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시의 메아리를 걷다

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일생의 근심을 끌어올리는 시간

아는 진실과 모르는 진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투명 언론인의 정체

바로 당신이 아Q다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우연’과 ‘무심함’을 담는 기억의 방부제

여승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편집자 김이구

미호 강변에 꽃피운 서원교육에 관한 보고서

바다와 디아스포라의 도시, 부산 광복로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활력 사라진 문단, 해외거장 작품과 외국 대중소설이 메워

‘돈’에 대한 내숭에 던진 돌직구

살아가야 할 자와 죽어가는 자 사이의그 아득한 거리

방물장수와 보부상을 몰아낸 신문·잡지의 광고

《현대문학》 창간 전후

무장해제의 기억들

비를 맞는 개구리 눈빛

세기적 추녀의 연애담에 오버랩된 30년전 한국사회

시대의 갈등과 비극의 붉은 얼룩을 옮기다

왕비와 기사의 애절한 궁정식 사랑

NEW BOOKS

재단소식

단편소설

작은 사람들의 노래

글 조해진 ㅣ 소설가, 1976년생
소설 『천사들의 도시』『한없이 멋진 꿈에』『로기완을 만났다』『아무도 보지 못한 숲』『목요일에 만나요』 등

▲ 조해진 ©운영자

균은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눈을 떴다. 손안에 만져지는 휴대폰의 금속성 질감은 균이 이미 꿈에서 깼다는 걸 증거하고 있었지만, 꿈속의 진눈깨비는 다섯 평짜리 원룸에까지 쫓아와 실재인 양 허공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방금 전 균은 무한의 암흑 한가운데서 하염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귓가에선 그들의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늘 그랬듯 화음도 맞지 않는 엉터리 성가였다. 오래전 보육원을 떠나온 이후 그들과 마주친 적조차 없는데,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붉은 입술만 뻥긋거리는 살색의 덩어리로만 남았는데도, 마치 현실의 바깥 어딘가에 그들의 노래를 채집하는 기계 장치라도 있는 듯 그 소음은 시도 때도 없이 균의 감각을 지배하곤 했다. 앨리. 외로워질 때면 늘 그랬듯 균은 앨리, 나직이 속삭였다. 앨리를 생각하면 잠시나마 지독한 외로움을 잊을 수 있었다. 내 건강과 평화를 죽을 때까지 기도해주겠다고 약속한 단 한 사람, 내게 허락된 유일한 가족. 그런데 어째서 앨리에게선 6개월째 답장이 없는 건가.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균은 꿈속에서까지 걷잡을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고, 그 감정은 이내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를 몰고 왔다. 몸서리치게 춥다는 자각은 꿈을 해체하는 일종의 암호처럼 조금씩 주위의 어둠을 지워갔다. 어둠을 지운 흰빛이 다시 점만큼 잘게 부서져 진눈깨비로 흩날리기 시작할 무렵 균은 눈을 떴다.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천장에서부터 나부끼는 가상의 진눈깨비 속에서…….

그러고 보니 보육원에서 벗어나던 날에도 진눈깨비가 날렸다. 균은 2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의 초겨울 하늘로 확장되는 미색의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버스도 닿지 않는 외진 곳이어서 평소엔 무겁도록 적막하던 보육원이 그날만큼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경찰이 거나 기자였고, 혹은 언론의 보도대로 아이들의 상태가 처참한 지경이 맞는지 확인하러 온 구경꾼들이었다. 수갑을 찬 원장과 교사들이 고개를 푹 숙인 모습으로 경찰차 쪽으로 걸어가자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구경꾼 무리에선 간헐적으로 욕설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열한 살의 균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보육원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들이 잡혀갈 수도 있다는 것에 그저 어리둥절했을 뿐, 세상의 뒤늦은 관심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균이생각하기에 어른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고 그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균은 창가에서 외따로 떨어져 나와 좁고 어두운 보육원 복도를 오래오래 걸었다. 걸으면서, 맹수의 우리에 놀잇감을 넣어두고 실컷 구경하다가 놀잇감이 죽기 직전에야 문을 열어주는 문지기의 인색한배려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사이 세월은 무심히 흘러갔다. 그 뒤 시설의 아이들이 학대받는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보육원은 일종의 표본처럼 회자되었는데, 그런 류의 사건에 매번 같은 분량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을 균은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동조하거나 참견하지 않았고 자신이 그 문제의 보육원에서 6년 가까이 살았다는 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날, 수송버스를 타고 아동보호소에 도착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무작위적인 선택을 받았는데 그 선택의 순간 아이들의 미래도 일정 부분 결정됐다. 친척이 데리러 오는 경우도 있었고, 극히 일부지만 친부모가 울부짖으며 찾아와 아이를 끌어안는 장면도 연출됐다. 남겨진 아이들은 뜨겁도
록 시기 어린 시선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그런 장면을 묵묵히 지켜봐야 했다. 대부분은 일정 기간 상담치료를 받고 영양 보충을 한 뒤 각기 다른 보육원으로 옮겨가거나 해외로 입양될 운명이었다. 균 역시 이듬해 봄, 아동보호소에서 연결해준 서울 근교의 보육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U시로 내려와 작업장을 전전하게 되는 용접공의 미래 역시 이미 그때부터 배태되었을 것이다. 서로의 새로운 연락처도 모른 채 뿔뿔이 흩어진 그 백여 명의 아이들 중에 보육원에서 보낸 시절을 완전히 망각한 운 좋은 친구도 있을지 균은 가끔씩 궁금했다. 한 명이라도 그런 혜택을 받고 있다면, 그 옛날 친부모에게 안기던 친구를 지켜볼 때보다 더 뜨겁게 시기할 게 분명했다. 균은 아직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몸에 밴 것들, 이를테면 뭐든지 남들보다 빨리 먹는 습관이라든지 좀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아침 6시만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지는 것도 그 시간마다 보육원 전체에 울리던 기상벨이 청각기관뿐 아니라 몸 구석구석에 각인된 탓일 터였다. 간혹 잠에 취한 나머지 기상벨을 듣지 못하는 날은 있었어도 기상벨이 울렸다는 걸 알면서도 배짱 좋게 더 누워 있거나 일어나기 싫다며 떼를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곳에선 균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신 눈치가 빨랐고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했으며 이름이 불리면 무조건 잘못부터 빌었다. 다들 아이답지 않은 힘으로 처신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나흘에 한 번씩은 갇히거나 굶거나 모질게 맞았다. 보육원에는 6시 기상 외에도 무수히 많은 규율이 있었다. 밥을 먹을 땐 잡담을 해선 안 됐고 밥을 먹고 나면 아무리 추워도 밖으로 나가 30분씩 체조를 해야 했다. 취침 전 점호는 완벽해야 했으며 한달에 두 번씩 교사의 서툰 가위질에 머리칼이 바짝 잘려야 했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보육원이면서 동시에 보육 교사들이 홈스쿨링을 하는 일종의 대안학교였으므로 그곳에 있는 동안 균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외출은 거의 허락받지 못했다. 슬픔조차 사치가 되는 기억, 망각의 권리를 앗아가는 강렬한 감각들…….

잠은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균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암막 커튼을 한 뼘 벌리자 흐리고 추운 U시의 아침 한 조각이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균은 빈 소주병과 담배꽁초로 어질러진, 식탁이기도 하고 책상이기도 한 테이블에서 간밤에 앨리에게 쓰다 만 편지를 집어 들었다. 편지를 다시 읽어보니 취기에 젖은 감상적인 문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식에게 엄살을 부리는 건 함량 미달의 부모나 하는 짓이고 균은 고작 그 정도의 부모가 되려고 10년 동안 앨리를 후원한 게 아니었다. 균은 편지를 담배꽁초와 함께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돌아서며, 새로 쓰게 될 편지에는 소식이 없어 서운하다거나 걱정되어 괴롭다는 문장은 모두 빼야겠다고 균은 다짐했다.(중략)
* 본 원고의 전문은 <대산문화> 2015년 여름호 지면을 통해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