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글 서승해 ㅣ 서정주의 장남, 변호사. 1940년생
서정주 ㅣ 시인. 1915~2000년
시집 『화사집』 『귀촉도』 『서정주 시선』 『신라초』 『동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서(西)으로 가는 달처럼…』 『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안 잊히는 일들』 『노래』 『팔할이 바람』 『산시(山詩)』 『늙은 떠돌이의시』 『80소년 떠돌이의 시』, 저서 『한국의 현대시』 『시문학원론』 『세계민화집』 등
2000년 12월 24일은 미당 서정주 시인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밤새 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습니다. 제가 공항에 내렸을 때 도로는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밤늦게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거의 스무 시간쯤 오면 꼭 저승에 다녀온 것 같습니다. 더구나 밤낮을 바꾸고 날짜 변경선을 지나 돌아가신 분 장례를 치르러 오니 꼭 저승에서 깨어나 새 나라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또 어떻게나 추운지 갓 태어난 병아리가 새 세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삼성병원 빈소에 도착하니 문상객들과 친척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미 세 달 전부터 한국에 나와 아버님을 돌보던 안사람이 저를 보며 어떻게 돌아가신 아버님과 그렇게 똑같이 생겼느냐고 말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12월 25일 빈소에는 한국 문단 전체가 참석한 듯했습니다. 저명한 문학가뿐만이 아니라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진 시인, 소설가, 비평과 수필을 쓰시는 분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시세계를 회상하는 계기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50년 넘게 교단 안팎에서 가르친 미당의 제자는 아마 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그 제자와 독자 모두가 참석한 듯 했습니다. 그때 살아계신 네 대통령도 조화와 조문을 보내왔고 한 분은 직접 조문을 오셨습니다.
이어령 전 문광부 장관이 오셔서 미당은 한국 시단의 거성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시인 김남조 선생은 오백년에 한 번쯤 나오는 큰 시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은 장례식을 국장 마냥 취재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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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7월 11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면서 「국화 옆에서」의 한 구절을 낭송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시의 국화는 민족의 끈기와 지속력을 상징하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제가 자랄 때 대학교육 받고 문학에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국화 옆에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아버님의 시 30~40편은 암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한국 사람들이 제가 알기로는 몇 백 명이 넘습니다.
문상하러 오신 5백~6백 분께 음식을 대접하고 인사드리고 좀 뜸한 기회에 무희 김백봉 여사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중앙대학교 교수로 계시던 김백봉 선생은 학교 가실 때마다, 어떤 때는 토요일에도 미당을 만나게 되어서, 이제는 은퇴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내 큰놈이 법학대학을 다녀보겠다고 해서 보태주려 한다”고 하시더랍니다. 김백봉 선생은 “미국서 법대 댕기면 잘 되겠지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제가 마흔 넘어서 철없이 새로운 삶을 살아 보겠다고 법대에 들어갔는데, 아버님 후원 없이는 가망이 없었습니다. 그때 김백봉 선생께서 제게 특별히 해주신 말씀에 뜨겁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라면서 말썽도 많이 부리고, 미국에 와서도 도서관장 한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여 아버님께 걱정을 많이 끼쳤습니다. 그래도 항상 너그럽게 사랑해주시고 저를 항상 믿어주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흥건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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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변호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버님의 가장 마음 아픈 얘기 중 하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님 열두세 살 무렵 중앙고보에 보내려고 서울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입학 수속을 끝내고 나서 경성제대 법대 정문으로 가 캠퍼스를 보여주면서 “너 크면 저 대학에 한번 들어가 봐라” 하셨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꿈은 반년도 안 돼서 깨졌습니다. 아버님은 세 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본 기마경찰들한테 돌멩이를 던지다가 잡혀 들어갔습니다. 미우라라고 하는 검사가 보더니 “이 조그만 아이가 뭘 안다고?” 하더랍니다. 학교에선 즉시 퇴학당하고 줄포집에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오고 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는 숟가락을 들고 한참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밥상위에 떨어지더랍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한참 후에 일어나 가셨는데, 그때 시간이 갑자기 정지되고 꿈처럼 몇 년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 때문에 일본 사람들한테 낙인 찍혀 해방될 때까지 형사가 쫓아다녔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 아버님은 한밤중에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어나실 때가 많았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어머님이 물으면 저기 형사 놈들이 골목 귀퉁이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어코 1944년 여름 어느 날 일본 형사가 명륜동 골목 어디에서 갑자기 뛰어나와 한 손으로 위 팔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수갑을 채워 전주 유치장으로 끌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고창고등학교에서 연극을 준비하던 학생 중 반일 혐의를 받고 구속 중이던 두 학생이 서정주 시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폐간 기념시로 쓴 「행진곡」이라는 시 때문에 세 달 가까이 유치장에서 고생하셨습니다. 어머님 쪽 이모부가 고등법원 서기라 그분 주선으로 풀려나오시긴 했지만 평생 이 경험을 끔찍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뒤 얼마 안 돼 일본 황실에서 조선 제일가는 시인이 누구인지 수색한 결과 서정주가 젊은 사람 중에는 제일 유망하다고 듣고는 황제를 칭찬하는 시 한번 써달라고 초청을 하였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나 돼서 본인 없이 확실한 답을 할 수는 없지만 살아계셨을 때 말씀으론 그때 일본이 필리핀, 중국,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까지 갔기 때문에 한국 독립의 희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감방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뒤 이제는 마누라에 자식도 있지,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지, 장남으로서 동생 셋도 데리고 있는 상황이라 황실의 압력을 거절하기가 여러모로 불가능하셨을 줄 압니다. 그 후로 징병하는 데 협조하는 글을 써달라는 초청이 와서 그런 글도 해방될 때까지 2년 동안 몇 편 썼다고 합니다.
그 글들을 잘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구속을 피하기 위해 마지못해 쓴 글들이지 진심으로 쓴 글들이 아닙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한 십 년이 지났을 때 극단 반일파들이 모여서 미당 서정주를 친일파로 모는 바람에 대한민국 민족성을 상징하는 「국화 옆에서」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누락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본인도 돌아가셔서 답변을 못하는데 이런 치명적 재판을 하는 것은 국제인권헌장과 마그나카르타 정신 위반이라고 제가 항의를 했더니 한 젊은 검사가 나와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이고 이 법률은 외국 법률인 마그나카르타에 오염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민주주의의 기본법입니다. 이 법 때문에 무슨 처벌이든지 배심원 앞에서 재판받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도록 되었습니다. 피고인이 참석하지 않는 한 황제도, 아무리 높은 자라도 처벌을 내리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인간 헌법의 기본헌장입니다. 미당이 살아계실 때는 감히 말도 못 내놓던 사람들이 돌아가신 지 십 년 뒤에 벌떼처럼 달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미당은 평생 반일하다가 퇴학도 당하고 감옥소도 잡혀가 죽음의 위기까지 겪은 분입니다. 일제말기에 마지못해 일본을 찬성하는 글 몇 장 썼다고 해서 친일파가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구를 고자질해서 감옥에 보냈다든지 일본 형사 끄나풀을 했으면 친일파지, 쓰라고 해서 억지로 글 몇 편 썼다고 친일파가 되지 않습니다. 해방 뒤에 이승만 박사가 미당을 최초의 문교부 예술국장으로 임명한 이유는 『화사집』과 『귀촉
도』에 나오는 가슴을 뒤흔드는 시들 때문이었습니다. 전기도 한번 써보라고 맡겼습니다. 나중에 살아 있는 사람의 전기를 쓴다는 게 허영이라고 생각했는지 발간은 못하도록 했지만 미당은 이승만박사의 전기를 맡아서 다 끝냈습니다. 이승만 박사 돌아가신 후 십 년도 넘게 지나서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미당의 사당동 집으로 큰 생선을 사가지고 방문한 적도 있습니다.
미당은 6·25 때 종군했습니다. 언젠가 피난 갔던 대구의 길거리에서 본 광경입니다. 화물 자동차 위에 공산당 혐의자들을 잡아 실어 가는데 한 청년이 “선생님, 서 선생님”하고 목청 높이 부르더랍니다. 손을 흔드셨지만 얼마 안 돼 길 끝 황토밭 먼지 속에 잠겨 안보이더랍니다. 그 뒤에도 자주 “그 애가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몇 주 안 되어 정부는 대구를 북한 괴뢰들한테 빼앗기고 부산으로 후퇴했습니다. 미당은 낙동강 최후 방어 전투장에 종군 문인으로 참여했습니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와중에 지프자동차로 개울을 건너며 보니 물은 피바다가 되어 있고, 가도 가도 길 양쪽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새파란 청년들의 시체만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전투 현장을 3주쯤 목격하고 나서는 사람이 완전히 얼이 빠지고 허깨비처럼 되었다고 그때 같이 계셨던 삼촌(서정태)이 말해 주셨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과 9·28 수복 후 동네 사람 누군가가 아버님이 돌아오신다고 연락을 해줘 골목 밖 전차도로 쪽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장교들이 지프차를 길가에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앞자리에 앉아계셨습니다. “아빠”라고 불렀는데 저를 못 알아 보셨는지 저리가라는 식으로 손짓하셨습니다. 장교들이 차에서 내리는 아버님을 보조해주었습니다. 제가 손잡고 골목길로 모시고 갔습니다.
집에 오셔서는 어머님도 못 알아 보셨습니다. 전쟁 충격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으로 기억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12월 25일경 서울을 떠나 피난 갈 무렵 아버님은 완전히 병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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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정읍에서 큰고모님이 하는 상리과원에 가다가 갑자기 논 한복판에서 양쪽 손을 들고 허수아비마냥으로 서셨습니다. 지금 제 회상으로는 세상의 모든 고통과 서러움과 수난을 한 몸에안고 거기 서 계신 것 같았습니다. “아빠” 하고 부르니 꿈에서 깨어난 듯 마지못해 발을 내디디셨습니다.
미당은 평생 불교 신자였지만 청소년기에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를 애독하고 서울에서 거지들과 같이 사신 적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전주로 피난 가서는 그곳 문학청년 몇 명의 주선으로 방 하나와 쌀 한 자루를 얻어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때 모두 거지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의 친절에만 의지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님과 조그만 예수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벽보에 ‘저 무거운 짐 든 사람, 모두 내게 와라’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예배당이 꽉 차서 바깥마당에 사람들이 무리지어 서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인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의 어느 날 아버님은 갑자기 저를 잡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니?” 하고 눈물을 그렁그렁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우두커니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버님은 도스토예프스키 모양으로 예수님을 심오하게 이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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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이렇게 빈민처럼 한 달쯤 살다가 겨울 어느 날 큰고모와 외할머니가 사는 정읍으로 버스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절반쯤 갔는데 산길에 눈이 펑펑 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길에 빨치산이 나왔다 하여 경찰서에서 안전하다는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모두 내려 구멍가게 막걸리집 앞에 서서 기다렸습니다. 아버님은 혼자 우두커니 툇마루 앞에 서서 눈 내리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괜, 찮, 다……. 괜, 찮, 다……. 괜, 찮, 다…….”
울고 웃고 수구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게는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얘기, 작은 이얘기들이 오부록이 도란그리며 안끼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끼어 드는 소리……
지금도 아버지가 수북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 우두커니 서서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 어 오는 소리를 듣고 계시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가난하게 눈으로 쌓인 청산 안에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소리 없이 산골에다 말씀하시던 것 새롭게 기억합니다.
아버님은 인자하신 분이었습니다. 해방된 지 3년 뒤쯤 스님마냥으로 머리 깎은 한 분이 공덕동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아버님은 반갑게 맞이하고 저녁을 차려 막걸리도 한잔 같이 하셨습니다. 우리 집은 겨우 하루하루 살아가는 형편이었는데 그 손님이 돈을 꾸어 달라 하자 아버님은 있는 돈을 다 긁어 빌려주셨습니다. 백만 원이 넘었던 것 같습니다. 그분이 가고 나서 아주 실망하신 어머님이 “저 분이 만주에서 지독하게 추운 겨울날 아버지 빚 안 갚았다고 와서 오바 벗겨간 사람 아니냐. 저런 사람 돈 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셨습니다.
어머님한테 듣기로는 그분이 나중에 장작을 배달해 주기로 하고 빌려줬다고 합니다. 그는 그 뒤로 한 5년간 무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고 많았습니다. 자신은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가난한 친척, 제자들을 모두 데려다 먹이고 학교 보내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한 번은 스님마냥으로 회색 한복 입은, 코도 뭉그러지고 눈썹도 없는 한 분이 문 밖에서 계셨습니다. 동냥하러 온 줄 알고 물었더니 선생님 뵈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소록도에 사는 문둥이 시인이었습니다. 아버님은 그분을 선선하게 맞으시고 저녁까지 대접해서 보내셨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환영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문학청년들이 매일 줄줄이 들락날락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시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신들린 사람처럼 하셨습니다. 미당 제자들을 전부 다 합하면 몇 천 명도 넘습니다. 대부분 「국화 옆에서」는 물론이고 미당의 시 몇 십 편을 외울 수 있었습니다. 승려 출신,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교수 등 여러 분야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6·25 종군 외상으로 평생 큰 상처를 받으신 분입니다. 계급도 훈장도 못 받으셨지만 정신적으로 평생 상이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라면 무조건 배타하셨습니다. 사촌동생 하나가 KBS 기자와 결혼했는데 괜히 좌익으로 몰려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몇 번을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사정했는데 완고히 거절하셨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도 공산당이 개입되었다고 정부 사람들이 한 선전을 순진하게 정말로 믿고 정부 편을 들다가 전라도 분들한테 미움을 사셨습니다. 사당동 집에 밤낮으로 사람들이 지나가며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해서 나가시지도 못하고 고립되어 산 적이 있습니다. 하버드대학 교수이고 미당 시 번역자인 데이비드 맥캔 씨가 서울에 와 방문했을 때 집 앞에서 한 30분을 기다렸는데도 문을 안 열어줘 그냥 돌아간 일도 있다고 합니다.
오해받고 배척당해서 제가 사는 미국 남부의 랄리에 피난 오셔서 한참을 지낸 적도 있습니다.
1998년에 귀국하셨는데 2년 후인 2000년 10월 10일에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그때 건강이 아주 좋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일 때문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고 안사람이 남아 아버님을 간호했습니다. 60년을 같이 살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두 달 만에 아버님도 돌아가셨습니다.
1981년 하버드대 데이비드 맥캔 교수의 번역으로 미당 시 58편이 미국 최고로 인정된 계간문학비평 《Quarterly Review of Literature》(여름호)의 50주년 기념호에 실렸습니다. 1996년에는 세계 최대 시집 『The Vintage Book of Contemporary World Poetry』에 미당 시 7편이 뽑혔습니다.노톤 세계명작 시집에도 미당 시 4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989년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미당선집을 출판했습니다. 미당의 시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외에 여러 나라의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미당 시 중에 특히 아름다운 시는 귀한 고려청자처럼 운치 있는 「영산홍」입니다. 두보나 이백 같은 대가들도 이 의견에 아마 찬성할 것입니다. 저승에서 살아난 오르페우스의 시처럼 가슴을 울리는 시는 아마 「신록」, 「학」, 「귀촉도」, 「풀리는 한강가에서」일 것입니다. 일정, 해방, 6·25를 살아나와 발표된 시들 중에 한민족의 고난과 서러움과 희열을 제일 아름답게 정화시킨 최고의 작품은 미당의 것입니다. 이 시대의 혼돈과 절망과 좌절이 만든 성격적 결점을 물어 미당을 헐뜯는 그런 세상에서 예술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악성 모차르트는 ‘나는 속물일지 모르지만 내 작품은 전혀 속물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은 이 혼란한 시대에 맞서 살면서 민족의 기쁨과 서러움을 아름답고 가슴 울리는 시로 만들고 가셨습니다. 6·25 전쟁 뒤에 전쟁이 만든 무더기 과부들을 위해 쓰신 시가 생각납니다.
황토언덕, 꽃상여, 떼과부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 번 더 바라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
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6·25에서 살아난 분들 가운데 이 시를 읽고 무감한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