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용출_세계일보 문화부 기자. 1969년생
저서 『독일아리랑』 『독서경영』(공저) 등
“아직도 비록 신분증은 못 얻어 가졌지만 ‘나는 소설가다’는 자각 하나로 제아무리 강한 세도가나 내로라하는 잘난 사람 앞에서도 힘 안 들이고 기죽을 거 없이 당당할 수 있고, 제 아무리 보잘것없는 밑바닥 못난이들하고 어울려도 내가 한 치도 더 잘난 거 없으니 이 아니 유쾌한가.” (박완서의 글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중에서)
소설가에 대한 이 같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한국 문단의 어머니’ 역할을 해온 박완서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년. 이 기간은 상당수 문학인에게는 박 선생을 실존에서 신화로 옮겨놓는 시간이겠지만, 기자에게는 오히려 그의 실존으로 향하는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박완서 소설전
사실 나는 박 선생을 잘 알지도, 그의 작품을 많이 읽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세계 문학전집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를 알 수 없었고, 대학 문청(文靑) 시절에는 남성 작가들의 울타리에 갇혀 그의 작품을 엿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설가 조정래나 이청준, 황석영, 이문열, 시인 고은과 신경림, 김남주, 김용택 등의 향기는 진동했고 나는 장렬히 대취했다. 그들은 강렬했고 나는 아직 여렸을 터이니. 더구나 지난해 박 선생이 타계했을 때조차 문학 담당 기자가 아니어서 그를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다. 박 선생을 잘 알지 못했기에 그를 향한 문학 독자들의 사랑과 존경은 풀리지 않은 의문일 밖에.
다행히 박 선생 타계 1주기 즈음에야 그의 인간적인 풍모와 작품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그를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마음의 행로에 교차하던 지난 1월. 선생의 1주기 추모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장녀인 작가 호원숙(58) 씨와 출판사 세계사의 전집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이경호 한서대 교수, 경기도 구리시 도서관 담당자 등과 접촉할 수 있었다.
박 선생 1주기 추모 행사는 그의 삶처럼 아늑했다. 지난 1월 21일과 22일에는 고인이 살았던 경기 구리시 아치울 마을 집과 고인이 잠든 용인 천주교공원묘지에서 유족과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차례로 추모 미사가 열렸다. 1월 30일에는 구리시청 강당에서 고인의 단편 「그리움을 위하여」를 재해석한 낭독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특히 출판사 세계사에 의해 등단작인 「나목」부터 2004년 펴낸 마지막 장편소설 『그 남자네 집』까지 담긴 22권짜리 전집이 출간돼 지난 1월 2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가 열리기도 했다. 기자간담회에서 박 선생의 장녀 호원숙 씨의 얘기는 잊을 수 없다.
“1년간 교정을 보면서 어느 날은 내팽개쳤다가, 옆에 놓고 자기도 하다가, 잠이 깨면 다시 꺼내서 불을 켜고 보곤 했어요. 어머니는 작품 속에 항상 질문과 의문점을 숨겨놓고 있었기에, 저 역시 다 읽어본 소설들인데도 뭐가 또 궁금한지 다시 펼쳐보기를 반복했죠. 어머니 소설을 읽는 것은 큰 산맥을 종주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어려움만 주신 게 아니라 냇물이 흐르고 들꽃이 피어있는 즐거움도 주셨죠. 언어의 즐거움, 표현의 즐거움, 이야기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소설가 은희경 씨가 “고인께서 늘 유지하던 ‘삶의 꼿꼿함’과 ‘인생에 대한 긴장감’, ‘나 자신을 소수(자)로 두는 겸손이자 균형’을 전집 발간을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나누길 바란다”고 덧붙이고, 박철화 중앙대 교수는 “문단에서 작고한 문인의 1주기 행사가 이렇게 근사하게 이뤄진 건 많지 않다”고 지적했을 때, 마음 한 구석에 있던 미안함과 아쉬움은 조금 덜어지는 듯했다.
특히 얼마 뒤 집을 찾아온 어머니를 통해 그 동안 박 선생을 향한 문학 독자들과 문학인들의 사랑에 대한 의문도 조금 풀렸다. 어머니는 거실에서 박 선생의 전집이 담긴 박스 속에서 책 하나를 꺼내 보면서 “이 분은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문득 한 생각. 문학책을 많이 읽은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은, 육순의 어머니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문학을 좋아하는 팬에게 박완서란 존재는 더 말해 무엇하랴.
박완서 선생의 1주기를 중심으로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갔지만,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한국 문학 사회에서는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세상이 문학으로 들어왔지만 문학도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은 때문이다.
많은 문인들이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글발글발 평화릴레이’ 대장정을 벌였다. 2011년 12월 26일 임진각을 출발한 작가회의 소속 작가와 시민 등 연인원 500여명은 1번 국도를 따라 총 570.8㎞를 걸었다. 지난 1월 20일 마지막 구간인 제주 중문관광단지에서 강정마을 입구까지 구간에는 소설가 조정래와 현기영, 공지영, 시인 도종환 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이은봉 작가회의 사무총장은 “평화의 가슴 제주를 정치적 경제적 욕망으로 가득 찬 자들이 희롱하게 놓아두는 일은 역사적 모욕이자 문화적 수치”라고 말했다.
‘울보 시인’ 송경동(46) 씨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활동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지난 2월 보석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송씨는 29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을 이틀 앞둔 2011년 11월 18일 4차례의 희망버스를 기획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지난 2월 9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2012년 임진년 새해에도 문학은 멈추지 않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각 언론사에서 신춘문예를 실시하며 많은 작가를 탄생시켰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절창을 남긴 시인 백석(白石, 1912~1996)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재조명하는 행사가 잇따를 예정이다.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을 쓴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문학 출판계에서는 헤밍웨이 작품을 출간하거나 할 계획을 세우며 ‘헤밍웨이 대전(大戰)’이 벌어지고 있다.
다양한 사건사고에도 문학은 멈추지 않았다. 제1회 박경리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최인훈 씨는 사상가적 면모를 보여주는 책 『바다의 편지』를 묶어내 주목을 받았다. 소설가 겸 번역가인 안정효 씨는 10년 만에 서해안에 제주도만한 섬이 떠오른다는 설정을 토대로 한 장편 소설 『솔섬』(전3권)을, 최윤 씨도 8년 만에 평범한 부부의 비극적 죽음과 입양된 아들의 흔적 찾기를 그린 신작 장편소설 『오릭맨스티』를 각각 펴냈다.
김연수 씨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캐릭터 정훈을 탄생시킨 신작 장편 『원더보이』를 들고 4년 만에 돌아왔고, 함정임 씨도 앙토냉 아르토의 삶을 수수께끼로 삼아 예술사와 상상력을 결합한 『내 남자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이밖에도 편혜영, 한유주, 안보윤, 전아리, 김사과 등 젊은 작가들도 소설집이나 장편소설을 잇따라 출간해 소설의 숲을 풍성하게 했다.
작고한 작가의 작품도 잇따라 나왔다. 고(故) 박경리(1926~2008) 선생이 1960년대 신문에 연재한 장편소설 『녹지대』가 47년 만에 2권으로 묶여 출간됐고, 남석(南石) 안수길(1911~1977) 선생의 전집도 사후 35년 만에 16권으로 출간됐다. 전집 가격은 250만원으로 국내 최고가 수준.
시인들도 부단히 봄을 준비했다. 지난 2월 11일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에 취임한 중견시인 이시영 씨는 12번째 신작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장석주 씨도 주역의 세계관과 화법을 시에 적용한 15번째 신작 시집 『오랫동안』을 각각 펴냈다. 문인수 씨도 변두리의 삶과 사물 서정적으로 묘사한 8번째 시집 『적막 소리』를 출간했다.
문학은 쉼 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봄은 아직 문밖에서 어른거리는 이 계절, 박완서 선생이 작고한 지 1년이 지났지만 그의 넉넉한 품은 여전히 그립다. 다만 그리움이 산 속에서 눈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책장 넘기는 소리로 청명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