 뒤통수 때리기였다. 본디 문장과 변조 문장은 물론 둘 다 맞는 논리지만, 의미가 전혀 다르다.
해방 이후 등장한 여러 악성 ‘특종 보도’는 기자가 스스로 추적하여 찾아내는 심층취재가 아니라 남들의 정보를 자신의 공훈으로 위장한 경우 또한 없지 않았다. 전시에 발생한 오인 사살이나 다른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뉘우치고 고백하면 ‘알맹이’만 뽑아서 기획 학살 폭로의 형태로 뒤집어 ‘발전’시키는 둔갑 방식 역시 그런 비양심적인 보도 행태에 속한다.
하지만 이 또한, 국토방위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인권 보호보다 훨씬 우선하고 ‘이념 대립의 구도 속에서 국가 안보와 철통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빌미로, 워낙 심하게 취재원이 국가 차원에서 봉쇄되었던 시절에 발생한 슬픈 부작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단계적인 확전(escalation)의 빌미를 찾으려는 통킹만 사건의 조작을 거쳐 본격적으로 가열된 월남전을 비판하기 위해서, 미국의 거대 언론 CBS는 정부 당국의 기만적인 조작 못지않게 편파적인 조작에 의존하는 보도 방식을 동원하여 난형난제를 이루었다. 2년에 걸친 법정 다툼은 ‘보도에 악의(malice)가 있었느냐’는 맹랑한 주변적 쟁점에 이르러 교착 상태에 빠져버렸고, 결국 합의와 소취 하에 이르러 무승부로 끝났다.
정치역학적인 기능은 도외시하면서 언론과 여론은 베트남전을 부도덕하고 사악한 ‘국제 경찰 행위(유명 원로 언론인 월터 리프먼이 사용했던 표현)’로 몰아붙여 미국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전쟁이라고 일반 국민에게 인식시키고 죄의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이런 와중에서 곤욕을 치른 주월 미군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에게는 거대한 방송사와의 법정 투쟁이 전쟁 자체보다 훨씬 더 힘겨운 체험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전쟁 발발의 원인이야 어쨌든 미국의 파월 장병들은 가족으로부터 배척을 받는 수치스러운 아버지처럼 조국에서 따돌림을 당해야 했고, 한국에서 건너간 《위싱턴포스트》의 어떤 기자를 포함하여 너도 나도 비둘기 발을 가슴에 단 시민들의 반전운동과 더불어 언론이 주도한 반국가 여론은 결국 베트남전을 미국 역사상 최초의 패전으로 남긴 주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미국 여배우 제인 폰다가 하노이를 찾아가 미군 폭격기를 격추시키는 월맹군의 고사포 앞에 앉아 적군을 독려하고 동포를 적으로 부각하던 그런 행위는 미군들의 전투 의지를 여지없이 꺾어버렸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야 긍지를 잃고 후회하는 미국인들의 자각이 표면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물론 그것은 만시지탄이었다.
여기에서는 퇴역 장군의 시각에 비중을 둔 논점을 취했기 때문에 필자의 논리 또한 언론의 입장에서는 편향적이요 부분적으로는 부당한 공격이라고 거부감을 느낄 듯싶다. 이 또한 논쟁의 균형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입증하는 참고 지표가 되겠다. 다각적인 현실을 하나의 단편으로 설명하려면 언제나 당연히 무리가 간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극도로 심한 집약적 전달 매체인 언론은 논문이나 저술처럼 장황하게 설명할 끝장 토론의 여유가 부족하고, 따라서 다양한 시각의 포괄적인 역학을 입체적으로 담기가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첨삭을 삼가는 투명한 보도를 통해, 지극히 소극적인 여과를 거쳐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합리적 언론의 이상적인 본질처럼 여겨진다. 그것은 중도를 가는 안전한 길이다.
하지만 언론의 존재 가치를 따질 때 안전한 소극성을 우선적인 본질로 간주하기가 어려운 것이 문제다. 사회가 균형을 잃으면 언론이 끌어당기고 밀어서 사회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여 소임을 다 하기만 한다면 천연 자원, 경제 구조, 정치 역학과 더불어 언론은 인간 사회를 움직이고 통제하는 4대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하는 사회를 전력(電力)처럼 작동시키는 그 힘은 비판 기능에서 비롯한다.
물론 이 비판 기능은 투명해야 한다. 무색(無色)이어서 균형을 잡고 올바른 진실을 보여줘야 하는 매체가 구성원들의 색깔과 성향에 따라 국민의 판단을 한쪽으로만 몰고 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여론이 아니다. 일부 집단을 위해 세뇌와 선동의 앞장을 서는 편향적인 언론은 하나의 시각에 불과하며, 전체를 대변하는 절대 시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감성적인 판단력과 공정성 인식은 어떠한가? 고래와 개와 도롱뇽은 보호하자고 열심히 부르짖으면서 인간이 소와 돼지와 닭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해보라. 도롱뇽 단식 투쟁으로 인해서 경부고속철도 공사가 중단되어 수조원의 국고 손실을 가져온 사태는 통치 집단의 건설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면 질서를 파괴하고 국정을 방해하는 시민단체의 과도한 간섭이 빚어낸 표본적인 파괴 행위다.
미국이 그런 대표적인 예이지만, 민주적인 사회일수록 진정서와 고발장과 소송 사건으로 말미암아 지방행정의 절차가 더디어진다. 생계형 범죄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이상한 정의감은 노점상의 불법 점거로 일반인의 도로 사용과 장애인의 통행을 가로막는 폐단을 낳는다. 인간 사회는 끝없이 반복되고 번복되는 충돌의 터전이다.
1992년에 필자는 대우건설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하느라고 파키스탄에 갔다가 그곳 영자 신문 사설에서 희한한 내용을 접했다. “독재가 가장 능률적인 통치 방식”이라는 수상의 발언이었다. 반대하는 자가 없으면 번거로운 의견수렴을 거칠 필요조차 없이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려도 되니까, 통치는 당연히 일사불란하게 능률적으로 진행된다.우간다의 대통령이 “언론은 국가의 적”이라고 한 말은 비판적인 매체들이 사사건건 딴죽을 걸어 물고 늘어지니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편해진 심기를 잘 드러낸 반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기묘한 완곡 화법 표현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누구에게나 할 말은 있기 마련이니까 세상은 대부분의 중요 쟁점에 있어서 쌍방 반론의 권리를 균등하게 존중해야 한다.
20세기 중반에 대두한 ‘청년문화’는 이른바 세대차라는 주제의 논쟁에서 반란의 기치를 올리며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당시에는 젊은 세대 쪽에서 반론을 제기하는 도전적인 반항이 범세계적인 풍조였다. 이상적인 사회주의 개념의 사상적 유행에 도취했다가 깨어나면서 기성세대 규탄으로 관심이 쏠린 ‘이유 없는 반항’ 청년들은 미국에서는 청교도적 권위를 붕괴시키려는 예술적 표현의 분출에 열중했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가부장적인 가치관과 유교적 윤리를 앞세우던 낡은 세대가 서양화한 젊은 세대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대가족 제도를 통해 서양보다 보수적 위계질서가 훨씬 확고했던 1970년대의 한국에서는 공격적인 청년 발언을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라고 무시했으며, 당시 청년문화의 3대 상징물이었던 청바지와 생맥주와 통기타를 부박한 일탈처럼 백안시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공권력이 단속하던 시절에는 언론 역시 청년문화를 경시하고 비판하는 시각과 성향이 뚜렷했다.
그러자 젊은 가수 양희은이 화가 나서 조선일보에 「청바지 가수도 할 말 있다」라는 짤막한 글을 하나 썼다. 자세한 내용과 구체적인 어휘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 젊은 우리는 돈이 없어서 싸고 질긴 청바지를 입고, 병맥주를 마실 돈이 없어서 족기에 담긴 생맥주를 사 마시고, 가장 싸구려 악기인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그것이 뭐가 나쁘냐”는 투였다. 새로운 시각의 화법으로 역습을 펼친 절묘한 발언이었다. 아직 반항 세대의 젊은이였던 필자는 양희은의 반론에서 퍽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기성세대는 반항아 영웅들에게 싸잡혀 공격만 받으며 무기력한 존재로 몰락했다. 매도를 당하며 이리저리 밀려 말문이 막혀버린 기성세대는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는다”는 질서가 역전을 당하자 무기력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초 미국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 공영방송에서 <전초선(Frontline)>이라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토론장을 마련했다. 늘 그렇듯이 아메리카의 젊은 세대는 맹렬하게 그들의 고민과 불만을 털어놓으며 그것이 대부분 기성세대의 탓이라고 비난했다. 그러자 어느 중년 남자가 짤막하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젊은 세대는 항상 올바른 행동만 하고,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에 대하여 아무런 불만이 없는 줄 아느냐”는 발언이었다.
이제는 중년으로 접어든 필자는 그 날 기성세대의 발언에서 10년 전 양희은의 발언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이를 먹는 사이에 필자의 시각이 어느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모든 명제에서는 이렇듯 쌍방의 쟁점이 공존하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항상 염두에 두고 존중해야 하며, 일방적인 절대 논리는 거의 대부분 독선의 양상을 드러낸다.
반항과 공격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격과 수비가 세대별로 역할이 따로 설정된다는 고정관념이 과거에는 보수적인 구세대의 방패였지만,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신세대의 특권으로 바뀌었다. 물론 양쪽 모두 잘못된 시각이다.
일방적 노선은 당연히 저항을 받기 마련이고, 이제는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초기 단계를 맞아 피스톤의 왕복 현상이 다시 방향을 바꾸는 중이다. 수난을 당하는 집단은 저항하기 마련이고, 60년대 반항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작정 나쁘다고 비난만 받다가 지친 기성세대 또한 존재감을 되찾기 위해 지금 저항을 벌이는 중이다.
우리나라의 정치판과 언론 역시 그런 회귀 단계를 거치는 듯싶다. 그리고 정치적 격랑에 떠밀려 다니는 우리 사회에서 서로 물고 물리며 끊임없이 불안하게 사방으로 흔들리고 요동치는 쳇바퀴에 얹혀 돌아가는 언론이 논리적 균형을 잡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