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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_ 황혼의 사남매, 60년 사부곡(思父曲)

글 | 설희관_설정식 시인의 3남, 시인. 1947년생
시집 『햇살무리』 등

편집자 주 ㅣ 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오는 5월 3일 <2012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개최한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작가는 김용호, 백석, 설정식, 이호우, 정소파 등이다. 이 가운데 설정식 시인 자제분의 기고를 통해 아버지로서의 작가의 모습을 소개한다.
 
- 나의 아버지 설정식
 
설정식_시인, 소설가, 영문학자. 1912~1953년
시집 『종(鍾)』 『포도』 『제신의 분노』, 소설 『청춘』 『프란씨쓰 두셋』, 역서 『햄릿』 등
 
 
▲설희관 
아버지 설정식(薛貞植)은 시인이자 소설가, 영문학자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한 오촌(梧村) 설태희(薛泰熙, 1875∼1940)의 4남 1녀 중 3남으로 1912년 함경남도 단천(端川)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마흔한 살의 연세에 북한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임진년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선친을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저의 조부는 1930년대 광산업을 하신 장남 원식(元植, 1896~1942), 언론인으로 필명을 날리신 차남 의식(義植, 1901~1954), 사업가이셨던 4남 도식(道植, 1915~1975)과 필자에게 고모님이 되시는 외딸 정순(貞筍)을 두셨습니다. 저희 집안은 신라 설총(薛聰)의 후예로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조선 세조 때 단천으로 이주했습니다. 조부는 열한 살에 함경도 지방을 휩쓴 전염병으로 양친을 모두 잃고 외가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일본 메이지대학교 법학부 교외생으로 유학하시기 전 10여 년은 한의사로 일하였습니다. 1908년 이후 대한제국의 마지막 관리로서 함경남도 갑산 군수와 영흥 군수를 역임하셨습니다. 조모(이정경, 1881~1961)는 중추원(中樞院) 의관을 지낸 분(李技英)의 따님이셨습니다.

선친은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과 유교 교육을 받았으며 여덟 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 계동으로 이주하셨습니다. 선친께서 1942년 《춘추》 5월호에 쓰신 장편(掌篇) 『산신령』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동안 형님이 운영하던 강원도 평창군 운교리 운교금광에서 지낸 경험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백부는 니혼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시고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셨습니다. 당대의 문장가로 “성은 유요 이름은 관순이니 이 나라의 딸이다”로 시작되는 「순국 소녀 유관순 추도사」와 「헐려 짓는 광화문」은 한때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세종로에 가면 광화문부터 쳐다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선친의 형제분들은 모두 조부께서 지어주신 오음(梧蔭), 소오(小梧), 오원(梧園), 벽오(碧梧) 등을 호로 쓰며 벽오동을 사랑하셨습니다. 벽오동 마을을 꿈꾸셨나 봅니다. 그래서 저도 오림(梧琳)이라고 지어놓고 그 마을을 기웃거려도 아무도 불러주는 이가 없습니다.  

선친은 경성 교동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이미 동인 활동을 하셨습니다. 훗날 아동문학가가 된 윤석중을 비롯해 소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장조카인 심재영 등과 ‘꽅밭사’라는 독서회를 조직하고 등사판 잡지 ≪깁븜≫을 만들어 친구들과 돌려 보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쁨을 옛날에는 그렇게 쓴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연희전문 성적표
몇 해 전 교동초등학교에 가서 선친의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전쟁 때 모든 자료가 소실돼 버려 허사였습니다. 필자는 1세기를 훨씬 넘긴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 교정에서 한동안 서성이다가 돌아왔습니다. 선친은 1929년 경성공립농업학교 재학 중에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이듬해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랴오닝성 제3고급중학교에 다녔습니다.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 베이징으로 피신했다가 귀국하셨습니다. 1949년 발간한 장편소설 『청춘』이 이때의 중국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로 보입니다.

1933년 선친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대학에 입학하셨습니다. 2007년 어버이날 선친과 관련된 편린이라도 찾겠다는 생각으로 그 학교에 갔습니다. 뜻밖에도 종이는 싯누렇게 변했지만 글자가 선명한 학업성적표와 학적부, 신체검사표 및 졸업증명서 사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보증인 두 사람은 형(설의식)과 동아일보 기자였던 매형(김두백 金枓白)이었습니다. 1학년 때는 특대생이었고 2학년 성적도 전체에서 1등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식 직후. 1936년
1936년 3월 26일 어머니(김증연 金曾蓮, 1914~1977)와 결혼하시고 학교를 휴학한 뒤 일본 메지로상업학교에 편입해서 1년간 공부하고 연희전문학교에 복학하셨습니다. 함경북도 명천이 고향이신 어머니는 숙명여학교를 졸업하셨습니다. 선친은 결혼 이듬해 1937년 문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셨습니다. 선친이 남기신 시 가운데 「경卿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 유난히 흰 네 얼굴은 필시 눈보라 탓이라 했다// 다만 눈 코 입 귀 이마// 그러니 네 얼굴이 언니보다 예쁘다고만 하였다// 네가 손발을 잎사귀처럼 버리고 떨어질 때/ 아무도 받들어주지 않더란 말이냐/ (중략) 까닭 없이 떼를 쓰던 네 작은 오래비는/ 손발을 풀잎새같이 버리고 시방 잠이 들었다// 비닭이 우는 소리가 그쳤다 卿아 너도 잘 자거라
 

경(卿)은 태어나 바로 숨진 제 누이입니다. 위의 시에서 언니(설정혜 薛貞惠)는 올해 71세, 작은 오래비(설희순 薛熙淳)는 70세입니다. 「경卿아!」는 선친의 유작 가운데 가족을 주제로 한 유일한 시여서 더욱 애착이 갑니다. 얼마 전 선친의 탄생 100주년 기념 문학전집 출간을 위해 자료를 정리하던 중 눈에 띄는 기사를 찾았습니다. 동아일보 1937년 7월 8일 자에 ‘薛貞植 君 米國 遊學(설정식 군 미국 유학)’이란 제목의 기사가 아래와 같이 1단 크기로 실린 것입니다. 유학이 흔치 않던 시절이어서 화제가 됐던 모양입니다.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30대 모습.
함남 단천 출생으로 금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설정식군은 금번 미국 유학을 가기로 되어 오는 26일 경성역을 떠나기로 되었다는데 미국에 건너가서는 오하이오주(州) 아라이안쓰시(市)에 있는 마운트 유니언대학에서 약 2년간, 다시 하바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예정이라 한다(사진은 설정식군). 

선친은 1939년 6월 마운트 유니언대학교를 학사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2년간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던 중 1940년 봄, 부친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귀국하셨습니다.

1941년 1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불패자』를 번역하시고, 2월에는 평론 「토마스 울프에 관한 노트-시(時)와 하(河)를 중심으로」를 ≪인문평론≫에 잇따라 발표하셨습니다.

 
▲제3시집 『제신의 분노』 표지. 1948년 신학사 刊
광복 후 미군정청 여론국장(1946년)과 과도입법의원 부비서장(1947년)으로 일하셨으며 이 무렵 조선문학가동맹 외국문학부 위원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1946년 장편소설 『청춘』과 『프란씨쓰 두셋』을 한성일보와 동아일보에 각각 연재하고 토마스 만의 『마의 민족』을 번역해서 발표하셨습니다. 1947년부터 2년 동안 『종』, 『포도』, 『제신의 분노』 등 시집 세 권을 잇따라 출간하셨습니다.
 
1948년 영자신문 서울 타임스의 주필 겸 편집인을 잠시 지냈으며 이듬해 광복 이후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번역해서 출간했습니다. 필자의 서가에는 1948년 5월 발간된 ≪신세대≫란 월간지가 꽂혀 있습니다. 이 책에 선친께서 소설 『임꺽정 林巨正』의 저자 벽초 홍명희 선생과 나눈 대담기가 실려 있습니다. 바로 전 해에는 둘째 백부(薛義植, 설의식)와 벽초의 대담기가 ≪새한민보≫ 9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형제가 나눈 두 개의 대담기가 임형택·강영주 씨가 엮어 1996년 7월에 펴낸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라는 책(사계절출판사)에 나란히 실려 있다는 점입니다.

 
선친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자진 입대해서 월북하셨습니다. 부산 피난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충남 공주를 거쳐 뒤늦게 부산으로 가는 바람에 동대신동 그 큰 기와집에 우리가 들어갈 방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네 살 때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한동안 니은 자(字) 마당 한쪽 목욕탕에서 살았는데 얼마 후 설날이 돌아왔나 봅니다. 동그란 테 안경을 쓰신 백부님이 친척 아이들을 모아놓고 세뱃돈을 주면서 용처를 물으셨다고 합니다. 제 대답은 “냄비 살래요”였답니다. 아비 없는 어린 손자가 불쌍해 할머니는 저를 끌어안고 한참 우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안채에서 밥을 짓고 나면 솥이나 냄비를 빌려 쓰시던 모습이 네 살배기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수복 후 서울로 가시면서 그 집을 우리에게 물려주고 가셨습니다.

옛날에는 초등학교에서 학기가 바뀌면 담임선생님이 가정환경 조사를 했습니다. “라디오 있는 집 손들어”, “자기 집인 사람 손들어”, “부모님 모두 계시면 손들어” 하는 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1학기에는 살아 계셨다가 2학기에는 돌아가셨습니다. 어려서 월북이란 의미를 모른데다 어른들이 미국에 가셨다고도 하고 북한으로 납치되었다고도 하셨기 때문에 어린 제가 헷갈렸던 것입니다. 큰 형님과 누이는 서울 할머니 댁과 친척 집에서 학교에 다녔고, 부산 집에는 어머니가 둘째 형과 저를 데리고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는 매일 새벽 어머니의 독경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방 한구석 조그만 상위에 갓 지은 쌀밥과 정화수를 올려놓고 불경을 읽으시며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반야심경과 천수경을 부분적으로 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부민동에 있던 대한불교진각종의 심인당이란 곳에 가시어 불공을 드리셨습니다. 심인당은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육자진언(六字眞言)을 염송하며 수행하는 밀교(密敎) 종단입니다. 어머니와 저에게 ‘옴마니반메훔’은 신호이자 암호였습니다. 등교할 때도, 중학교 시험일에도, 소풍을 갈 때도 어머니는 ‘옴마니반메훔’을 외우시며 제게도 그리하라는 눈빛을 보이셨습니다. 지금은 개신교 신자이지만 길을 가다가 심인당 도량을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옴마니반메훔’을 외우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이같이 어머니께서 남편의 생환을 염원하며 지극정성으로 드리신 기원제가 안타깝게도 제사로 바뀐 계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던 1962년 둘째 형이 즐겨보던 ≪思想界(사상계)≫ 9월호에 실린 「한 시인의 추억, 薛貞植(설정식)의 비극」이란 장문의 기고문이 우리 가족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습니다. 기고문은 헝가리의 종군기자 티보 메러이(Tibor Méray)가 1951년 헝가리 공산당 중앙기관지 ≪서버드넵 SzabadNép(자유인)≫의 특파원으로 개성 휴전회담 등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선친에 대한 회상의 기록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때까지만 해도 북쪽 하늘 아래 살아 계시다고 막연하게나마 믿었던 선친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돌아가신 정확한 날짜를 몰라 그때부터 해마다 생신인 음력 8월 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선친은 1951년 개성 휴전회담 조중(朝中)대표단의 영어통역관으로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1953년 북한의 남로당계 인사 숙청과정에서 ‘미제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임화 등과 함께 처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2005년 5월 22일 저희 형제들은 이 세상에서 선친을 마지막으로 만난 백발의 티보 메러이 선생을 숙명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분이 대산문화재단이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초대되어 한국을 처음 찾은 것입니다. 주요 일간지는 다음날 우리의 만남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티보 메러이 선생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60여 년 전 취재노트와 김일성에게 받은 훈장 등을 보여주었고, 선친의 시를 헝가리어로 번역해서 출간한 『우정의 서사시』란 시집, 개성휴전회담장의 선친 사진 등 소중한 자료를 주고 가셨습니다.   
 
▲개성휴전회담에서 아버지를 만났던 헝가리 작가 티보 메러이 씨(가운데)부부와 그의 딸

저는 선친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설정식 문학전집』을 준비하며 수많은 상념에 사로잡혔습니다. 문학전집의 발간사 제목을 ‛황혼의 사남매, 60년 사부곡(思父曲)ʼ으로 붙였습니다. 30대의 선친께서 예순을 훨씬 넘긴 막내아들에게 공부를 많이 가르치셨습니다. 노자(老子), 장자(莊子)에서부터 동서양을 아우르는 고전(古典)으로 말입니다. 아버지 덕분에 『하므렡』은 교정을 보면서 세 번이나 정독하였습니다. 이제는 한평생 가슴 속에 트라우마로 남았던 ‛아버지의 부재(不在)’가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서울국제문학포럼으로 선친의 친구 티보 메러이 선생을 만나게 되는 다리를 놓아주신 대산문화재단에 감사드립니다. 전집이 나오는 대로 우리 형제들은 어머님이 계신 모란공원으로 달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