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심 단계에서 심사위원들이 공통으로 느낀 소회를 먼저 전한다. ‘시의 언어’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 생략된 채 무책임하게 남발되는 ‘산문의 언어’에 대해 우리는 조심스러운 염려를 표하고자 한다. 최근 몇 년간 워낙 시의 산문화 경향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올해 응모작들은 특히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산문적 진술이 선택되었다기보다 응집된 시어를 향한 고투를 포기한 안이한 수준의 산문적 언어들이 남발되는 경향이 심했다. 당연히 언어의 긴장은 떨어지고 게다가 비속어와 비문들이 남발되는 경향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는 감정의 일방 배출구가 아님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언어를 함부로 배설하려는 경향은 시 창작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그가 쓰고자 하는 언어와 섬세하게 대결하고 그 언어로부터 사용 승인을 얻어야 하는 자이다. 쓰는 자가 자기 멋대로 언어를 지배하고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언어를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언어로부터의 자재자유함을 획득할 수도 있음을 우리 문청들은 모두 유념했으면 좋겠다. 시는 문학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엄격하게 ‘언어’ 자체에 대한 집중을 요하는 장르이고, 시인은 ‘말의 중압감’을 평생 고민하며 평생을 걸고 이 중압감과 대결해나가야 하는 존재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자각과 대결의식이 있어야 이 부박한 반(反)문학적 속도전의 시대에 여전히 시가 태생적 이단으로서의 문학적 반(反)속도성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응모작 전체를 거론했을 때 위와 같은 심각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역시 옥석들이 있었다. 예심 통과작 중 심사위원 2명 이상에게 중복 추천된 응모자를 중심으로 모두 5분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이 되었다. ‘대산대학문학상’은 완성도 높은 단 한편의 작품만 뽑는 신춘문예가 아니다. 도래할 시인의 삶을 견인할 수 있는 문학적 동력을 검증하는 의미가 큰 상이므로 응모작 간의 편차가 심해서는 곤란하다. 하여, 좋은 시편들을 포함하고 있으나 시편 간의 수준 차가 심한 「입동」 외, 「21세기 라흐마니노프 정원사」 외, 「당신은 나를 좀 더 알 필요가 있다」 외가 먼저 제외되었다.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은 것은 「잎사귀가 건드린 하루」 외와 「꽃잎이 뜨는 방」 외였다. 두 응모자 모두 치열한 습작의 흔적이 보이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최후까지 경합했다. 「잎사귀가 건드린 하루」 외는 신선하고 유려한 감각적 표현들이 돋보이며 각 편의 완성도도 높았다. 하지만 단정하고 잘 만져진 소품의 느낌을 벗어나지 못해서 아쉬웠다. 신선하고 안정된 표현 능력 위에 세계인식의 확장 노력이 결부된다면 훨씬 좋은 시편들로 조만간 어느 지면에서건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진을 빌며 후일을 기대하기로 하였다.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고자 한 여자와 그녀의 시간을 붙들고자 하는 남자의 비극적 사연을 수몰예정지구의 폐옥 풍경을 통해 보여주는 「꽃잎이 뜨는 방」은 곧 수몰될 병든 육체성을 비정한 사회 속에 아슬하게 위치시키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집 없이 떠돌며 구걸하는 탈북자 아이들을 일컫는 꽃제비를 피부호흡법을 터득해야 살 수 있는 양서류로 교차 직조하는 「그들의 피부호흡법」도 개인과 사회적 비극 사이에 아슬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 채 발현되는 상상력이 돋보인다. 무겁고 비극적인 사건을 보여주면서도 서정적 언어의 질감을 유지하는 공력과, 감각적인 표현에만 경도되지 않고 문학적 사유를 전진시키고자 노력하는 자세도 높이 평가했다. 단, 불필요한 과포화 상태의 호흡을 정리하여 좀 더 긴장감 있고 밀도 있는 언어 운용을 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발화의 반복도 숙고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꽃잎이 뜨는 방」 만 예로 들어보더라도 ‘강물의 발육’, ‘강물의 이빨’, ‘호흡의 선율’ 등 정제되지 못한 표현들이 눈에 많이 띈다. 좀 더 정제가 필요한 시편들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문청의 시답다’는 것, 개인의 상상력과 사회적 상상력의 길항 가능성, 언어 내용과 형식에 대한 치열한 고뇌가 느껴진다는 것, 무엇보다 이후로도 시를 밀고나갈 에너지의 내공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꽃잎이 뜨는 방」 외를 당선작으로 뽑는데 우리는 기꺼이 합의했다. 문청들에게 주는 대학문학상은 잘 만들어진 완제품보다 ‘미래가 궁금한 시’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더욱 정진하여 개성 있는 시세계를 완성해나가길 바란다.
즐거웠다, 그러나 힘들었다. 삼 백여 편의 소설을 읽은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소회였다. 응모작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적절한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사소한 일상, 달콤한 연애사, 살이의 고단함, 등등 현실과 직접 맥이 닿아 있는 이야기들과 SF 영화나 무협지, 혹은 환타지 소설에 나옴직한 환상과 비현실의 공간이 골고루 섞여 있어 우리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짧고 경쾌한 문장, 자유로운 줄바꾸기, 환상적 공간으로의 이동, 등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박민규, 김애란, 황정은 등의 영향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絲)」, 「그림자 사냥꾼」, 「카이로로부터 일과 이분의 일센티미터」, 「당신의 등 뒤에」, 「소파」, 「딱」 외 십여편의 작품이 일단 수준급으로 평가되었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당신의 등 뒤에」, 「소파」, 「딱」 세 편이었다. 「당신의 등 뒤에」의 장점은 작가가 소설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장은 매끄럽고 묘사는 치밀하며 소재 또한 특이하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제대로 내고 있었다. 남편의 등 뒤에서 나온 얼굴, 그 여자의 얼굴이 점차 자라나고 그 욕망이 점층적으로 상승하면서 화자를 압박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를 유발했으며 그 흥미가 '등 뒤의 얼굴'이라는 알레고리에 대한 다층적 읽기를 가능하게 했다. 다만 이 작품의 문제는 '어디선가 본 듯한' 분위기, '누군가 얘기한 듯한' 주제였다.
「소파」를 앞에 두고 심사위원들은 공통적인 궁금증을 품었다. 이 작가가 대체 몇 살일까, 하는. 그만큼 「소파」에는 삶에 대한 깊이가 있었다. 어머니와 아들, 며느리가 그려나가는 정경이 자연스러운 우리 이웃의 모습이었으며 그대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도난을 의심하는 어머니를 위해 설치한 폐쇄 카메라, 그를 통해 비로소 어머니의 진실을 발견하는 아들, 소파에 난 흠집과 어머니의 상처를 연결시킨 그 솜씨는 기성작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수준의 것이었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전혀 대학생스럽지 않다는 것.
「딱」은 앞서 논의한 두 편에 비해 좀 가볍지 않은가, 딱, 이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자주 쓰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있었다. 딱, 이라는 제목에서 짐작되듯 '인생 뭐 있어, 그냥 한방이지'하는 듯한 장난기, 아버지의 부재, 도서관이란 공간의 낯익음 또한 우려된다는 견해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한 힘은 경쾌함이었다. 아버지, 나, 어머니, 친구가 그려내는 광경은 매우 일상적이지만 그 일상에는 추레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칫 들뜬 듯해 보일 염려의 소지를 작가는 '파본수집도서관'이라는 독특한 이야기로 비껴갔다. 삶이란 가볍기 그지없어서 딱, 소리하나에 바뀔 수 있을 만큼 하찮은 것이지만 딱, 이라 여겨야만 견뎌낼 수 있는, 안고 가야할 상처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너그러운 읽기를 가능하게 한 것 역시 파본을 손질하는 화자와 친구, 잘못 연결된 책장 다시 맞추기, 등의 설정이었다. 이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시선처리 방식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싶은 화자를 따라 독자 또한 무장해제 되면서 역설적으로 내면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이 장점은 고스란히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도 같은 것.
그리하여 심사위원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딱」을 당선작으로 올렸다. '대학생 작가'를 찾는 이유에 가장 부합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 이 작품에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앞으로 응모할 젊은 작가들이 유의할 사항이다. 더불어 유의할 사항이 있으니 작품이 언급되지 않았다 해서 풀죽을 일이 아니라는 것. 쓰기만 하면, 읽어줄 사람은 무한하다는 것. 기회는 항상 열려있다는 것........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정진을 바란다.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은 신선한 발상과 기대되는 연극성 「달로 가요」
2009년 희곡 부문의 응모작에 나타난 현상은 (실질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부재하는 아비’로 인한 희비극적 서사가 많다는 점 외에도, 잘 쓴 ‘2인극’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유독 2인극이 많이 투고된 데는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소극장연극에 익숙한 세대의 희곡에 대한 제한적인 이해 때문일까. 아니면 삶의 세부와 미시적인 데 대한 관심, 최소단위와 파편으로 존재하는 현대인의 관계 맺기의 규모 탓인가. 아니면 영상매체의 확장적인 속성을 배제하고, 집중을 선택하는 희곡의 글쓰기 기본 전략 속에서 ‘대화’ 형식을 배우기에 2인극이 적합하기 때문일까.
2인극은 극적 정보와 사건을 축적해가는 방법에서 두 사람의 대사에만 의지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높은 밀도를 요한다. 특히 과거를 다루는 데 3자의 개입과 도움이 차단된다는 면에서 보자면 보다 세련된 대사 처리가 필요하다. 여하튼 ‘극적’이라는 것의 기본을 이해하고 희곡의 구조에 대한 인식과 감각 없이는 2인극의 응축과 집중을 성취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응모작 중에는 내용과 형식간의 긴장감 있는 대결을 놓치지 않는 ‘2인극’들이 여러 편 눈에 띄었다.
손녀와 할머니 2인이 벌이는 엎치락뒤치락 자살소동을 희극적 솜씨로 엮어간 「미치지 않았어」는 나름의 풋풋한 매력을 담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소비 욕망을 패러디한 「타히티에서 브런치를」도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하는 대상의 다양한 기호들을 등장인물 2인으로 압축해 선보였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을 고민하게 한 완성도 높은 2인극으로는 중년 남녀의 극진한 사랑이야기 「다시 삽시다」가 있었다. 이 작품은 특히 군덕 내 나는 묵은 생을 풀어내는 말솜씨가 일품이었다.
「달로 가요」는 사회적 빈곤에 처한 한 청년의 독특한 사고와 행위를 다루고 있다. 녹록치 않은 현실 속 상황이지만, 발상을 비틀어 자연스레 판타지 요소를 끼워놓고 꿈의 출구마저 봉쇄된 소시민적 삶의 추락과 찬란한 몰락을 페이소스 있게 보여준다. 삶도, 꿈도 차압당한 오늘날 소위 ‘88만원 세대’의 ‘리얼 판타지’ 극이라 이름 붙일 수 있겠다. 현실을 다루되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은 신선한 발상법과 이를 구현하는 간결하고 위트 있는 대사, 여러 방향에서 무대 연출을 할 수 있는 여지 등을 높이 샀다. 감각에 사유가 더해져 대성하기를 바란다.
이번에 응모된 32편의 시나리오는 역사, 스릴러, 스포츠, 성장영화 등 장르가 매우 다채롭게 분포되어 있었다. 함량미달의 작품도 몇 편 있었지만 대체로 장편시나리오의 작법이 안정되게 펼쳐진 편이었으나 의외로 대학생다운 발칙한 상상력이나 패기가 돋보인 작품은 많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일단 「미추녀전」은 영화화를 전제로 한다면 사실 주목을 받기 힘든 작품이다. 이 작품을 시각화 하는데 있어 특수촬영 및 CG 등 예산이 많이 필요한 내용이지만 그에 비해 이 영화의 대중성과 흥행성이 담보 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와 설화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재미있는 대사톤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코믹한 영화 쪽에 재능을 더 갈고 닦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덧붙인다.
「소년기」는 처지가 다르지만 각각의 깊은 상처를 두 소년의 성장을 다룬 영화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상황설정이 진부하고 두 주인공의 심리를 심도 깊게 파고들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현실의 냉혹함에 대한 과장 없는 서술태도와 두 청춘의 우울한 초상이 시각적으로 잘 묻어나는 장점이 있다.
「사냥」은 주제처리가 돋보이는 시나리오이다. 두 주인공의 시선이 지나치게 객관적이고 심리의 심도가 깊지 않아 관객의 공감을 견인하는 힘이 좀 약했고 납치 등의 상황설정이 스릴러 영화의 전형을 답습하는 등의 약점이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성과 완결성이 돋보이고 탄탄한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소년, 소녀 차차차」는 소년원 학교에 다니는 십대 소년들이 에어로빅이라는 종목을 통해 자신들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이야기이다. 에어로빅이 터프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년들이 할 법 하지 않은 종목이라는 설정과 애초부터 목표달성이 불가능해 보이는 스포츠 도전기, 그 종목을 지도하는 지도자(여기서는 여자코치)와의 멘토 관계를 통한 감동 설정 등 뻔한 부분이 많긴 하지만 이 시나리오의 장점은 잘 읽힌다는 것이다. 구성이나 완결성 면에서 큰 흠집을 찾기가 어려운 작품이었다.
위에 언급한 네 편의 작품 중에서 나는 「소년 소녀 차차차」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일단 작가가 세상을 보는 시선의 따듯함이 묻어나는 점을 가장 큰 덕목으로 보았고 영화적 리얼리티가 잘 살아있고 소년들의 심리나 캐릭터가 과장되지 않게 잘 표현되어 있으며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절제의 미덕도 발견하였다.
이번 응모작은 총 14편, 그런데 순전한 영화평론이 2편 섞였으니, 실질로는 12편인 셈이다. 다시 한번 강조컨대 이 분야는 어디까지나 문학평론이 대상이다. 물론 문학평론이라고 해서 영화를 다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끌어 쓸 수는 있겠지만 중심은 문학이라는 점에 유의해 주기 바란다.
응모작들을 통독한 뒤 떠오른 첫 감상은 나쁘지 않았다. 문학의 생산과 유통의 현장을 응시하는 비평가적 시선이 제법 미쁘다. 그런데 서구이론에 의존해서 한국문학을 재단하는 기성 평단의 악습을 모방하는 기풍이 센 것이 역시 문제다. 요즘 한국평단은 왕년의 해외문학파 전성기, 그 서구주의 시절로 복귀한 형국인데, 그 폐습이 젊은이들까지 오염시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그 오염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글들을 예의 검토하니, 최종적으로 김중혁을 논변한 「'오타쿠적 인간들'이 사는 다섯 가지 방식」과 박민규를 다룬 「87년 체제의 문학적 증명 및 항변」, 이 2편의 글이 눈에 띠었다. '정치성의 결여'로 특징지어지는 2000년대 소설에 대한 일반적 평가를 거슬러, 오타쿠를 열쇳말로 김중혁을 분석함으로써 '다른 정치성'을 변별하려고 시도한 전자는 우선 뛰어난 논술력이 돋보인다. 대학생 답지 않은 세련된 글쓰기를 바탕으로 대상 작가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그런데 정작 비평의 생명이랄 수 있는 비판이 결여되어 있다. 작가와 비평가가 합체되어 어디까지가 작가의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비평가의 이야기인지 구분이 안된다. 인상비평의 현대적 버전으로 시종하기 일쑤인 요즘 평론의 경향에 편승하고 있는 점이 걸린다. 이에 비해 후자는 투박하기조차 하다. 그는 "6월항쟁의 의미를 거의 잊어갈 무렵이던 2003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이분법에 잘 포획되지 않는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박민규의 등장이 가지는 의의를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소수자 문제를 일관되게 추적함으로써 6월항쟁의 열매로 얻은 정치적 자유 즉 다수결시대가 실은 차별이 더욱 내면화하는 무서운 시대임을 증언하는 박민규의 소설작업은 이 점에서 87년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라는 점을 분석한 후자는 그런데 단지 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박민규문학의 추상적 낙관론을 한계로 지적하는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비평의 기본기가 그런 대로 갖춰진 글을 만난 셈이다. 두 글 가운데, 비록 문장이 덜 세련되고 논증이 덜 여물었을지라도, 비평의 몫을 제대로 포옹하려는 자세를 갖춘 후자를 당선작으로 삼는다. 축하한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공모하는 문학상이 기대하는 바는 어떤 것들일까?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내려는 열정, 유연하고 개방적인 자세……. 무엇보다 젊은 문학도에게 바라는 것은 기성의 문학 판을 꿈틀거리게 만들 생기와 활력이 아닐까. 모든 문학상이 그러하겠지만 특별히 대학문학상이라면 작가로서의 잠재적 역량을 읽어주는 일이 더욱 소중할 것이다. 단지 지금 눈앞에 놓여 있는 한 편의 동화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새로운 작가를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각 작품의 완성도뿐 아니라 작가로서의 가능성까지 읽고자 노력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번 공모에는 모두 28명이 50여 편의 작품을 보내왔다. 예년에 비해서는 다소 줄어든 숫자이다. 혹여 동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마저도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심 불안한 마음이 적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을 더욱 가중시켰던 것은 응모된 작품들이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기보다는 대개 고만고만한 일상을 엇비슷한 방식으로 스케치하는 편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자신감의 부족은 자기만의 색깔을 만들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새로움을 개척하려는 패기나 의욕마저도 갉아 먹는 것은 아닐까. 물론 제재는 비슷할지라도 나름의 비판적 문제의식으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들도 문제를 제시하는 수준에 머무를 뿐 이를 끈기 있게 붙들어 이야기로 풀어내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험과 관찰의 부족에서 오는 도식적인 구도, 숙고되지 않은 거친 표현, 플롯에 대한 의식 부족 등은 응모작들을 읽는 동안 내내 아쉽게 느꼈던 점이다.
최종심에 추천된 작품은 [이강희는 독재자], [오영심 여사는 칠구다, 아니 친구다], [깽깽이 아줌마], [울렁울렁 납작 가슴] 등 모두 4편이다. [이강희는 독재자]는 왕따, 때리기 놀이, 절교 편지 등 친구들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문제를 포착하면서 가해자의 왜소한 인간적 면모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돋보였다. 그러나 사건들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해결의 과정이 급작스러워서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기 어려워 보였다. [오영심 여사는 칠구다, 아니 친구다]는 유머러스한 할머니 캐릭터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는 손녀와 드라마 탤런트를 좋아하는 할머니 간의 경쾌한 소통 과정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준다. 이는 최근 유행하는 시트콤적 상상력을 넘어설 만한 작가의 새로운 해석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닐까. [깽깽이 아줌마]는 [울렁울렁 납작 가슴]과 함께 당선작 선정 여부를 놓고 최종까지 고심하게 만들었던 작품이다. [깽깽이 아줌마]는 그악스럽게 자신의 것을 챙기는 장애인 아줌마의 행태와 그 이면의 모습을 ‘나’라는 아동 화자의 시점에서 살핀 동화이다. 그간 우리 동화가 장애인이라면 무조건 사회적 약자이며 선의의 피해자로만 그림으로써 도리어 인간적인 모습을 은폐해왔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피해의식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깽깽이 아줌마]의 악착스런 처세는 나름 의미 있는 관찰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깽깽이 아줌마와 다른 주변 인물들이 각각 개성적인 성격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깽깽이 아줌마와 ‘나’가 작품 중간에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다가 결말에 이르러서 돌연 화해를 이루는 점이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울렁울렁 납작 가슴]은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문장의 안정감이 돋보였던 작품이었다. 특히 구어체가 살아 있어 생동감이 느껴진다는 점은 이 작품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의 단선적 구도나 주인공의 반응이 제한되어 있어 서사 전개가 역동적이지 못하다는 점, 요즘 아이들의 현실에 대한 취재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응모작에서 아쉬웠던 부분들, 예컨대 거칠고 날선 표현들을 정제하지 않고 사용한다거나 플롯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넘어서고 있는 작품으로 판단되었다. 서사적 갈등을 만들어 내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성실하게 고민했다는 점이 미덥게 느껴졌다. 한 편의 동화가 아니라, 한 사람의 작가적 가능성을 바라보면서 [울렁울렁 납작 가슴]을 당선작으로 추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