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시의 메아리를 걷다

현재 진행형의 작가 최인석 “사람 이상의 가치는 없다”

일생의 근심을 끌어올리는 시간

아는 진실과 모르는 진실

황순원 탄생 100주년 기념 「소나기」 이어쓰기 가을하다 사람의 별 다시 소나기 지워지지 않는 그 황톳물 헤살

투명 언론인의 정체

바로 당신이 아Q다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우연’과 ‘무심함’을 담는 기억의 방부제

여승

소설가, 평론가, 아동문학가, 편집자 김이구

미호 강변에 꽃피운 서원교육에 관한 보고서

바다와 디아스포라의 도시, 부산 광복로

아버지의 방,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별을 가슴에 품고 평생 연필로 시를 쓰다 괜찮다 괜찮다! 가난한 청산도, 고난도, 절망도

가장 문학적인 인물, 여성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숨은 집 비평과 독서

“격동기, 단절과 극복의 언어”를 남긴 8명의 문인 재조명

활력 사라진 문단, 해외거장 작품과 외국 대중소설이 메워

‘돈’에 대한 내숭에 던진 돌직구

살아가야 할 자와 죽어가는 자 사이의그 아득한 거리

방물장수와 보부상을 몰아낸 신문·잡지의 광고

《현대문학》 창간 전후

무장해제의 기억들

비를 맞는 개구리 눈빛

세기적 추녀의 연애담에 오버랩된 30년전 한국사회

시대의 갈등과 비극의 붉은 얼룩을 옮기다

왕비와 기사의 애절한 궁정식 사랑

NEW BOOKS

재단소식

글밭단상

숨은 집

글 김재영 ㅣ 소설가, 1976년생
소설 『코끼리』『폭식』 등

누구에게나 그리운 시절이 있듯, 그리운 공간이 있기 마련이다. 내 마음 속에 남아있는 그리운 공간은 지금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다. 그렇다고 허물어져 없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공간은 지금 숨어 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 집으로 곧장 연결되는 신작로 였고, 또 하나는 할머니 집에 들렀다가 에돌아가는 옛길이었다. 나는 언제나 망설임 끝에 하나의 길을 정해서 걷곤 했다. 옛길에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도, 매캐한 매연과 뿌연 먼지도 없어 좋았다. 한적한 길섶에는 철철이 야생화가 피었고, 개구리나 여치 따위가튀어나와 심심치 않았다. 할머니 집은 학교에서 가까워 소나기나 찬바람을 피하기에도 좋았다. 이래저래 나는할머니 집에 자주 들렀다. 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도,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숙부와 숙모의 다정함도 좋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 집의 오래된 냄새가 좋았다.

할머니 집은 아주 정갈하고 잘생긴 한옥이었다. 여름날 냉수 한 잔을 마시고 대청마루에 덜렁 누우면, 선이 반듯하고 단정한 서까래가 마음마저 시원하게 했다. 등과 손바닥으로는 오래된 나무의 미세한 결이 느껴졌다.기둥은 아름드리나무처럼 굵고 검었다. 수백 년 된 목재라서 검은 빛에 가깝다는 걸 당시에는 잘 몰랐다. 기둥에 매달려 놀 때면 다른 집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서울로 가 살게 되었고 할머니는 방학이 되어야 겨우 찾아 뵐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해던가. 방학이 되어 가보니, 할머니 집이 이상해져 있었다. 부엌을 입실로 개조하면서, 집의 여기저기에 값싼 목재들이 덧대어져 있었다. 뭔가 낯설었다. 그러더니 이듬해에는 대청마루마저 문을 해 달고, 보일러를 깔아 본래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것이 유행이라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집을 개조해 편하게 산다고 했다. 한옥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숙부와 숙모의 불편함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못내 아쉽고 속상했다.

그런데 마을에는 그만큼 오래된 집이 한 채 더 있었다. 그 집의 규모는 훨씬 컸다. 그 집 주인은 당시의 유행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큰 집을 개조할 엄두를 내지 못해서인지 그대로 두었다. 세월이 흘러 유행은 금세 바뀌었고, 숙부네 집은 어딘가 촌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고치지 않은 채 남겨진 이웃의 한옥은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고 있었다. 그 건물은 조선중기에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문화재로 인정받게 되었다. 세월을 견뎌낸 아름다움이 오래된 그 집을 더욱 빛나게 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과학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사람들의 취향은 변덕스러워서 유행은 빠르게 바뀐다. 서사예술에서도 그 변화는 거세어,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소설의 독자는 현격하게 줄고 영화나 게임 서사 장르가 압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에 대한 반영인지 소설보다는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학위를 받는 신진연구자들이 교수로 임용되고 있다. 소설은 시장에서도, 학계에서도 설 자리가 좁아만 가는 서글픈 현실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디지털이란 그릇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아날로그라는 사실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제기되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당대를 지배하는 유행장르는 대체로 대중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급급하다. 머레이는 디지털 시대 콘텐츠의 스토리텔링은 승자를 추구하는 게임의 특성처럼 운명적인 비극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본격소설은 삶에 내재한 필연성을 비추어 보는 데에서 힘을 발휘한다. 인간의 사고를 정교하게 진전시키는 언어예술 장르는 문제적 장르로서 그 고유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고려청자 비법이나 고대의 신비한 건축술처럼 문화적 격변기에 사라져 버린 찬란한 무형문화는 나중에 복원하려고 애써 본들 쉽지 않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에서 무가치하다며 불태워버린, 스토리 위주의 로망스가 오늘날 다시 활개를 치고 있다. 그에 비해 스토리를 정교한 플롯으로 재배열해 ‘담화’를 이끌어내는 소설은 지나칠 만큼 위축되어 있다.

유행에 휩쓸려 숨어버린 내 할머니의 오래된 한옥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우리 시대 소설의 운명이 염려되어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