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한국 현대문학의 대표시인 고은의 시집 『만인보(ON BIN CAN)』가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터키에서 출간되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ON BIN CAN)』는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던 시인이 감옥에 투옥되어 수감생활을 하던 당시 구상했던 내용을 장장 30년에 걸쳐 완성한 총 30권 분량의 시집이다. 시인이 살면서 만난 현실과 역사를 시로 집대성한 살아있는 생명의 거대한 백과사전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만인보』는 작품의 분량 면에서도 방대하기 때문에 어느 부분을 번역할 것인지부터 결정해야 했다. 먼저, 번역이 결정되자 고은 시인은 직접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에서 호응도가 높았던 작품의 리스트를 보내왔다. 그중에서 1권부터 4권까지 작품 약 150편 정도를 선정하였다.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작가이며, 특히 시문학에 있어서 한국현대문학의 대표작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터키에서는 고은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터키에서도 한류 열풍과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기는 하지만, 한류열풍에 비하면 아직은 한국문학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고은의 전기 시들이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후기 시들은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의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만인보』는 시인의 이러한 시적 투쟁과 삶의 행보를 살아있는 모든 생명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승화시켜 또 다른 생명을 부여한 시인만의 거대한 대작이다. 시인이 살면서 역사와 현실을 통해 만났던 3천 8백여 명의 ‘사람과 동물과 나무와 곤충과 풀들’이 시인의 언어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ON BIN CAN’은 터키어로 ‘살아있는 만 개의 생명’이란 뜻이다. 시인의 걸쭉하고 토속적이며 풍요로운 시적 언어의 세계를 터키어로 옮겨, 다시 터키라는 세계에서 생명을 지속시킨다는 것은 역시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고은 시인만이 갖는 한국적이며 독특한 시의 느낌과 향기를 터키인이 이해할 수 있는 색채로 채색한다는 일이 역시 시를 번역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실감나게 했다. 특히 터키는 시 전통이 오랫동안 강하게 살아있는 나라이며, 터키 민족은 운율 중심의 시를 즐기며 살아온 민족이다. 그러므로 산문적 색채가 강한 고은 시인의 시를 터키인에게 익숙한 리듬감을 주는 것이야말로 풀어내야할 큰 문제였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들은 터키의 현대 시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메틴 투란 시인의 도움과 감수를 받아 해결할 수 있었다. 메틴 시인은 터키의 구전 시 전통을 현대시로 복원하는 작업을 오랫동안 수행해온 시인이므로, 평면적 언어에 강약과 리듬감을 주어 다층적 구조로 만들어내는데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다음에는 출판사를 섭외하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한국 문학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이 축적되지 않은 터키에서 외국 시인 번역 시집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Ürün 출판사가 한국문학시리즈를 기획해 보자며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Ürün 출판사는 터키 앙카라에 위치해 있으며, 동양의 고전, 역사, 철학에 관한 서적을 100권 이상 출판한 앙카라 최고의 출판사로 알려져 있다. Ürün 출판사는 터키의 가장 독자층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인문 학술지를 여러 권 출판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을 홍보하는 데에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학을 알리고 한국의 정신을 알리는 작업이 터키에서 아직은 시작단계에 있지만 고은 시인의 『만인보』가 터키인의 영혼을 깨워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의 길로 인도하기를 바램한다.

※ 터키어역 『만인보』는 재단의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 지원을 받아 2011년 터키의 우른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