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_시인,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1941년생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아니다 그렇지 않다』 『크낙산의 마음』 『가진 것
하나도 없지만』 『처음 만나던 때』 『시간의 부드러운 손』 『하루 또 하루』, 시선집
『대장간의 유혹』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를 위하여』 등
김광규 시인
시작노트
말, 자전거, 오토바이, 승용차, 기차, 선박, 비행기…… 모든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우리는 “타고 간다”고 말한다. 두 발로 힘들여 달려가는 대신, 편안하게 앉아서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이다. 편안하고 신속하게 타고 다니려면, 여러 가지 인프라스트럭처가 있어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일수록 도로, 철도, 상하수도, 항만, 공항 등 기간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다. 몽골에서는 한국을 ‘솔롱고’라고 부른다. 극동의 선진국 솔롱고의 관광객들이 초원과 사막과 유목민의 나라 몽골에 가서, 길 없는 벌판에서 말을 타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쳐다본다.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나라 솔롱고 사람들이 왜 길도 없고, 물도 귀하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땅으로 몰려오는지, 몽골항공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광활한 초원을 횡단하다가, 어렴풋이 깨달은 바 있었다.
길 없는 길
울란바토르로 날아가는 국내선 34인승 포커 쌍발기 창가에 앉아 광활한 초원을 내려다 본다 끝없이 펼쳐진 언덕과 들판에 드문드문 유목민의 천막들 눈에 띄고 무리지어 방목되는 소 말 양 염소 낙타들 말을 타고 다니는 몽골 인들에게 바퀴로 달려가는 포장도로 필요 없는 듯 말이 가는 길 따로 없고 말이 가는 곳 모두 길이다 철도와 차도 거미줄처럼 뒤엉킨 땅 솔롱고 세상이 온통 길인 것 같지만 걸어 다니기 힘든 나라 진실로 사람이 가야 할 길은 길 없는 길 아닌가
저녁 풍경
가을 햇볕 눈부시게 감나무와 대추나무 윤나는 잎들 위로 내려 쪼이고 내부순환도로 달려가는 자동차 소음 방음벽을 넘쳐 흐른다 선거 때 들어선 무허가 건물 언덕 아파트 고층 유리창들 지는 햇살에 반짝거리고 길 건너 동네까지 긴 그림자 눕힌다 굴뚝과 연기 사라져 버린 육백년 고도 기와집과 골목길 자취 감춘 변두리의 보잘것없는 저녁 풍경 이곳을 떠나면 문득 보고 싶게 될 지도 모른다 집 떠나면 허물없는 식구들 생각나고 외국에 가면 지저분한 고국이 그리워지듯
내외
허리 다쳐 꼼짝 못하고 시체처럼 자리에 누워있으려니 커튼에 붙어있는 노린재 한 마리 살금살금 기어 다니는 꼴 눈에 거슬린다 늦가을 화분에 묻어 들어와 어느새 입동 소설 대설 동지를 방 안에서 살고 있다 언젠가는 이불 위로 떨어질 것 같아 없애버리라는 바깥양반의 말씀 안사람은 듣지 않는다 살겠다고 기어 들어온 것을 어떻게 죽이냐는 것이다 그러면 밖으로 쫓아내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이 추위에 밖으로 몰아내면 얼어 죽는다는 것이다 부드럽고 따스하게 안에서 생명을 감싸려는 보살의 말씀 촉촉하고 향기롭지만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는 속인은 겨우내 좀비처럼 사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