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무장해제의 기억들
글 이영광 ㅣ 시인, 1965년생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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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고향을 떠나 꽤 먼 소도시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없는 것이 너무 많았고 특히나 어른들 손길이 가까이에 없었다. 가난과 외로움, 이른 방목이 아마도 시 쓰기의 길로 날 이끌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일기장에 시 비슷한 걸 심심하면 적어놓곤 했는데 유치하기 짝이 없으나 지금도 가끔씩 꺼내 읽어 본다.
평생 시를 쓰며 살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고교 이학년 때의 일이다. 신흠의 시조를 배우던 중이었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샤
닐러 다 못 닐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양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이 석 줄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이건 바로 내 얘기가 아닌가. 시름은 곧 인생애환이고 노래란 시일 텐데 시를 지어서 시름을 풀 수 있다면 이건 한번 해 볼 만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학교 공부에 싫증이 날 때면 빌려 보던 책 가운데 하나였던 『당시선』. 그 중 두보의 「강상치수여해세요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이란 시의 두 줄이 또 눈에 확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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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성벽탐가구(爲人性僻耽佳句)
어불경인사불휴(語不驚人死不休)
“내 사람됨이 편벽하여 좋은 글귀 탐내기를, 시를 지어 사람을 놀래지 못하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 이미 장년에 이르러 세계 랭킹을 다툴 만했던 대시인의 다짐은 지금 봐도 으스스한 데가 있다. 시를 지어서 사람을 놀래주고 싶다는 마음보다 더 시인의 창작열을 잘 요약 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나는 이 무렵에 나도 몰래, 시 쓰기란 인생 시름을 경이의 언어를 통해 푸는 일이라고 믿어버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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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병을 누르고 억지 공부를 해서 대학엘 갔다. 하지만 시름은 마냥 깊어지고 경이의 순간은 찾아오지 않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학교는 어지럽고 사회는 더 어지러웠던 시절이었다. 수업을 작파하고 학교 앞 술집을 전전하면서 아, 인생 시름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글쟁이에겐 글이 안 돼서 생기는 시름이란 게 따로 있었구나…하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때 민음사에서 나온 고은 시선집 『부활』을 처음 만났다. 뭐랄까, 작은 시름이 큰 시름을 만났다고나 할까. 이 책에 깃든 병적일 정도로 예민한 감수성, 죽음에 대한 성찰과 도저한 허무주의에 빨려 들어가 행복한 자맥질을 하던 기억이 난다. 가령 「사치」의 한 줄 “누님께서 더욱 아름다웠기 때문에 가을이 왔습니다.” 같은 문장은 아예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다녔다. 시도 때도 없이 버스를 타고 망우리 공동묘지로 가서 이슬비 뿌리는 무덤들 사이를 배회하며 「묘지송」을 읽곤했다. 이 시집의 허무주의가 어딘가 나의 막힌 경혈을 뚫어주었던 것 같다. 나중에 석사논문을 준비해야 했을 때도, 가장 열심히 읽었던 시인을 다루자는 마음으로 고은 시를 선택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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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의 또 다른 계기로 미당 시와의 만남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천 년 겨울 그가 타계한 후에 벌어진 갑론을박을 보다가 먼지에 덮인 미당 시전집을 다시 꺼내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에 대한 가장 격한 비판이 고은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를 더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분들은 사제지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그때 미당의 첫 시집 『화사』 소재 스물네 편의 작품들 중 거의 한 편도 제대로 이해하질 못해 크게 당황했었다. 좋은데 왜 이해가 안 될까. 이 의문 때문에 그 후 한 오 년간 미당의 시를 눈알이 빠지게 읽고 또 그걸로 학위논문까지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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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알려진 시편들, 이를테면 「자화상」, 「귀촉도」, 「국화 옆에서」, 「무등을 보며」 같은 시 들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예컨대 「서풍부」나 「도화도화」, 「문」, 「행진곡」, 「밤이 깊으면」 같은 어둡고 무서운 작품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과 경이를 던져주었다. 그것은 존재 내면의 어두운 기억, 비합리적 충동, 자살 직전의 절망을 담고 그의 시의 문면을 괴이하게 물들이 고 있었다. 미당은 타협이라곤 모르는 사람처럼 자기 내면의 어두운 환영들과 싸웠고, 제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모든 것을 포기한 불굴의 의지로 시를 썼다. 내가 그의 시력에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비타협적 정직성이다. 하지만 무의식의 적들과 싸우던 그 체험이 어찌하여 현실의 모순과 맞서는 힘이 될 수 없었을까. 내게는 우리 시사에 다시 찾기 어려울 시인에 대한 존경과 그의 혼미한 삶에 대한 불만이 동숙한다. 그래서 오늘에 가위 눌리고 내일이 안 보이는 시절을 살면서 나는 나의 시와 삶을 미당이라는 거울에 거꾸로 비추어보곤 한다. 이처럼 미당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반면교사가 되었다.
세상에는 늘 매력적인 인간들이 있고 시의 세계에는 또 늘 매력적인 목소리들이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시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시의 이상한 목소리에 홀려 다닌 것 같을 때가 많다. 좋은 글은 읽는 정신을 무장해제 시킨다. 내가 만났던 이상하고 힘센 목소리들은 나의 작업을 더럭 멈추게 하고, 괴로운 열광에 시달리게 하고, 그리고는 또 조금씩 낯선 길을 걸을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길지 않은 나의 시력도 어느덧 자발적인 무장해제의 기억들로 발 디딜 틈을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