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란 누구보다도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눈빛을 지닌 자다. 좋은 시인이란 그 눈빛이 형형하게 살아 있는 자이며, 그 눈빛으로 읽어낸 삶의 고통스러운 본질적 과정을 섬세하게 밝혀내는 자이다. 대학생으로 응모 자격이 제한된 대산대학문학상은 그 형형한 ‘눈빛’을 지닌 자를 찾는 일이며, 대학생이라면 이미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이 이루는 삶의 기쁨과 눈물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투고된 450여명의 시들을 읽으며 선자들이 찾고 싶어하는 그러한 ‘눈빛’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기성의 틀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안주하고 있어 마치 시의 기성복 가게 앞을 얼쩡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는 점이 염려되었다. 필연성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행과 연 구분조차 무시된, 산문임이 분명한 글들이 왜 시의 얼굴로 화려하게 분장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투고자 대부분이 한두 편은 꼭 그러한 ‘시의 얼굴을 한 산문’을 적당히 안배해 놓았다는 점은 분명히 심사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칼국수를 뚝배기에 담아 먹지 않듯이, 어떤 요리를 내어놓느냐에 따라서 그 요리를 담는 그릇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적당한 행 갈이와 연 구분이라는 형식만으로 시는 형성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덕민의 시는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을 정도로 선자들을 기쁘게 했다. 그의 시도 이미 기성의 형식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담은 내용은 오로지 그의 사유의 깊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서 선자들은 「괄호론」에 주목했다. 괄호를 ‘묶음의 형식이지만’ 또한 ‘비어 있음의 형식’으로 인식한 그 인식의 깊이도 놀라웠지만, 괄호를 어머니라는 여자의 삶에 비유한 것 또한 무리가 없고 개성적이었다. 앞으로 우리 시단을 이끌어나갈 재목임이 분명하다는 점을 심사위원 모두 의심치 않았다. 다만 그의 철학적 사유가 보다 깊어지면서 구체적 삶의 감동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김미선의 시는 기성에 병들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샀다. 김미선은 분명 기성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생경하고 유치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점이 건강한 자기 목소리를 지니게 했다고 여겨졌다. 김미선의 작품 중 선자들은 마네의 그림을 언어화시킨 「올랭피아를 위한 찬가」에 매혹되었다. 회화가 시화화된 한 진경을 호쾌하게 보여주었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김미선의 경우는 보다 자중하고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앞으로의 가능성을 닫지 말고 열어주자는 데에 의견이 모여졌다는 점 또한 잊지 말기를 바란다. 최종에 올라온 작품은 당선작 2편뿐이었다는 점을 밝힌다. 그만큼 격차가 컸다는 뜻이다.
신인에게 가장 기대하는 것은 신선함이다. 신인이라면 어지간히 잘 짜여진 작품이더라도 기성 문인의 작품을 답습한 느낌이 나거나 틀에 박힌 것이라면 점수를 깎일 수밖에 없다.
예심 절차없이 곧바로 심사에 임해 일차로 추린 작품은 15편 정도였고 거기서 다시 절반 정도의 작품이 논의 대상이 되었다. 「나철수 씨 생애 최초」,「아무 것도 아무 말도」,「까마귀의 친구들」,「공동」,「장미」,「뱀꼬리왕쥐」는 각각 일독의 가치는 있지만 아직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근래의 투고작들에는 문장미학이나 플롯에 대한 고려는 거의 보이지 않고 만화에서 본 듯한 대사, 기분에 따르는 문장을 툭툭 던지고 빠지면서 자신이 흥미있는 부분은 열심히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하기싫은 숙제를 해치우듯 대충 서술하는 게 유행하는 것 같다는 감상이 더해졌다. 마지막까지 집중적인 논의 대상이 된 작품은「바늘구멍 사진기, 슈뢰딩거의 고양이」와「팔월의 첫째주」였다.
「바늘구멍 사진기,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근래 문예공모의 전형 가운데 하나가 된 이른바 ‘전문지식과 이야기의 결합’이라는 형식이다. 문제는 전형이나 형식이 아니라 고양이라는 상징과 메타포가 무기력한 주인공의 일상과 현재에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겉돌고 있다’였다. 소화되기 어려운 생경한 재료를 억지로 소화하려다 우연이나 시간에 운명을 맡기고 마는 형국이 안타까웠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성의에 기대를 걸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팔월의 첫째주」는 풋풋하다. 대학생 문예공모라고 해도 어떻든 명백한 신인 등용문에 늘어선 여러 작품들 사이에서도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순진해’ 보인다. 이 작품의 최대 강점은 발상의 신선함이다. 사람이 물이 되어 버린다는 놀라운 알레고리는 독특하고 투명한 감수성을 바퀴로 달고 제 힘으로 소설을 몰고간다. 차분하고 안정된 서술도 다른 작품에 비해 두드러진다. 결론에서 안이함이 드러나지 않느냐, 현실적 공명이 부족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었지만 ‘쉽게 볼 수 없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정직함과 신선함이라는 큰 미덕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게 했다.
신인은 신선함으로 호소력을 갖지만 일단 등용문을 통과하고 나면 제도화된 가혹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심판관인 독자는 언제나 싱싱하면서도 잘 익은,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고른다. 한층 정진해 주기 바란다.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분 심사에서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죽도록 죽도록」과 「마지막 녹음」2편이었다.
「죽도록죽도록」은 ‘팽형’이란 아주 인간적이고 연극적인 조선식 행형을 오늘의 청년들이 겪는 사회적 소외와 연결시키는 발상이 놀라웠다. 무대 공간 또한 버려진 민속촌이고, 그 버려진 민속촌에 TV와 VTR까지 갖추었으니 가히 21세기 동시대의 바람직한 연극적 설정은 다 갖추어진 셈이다. 그리고 세 남자의 냉소적인 일상사가 전개되는데, 놀라운 발상과 치밀한 구성력에 비해 극을 이끌어 가는 ‘말의 힘’은 평이했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결여되어 있었고, 사회적 소외를 온몸으로 껴안고 자신의 존재와 대면하려는 의식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희곡 또한 자신의 존재에서 끌어 올리는 언어가 되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게 되면 발상과 소재의 화려함에 비해 관객에게 내밀한 느낌으로 가 닿는 감동과 삶에 대한 성찰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죽도록죽도록」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고, 오늘의 젊은 대학로연극이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상태에 빠지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점에서「죽도록죽도록」은 대산대학문학상 당선작을 뽑는 이유 정도가 아니라 오늘의 연극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수작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마지막 녹음」은 지하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소박하게 전개시켜나간 작품이다. 그러나 그 소박하고 단순한 구성에 비해 극을 이끌어가는 ‘말의 힘’은 묘하게 가속도를 더하면서 단숨에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매력을 주는 작품이다. 그 매력에 이끌려 다시 읽어보면,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과 세상을 조용히 껴안으려는 작가의 심성이 아름답게 배어나온다. 그래서 한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글쓰기 능력이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죽도록죽도록」이 별로 크지 않은 이야기를 크고 복잡하게 구성한 것에 비해,「마지막 녹음」은 작은 이야기에 정면 승부를 건 글쓰기의 태도였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이야기가 과연 대학로의 연극으로 공연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함량 미달이 아닐까 하는 심사위원의 회의적 시선 또한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이 작고 따뜻한 극이 오히려 요란한 21세기에 대한 단단한 저항, 혹은 조용한 혁명의 불씨가 되기를 바라면서 당선작으로 놓는다. 자신의 작품이 너무 소박하지 않을까 지레 짐작하여「마지막 녹음」이란 그럴듯한 관념을 제목으로 정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차라리 솔직하고 편하게「울고 있는 저 여자」정도의 제목으로 바꾸던지, 자신이 처음 정한 제목이 있다면 그것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곁들인다.
곤혹스럽게도, 38편의 응모작 중에서 당선작을 낼 수 없음에 심사위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상이 ‘시나리오 공모전’이 아니라 ‘대학문학상’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주지하다시피, 영화산업의 메커니즘에서 시나리오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텍스트의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완성된 영화의 밑그림을 담은 제안서이거나, 작업에 참여하는 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 역할이 규정된다. 독립된 글쓰기의 장르가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공정에서 생산된 반(半)제품으로 취급받는 것이 영화산업 ‘현장’에서의 시나리오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대학’과 ‘문학’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 상에서, 시나리오는 ‘현장’의 시나리오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대학’이 함축하는 새로운 감수성, 실험 정신, 상업주의-흔히 “영화화 가능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로부터의 자유로움, 그리고 ‘문학’이 허용하면서 동시에 요구하는 모국어의 조탁과 형상화 능력,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완성품으로서 평가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올해의 응모작들은 아쉽게도 그러한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였다. 당선작을 내지 못한 채,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고등어」, 「동거동락」, 「초록문」이렇게 세 편이다. 「고등어」는 엽기 발랄한 상상력으로 일단 눈에 띄지만, 장편 시나리오라는 형식에 걸맞은 서사성의 결여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였다. 「동거동락」은 까다로운 소재를 매끄러운 이야기로 다듬어낸 솜씨가 돋보이는 반면, 바로 그 매끄러움이 오히려 공허한 울림을 남기고 말았다. 「초록문」의 독특한 화법과 개성 있는 인물의 창조는 산만한 구성 속에 묻혀 빛을 잃었다. 올해의 흉작을 딛고, 다음 해에는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과감하고, 좀 더 패기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대학생의 문학작품들을 따로 모아 놓고 경중을 가리는 것은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성의 문학에 비추어 어떤 변별성이 그곳에 있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 변별성은 무엇보다도 제도에 대한 도전이고 상식에 대한 반란이며 형식의 전복이 아닐 수 없다. 대학생은 아직 사회적 생산의 회로에 갇히지 않았으며 따라서 모든 것을 실험할 수 있다고 가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숙한 채로, 또한 미숙함에 힘입어, 대학생 문학은 그러한 근본적인 전복과 쇄신의 가능성을 밀고 나가야 한다. 세상의 모든 문학을 몽땅 휴지로 만들겠다는 자세로.
마지막까지 심사의 테이블 위를 떠돈 글은 다섯 편이다. 이원의 시를 다룬 「하이퍼 리얼리티, 현실과 가상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실재론」, 윤후명의 소설을 다룬 「종극 목적을 가지는 원환성; ‘나’를 ‘나’에게 끌어가기」, 김영하의 「아랑은 왜」를 따진 「메타픽션과 이야기의 유전자 지도」, 황동규의 시를 해설한 「텍스트의 산점들이 보여준 황홀경을 찾아서」, 그리고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파헤친 「존재와 생성 사이」가 그것들이다. 이 중 「하이퍼 리얼리티…」는 시 분석을 디지털 문명에 대한 성찰로 이끌고 간 글이다. 「종극 목적…」과 「텍스트의 산점들이…」는 대상 텍스트의 한 가지 주제를 날카롭게 잡아채서 그것의 내적 변주를 섬세하게 짚어 간 글들이다. 「메타 픽션…」은 메타 픽션 자체를 소설의 이야기거리로 삼은 김영하의 「아랑은 왜」의 존재론적 의의?방식?미학을 밝힌 글이다. 「존재와 생성 사이」는 완벽히 주관적인 글이다. 『죽음의 한 연구』를 캔버스로, 그의 철학적 독서 체험을 물감으로 삼아서, 존재와 생성 사이에 패어있는 어두컴컴한 유곡(幽谷)을 갈 데까지 찾아가 그린 글이다.
「하이퍼 리얼리티…」는 부정확한 문장들로 글읽기의 고통을 겪게 해준 탓에 먼저 제외되었다. 「종국 목적…」은 텍스트 분석이 아직 서툴다는 점과 결말부의 작위성이 눈에 거슬렸다. 내공이 필요하다. 「메타 픽션…」은 아주 주밀하게 작성된 보고서이지만 타인의 이론에 너무 기댄 나머지 일반론으로 기우는 바람에 「아랑은 왜」만이, 혹은 김영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심사 시간을 무한정 지연시킨 것은 나머지 두 글에 대한 두 심사자의 판단이 실오리만큼 어긋난 때문이었다. 「텍스트의 산점들이…」는 회화를 통해서 문학을 바라본 독특한 프리즘이 이채로웠고 문체도 아름답고 해석이 썩 그럴 듯하였다. 단 ‘일점’에 저항하는 ‘산점’이라는 한 가지 답변을 시의 여러 면모에 다채롭게 적용하고 있어서 사유의 진전을 읽을 수는 없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 글이 병렬적이라면, 「존재와 생성 사이」는 직렬적인 글로서 하나의 물음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생각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글이지만, 사유의 주관성이 강한 나머지 대상 작품을 이해하기보다는 포박한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심사자들은 오래 ‘갈등’하다가 텍스트에 대한 배려가 좀 더 보이는 글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합의하였다. 당선자나 낙선자나 오늘의 문학담론을 과녁이 아닌 시위로 삼아 문학의 창천 속으로 뛰어들겠다는 각오로 정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