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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 강변에 꽃피운 서원교육에 관한 보고서
글과 사진 ㅣ 조운찬 경향신문 후마니타스연구소장. 1963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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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행의 『미호집』
조선시대의 교육은 크게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으로 나뉜다. 관학 교육기관으로는 서울에 성균관과 사부학당이, 지방에 향교가 있었다. 성균관과 사부학당은 나름 제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향교는 조선중기 이후 사화가 빈번히 발생하고 지방에 우수한 교수진이 파견되는 것을 꺼려하면서 점차 외면을 받았다. 더구나 향교는 평민의 자제도 누구나 입학이 가능해 엄격한 신분제를 고집하던 양반사대부들로부터는 멀어져 갔다. 이 틈새를 사학 교육기관이 메웠으니, 바로 서원(書院)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이 지방 사대부 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원은 본래 선현에 대한 추모와 배향의 공간이었다. 학문이나 충절이 뛰어난 유학자를 제사지내는 게 서원의 1차적 기능이었다. 향촌의 사림이 모이고, 예학의 구심점이 되면서 서원은 자연스레 교육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서원은 대개 사당을 맨 안쪽에 두고 강당이나 기숙사를 바깥쪽에 배치하는 구조(前堂後祠)를 취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향사(享祀:제사)를 교육보다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일부 서원에서는 봄 가을에 향화(香火)가 피어오른다(문화재청은 몇 해 전부터 병산서원, 돈암서원 등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서원의 향사풍속을 담은 <서원향사>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향사에 비해 서원 교육에 대한 학계의 조명은 비교적 적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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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가문의 적자(嫡子)’ 김원행, 석실서원을 일으키다
조선시대 서원 가운데 백운동서원(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필암서원 등을 꼽는다. 백운동서원은 최초의 서원이고,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결집소 역할을 하면서 서원 중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병산서원은 만대루라는 이채로운 건축물로 유명하다. 전라도의 대표 서원인 필암서원에서는 지금도 제향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이들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통해 수백 개의 서원이 된서리를 맞았다. 살아남은 서원은 47곳에 불과했다. 철폐된 서원 가운데에는 경기도 남양주 미호의 석실서원도 포함돼 있었다. 오늘날 석실서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원의 존재감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석실서원의 소프트웨어가 전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문인 김원행의 문집 『미호집(渼湖集)』에는 김원행의 강학활동과 석실서원의 강령, 운영규칙, 학풍 등이 상세하게 실려있다. 『미호집』은 석실서원의 타임캡슐이다.
석실서원은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충절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1656년에 창건되었다. 형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자결했고,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해 심양에 인질로 잡혀간 척화파의 핵심인물이다. 김상헌이 생을 마감한 지 4년 뒤에 건립된 석실서원은 7년 뒤인 1663년 현종으로부터 ‘석실사’라는 편액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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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은 처음 김상용과 김상헌만을 추모하는 사당이었다. 그러나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 김창협 등의 유학자들이 추가로 배향되면서 노론의 핵심 서원이 되었다. 이후 석실서원은 학문 연구와 교육기능이 강화되어 조선 후기 학술을 주도해 갔다. 그곳을 학문과 교육의 터전으로 일군 이는 김창협이었다. 김상헌의 4대손이자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협은 1695년 석실서원과 인접한 미호에 거처를 정하고 석실서원에서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그의 동생 김창흡도 함께 했다. 형제의 교육활동은 송나라 때 정호-정이 형제에 비유될 정도로 성대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창협-김창흡의 교육은 오래가지 못했다. 1701년 김창협이 아들 김숭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은거에 들어가고, 1722년에는 김창흡마저 사망하면서 석실서원의 교육은 중단되었다.
서원 교육을 중흥시킨 이는 김원행이었다. 그는 김상헌의 6대손이자 김수항의 증손이고 김창집의 손자이다. 조선 후기 명가로 꼽히는 안동김씨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그도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긴 어려웠다. 김원행은 19~20세 때 잇단 정치적 사건(신축환국, 임인옥사)으로 할아버지(김창집), 친아버지(김제겸), 친형(김성행) 등 삼대가 일거에 죽음을 당하면서 과거의 꿈을 접는다. 이후 충청도 금산에 은거하던 김원행은 40세가 넘어 미호(渼湖)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면서 미호 강변에 방치되어 있던 석실서원 중흥에 나선다.
『미호집』, 석실서원의 타임캡슐
김원행에게 안동김씨 선현을 배향한 석실서원을 재건하는 일은 지상 과제였다. 그즈음 조정으로부터 사헌부 지평, 종부시 주부, 장악원정, 사헌부 집의 등의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관심은 오직 서원을 정상화시키고 제자들을 교육하는 일이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석실서원의 강생에게 알리다(諭石室書院講生)」라는 글에 잘 드러난다.
“서원은 본래 학문을 익히기 위해 세운 것이니, 선비가 학문을 익히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없다. 우리 고장에 이 서원이 있는 것은 실로 우리 고장 선비로선 큰 다행인데도 학문을 익히는 일이 잠잠하여 들리는 것이 없다면 선비의 수치이다. 이제 다행히 유림의 의론으로 인해 강학하는 일을 보게 되었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다. 그러나 선비가 학문을 익히는 데 급급한 것은 과연 무엇을 하려고 해서인가? 장차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을 구하여 참으로 자신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해서일 뿐이다”(『미호집』 권14).
석실서원의 원임(院任·서원 운영자)을 자처했던 김원행은 서원의 운영 체계를 재정비했다. 원장과 훈장의 책임과 역할, 원생의 수칙을 마련하고 교육방법, 시험 규칙 등을 손수 제정하였다. 『미호집』에는 ‘석실서원 학규(學規)’, ‘석실서원 강규(講規)’와 같은 서원의 규칙과 예절을 규정한 기록이 여러 편 보인다. 이를테면 서원에서 암송해야 할 텍스트로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심경, 근사록을 채택하였다. 또 매달 16일에는 암송대회를 열었다. 주목할 대목은 석실서원에서는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양반과 상민,한양과 지방의 구분이 뚜렷했던 신분사회 조선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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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경상도 함안에서 온 주필남이라는 유생이 서원에서 공부한 지 반년 만에 병으로 숨진 일이
있었다. 집안이 가난해 시골집으로 운구할 비용마저 마련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때 김원행은 선비가 죽었는데 장사도 치르지 못하면 유가의 도리가 아니라며 영의정에게 편지(‘爲石室院儒呈領相’)를 띄워 조정의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 주필남이 읽었던 『소학』의 뒷장에 글(‘贈周生小學書後跋’)을 써 제자가 공부했던 책을 고향으로 내려 보내기도 하였다.
김원행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석실서원은 스승과 제자가 어우러지는 학술공동체가 되었다. 김원행 학단은 석실에서 문학과 철학 그리고 시대를 논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3대 논쟁의 하나로 꼽히는 호락논쟁이 꽃을 피운 곳도 석실서원이었다. 호락논쟁이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사람과 동물의 본성은 차이가 있는가), ‘미발심체’(未發心體·마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등을 놓고 호서(충청도)와 낙양(서울)의 학자 사이에 학술적으로 다투었던 사건으로 석실서원은 낙론의 근거지가 되었다. 20권분량의 『미호집』의 절반은 편지글로 채워지고 있다. 이 가운데 ‘송명흠에게 보낸 편지’처럼 호락의 학술논쟁을 담은 글이 적지 않다. 오늘날 학계는 김원행을 김창협과 이재의 뒤를 잇는 낙론의 대표학자로 꼽고 있다.
풍광 좋은 ‘미호’는 카페촌으로 변모
김원행이 호를 취한 ‘미호’는 석실서원 앞으로 흐르는 한강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호수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원행은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가운데 미호의 아름다운 자연을 마주하며 시를 읊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미호집』에는 미호 강변에서 김원행이 제자들과 뱃놀이하면서 지은 시가 적지 않다. 김원행이 석실서원을 이끄는 동안 그곳에는 유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많을때에는 30~40명이 서원에서 기숙하며 학문을 연마했다. 석실서원을 거쳐 간 유생은 150여명을 헤아리는데, 훗날 실학자로 이름을 떨친 홍대용과 황윤석도 그 일원이었다.
김원행은 미호의 석실서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서원에서 멀지 않은 석실마을의 선영(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묻혔다사후 33년이 되던 1805년 조정에서는 그에게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857년에는 석실서원에 배향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 뒤 석실서원은 서원철폐령이라는 철퇴를 맞고 사라졌다. 오늘날 석실서원이 자리했던 남양주시 수석동 서원말은 카페촌으로 변모했다. 폐허가 된 서원터에는 ‘석실서원지’라는 표지석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다행히 겸재 정선이 그린 ‘미호’ 그림이 <경교명승첩>에 실려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석실서원터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미호’라는 이름에 걸맞게 여전히 아름답다. 그러나 미호의 아름다움이 어찌 풍광에만 있겠는가. 그곳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사상을 논했던 서원지기 김원행과 그 제자들의 학예활동이 그 아름다움에 값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