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어린 시절 만난 흑백 TV 브라운관은 열정과 꿈, 취향과 즐거움, 그리고 부조리함을 가르쳐준 판도라상자였다.

TV를 보는 것 자체가 일상의 재미였던 시절, 초등학교 4학년 합주부를 하던 나는 느닷없이 TV에 나가게 되었다. 남산에 있던 방송국에 가서 어린이 프로그램에 합주단으로 출연했는데, 현장을 보고 좀 실망했다. 진행자인 아나운서 화장이 너무 진해서 불편해 보였다. 마이크를 잡고 말하는데 작게 속삭이듯 말해 잘 안 들려서 답답하기도 했다. 앞에 놓인 카메라 위주로 행동하도록 카메라 뒤에 선 선생님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통제하는 분위기도 불편했다. 영화에 아역으로 나갈 기회를 떨떠름하게 생각해 “그건 별로야~”라며 시큰둥하게 거부했던 것도 불편했던 그 기억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십여 년이 흘러 영화 아카데미 시절, 그 방송국이 있던 남산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그 기억이 떠올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억은 같은 냄새와 공간, 이미지…… 그런 것들로부터 피어오르니까.

그렇지만 TV 보기 자체는 어린 시절 즐거운 놀이였다. 지난 해 화제작 <써니>같은 노스탤지어풍 문화코드가 중요한 영화, <소중한 날의 꿈> 같은 애니메이션 등등…… 그런 영화들을 보노라면 어린 시절 TV 이미지들이 번개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에 펼쳐진다.

<님은 먼 곳에>란 영화를 볼 때 그렇다. 영화 제목만 들어도 떠오르는 노래 ‘님은 먼 곳에’는 김추자 이미지를 불러내는 주문구처럼 작동한다. 부푼 퍼머 머릿발을 누르며 이마에 질끈 머리띠를 동여맨 얼굴, 꼭 끼는 옷을 입고 나름대로 풍성한 몸매의 굴곡을 과시하며 “파도여 슬퍼 말아라 / 파도여 춤을 추어라 / 끝없는 몸부림에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마라 /솟아라 태양아 어둠을 헤치고 찬란한 고독을 노래하라”를 열창하던 모습. 그건 온몸 제스처로, 노래로 욕망을 발산하는 놀라움이었다. 훗날 ‘격정’이란 단어를 알게 되면서 내게 처음으로 그 의미를 가르쳐 준 이미지는 <쇼쇼쇼>의 김추자였음을 깨달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라는 경쾌한 인사로 시작되는 <쇼쇼쇼>는 7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대중문화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었다. 그 무대에서 본 김정미는 김추자보다 세련된 이미지로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나뭇가지 사이에 바람 불어 가면 / 어디선가 들리는 그대 목소리 / (……) 바람같이 날아 아무도 몰래 그를 지켜보며 날아가고파”라며 노래하는 사이키델릭 목소리, 마녀 같은 기이한 손짓과 몸짓…… 언덕 위에 서서 무대 세트에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옷과 긴 머리를 날리던 그녀 모습은 자연과 욕망을 하나로 돌리는 기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추자, 김정미, 장현 등등…… 이들이 부른 곡을 만들고 키워준 장본인 신중현이 ‘신중현과 엽전들’로 등장한 모습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작은 남자가 기타를 치며 온몸을 뒤틀며 도취한 모습으로 부르던 「미인」같은 곡은 낯설음과 중독성이 공존하는 음악에의 초대였다. 훗날 그런 노래들이 사이키델릭 록과 한국풍 록인 걸 알았다. 영화광이기 이전에 음악광이기도 한 내 취향은 아마도 어린 시절 TV에서 본 신중현으로부터 형성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핸드폰을 걸면 들려오는 음악으로 담은 실비 바르탕의 「마리차강변의 추억」도 70년대 중반 TV에서 본 그녀의 매력에 반한 여파 때문일 것이다. 금발의 긴 생머리를 날리며 노래와 하나가 되어 무대를 장악한 그녀의 이미지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발견이었다. 저렇게 가냘픈 몸에서 어쩌면 저렇게 강렬한 노래가 터져 나올까? 그 시절 불어를 모르던 나에게 그녀의 샹송은 음률 자체만으로도 온 몸과 맘을 사로잡았다. 훗날 불어를 공부한 것도 샹송과 실존주의 소설에 빠진 때문인데, 이미 그 징후는 어린 시절 TV에서 본 실비 바르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음악을 듣고프면 유튜브에 들어가 실비 바르탕을 친다. 거기서 만나는 그녀는 나이가 들어 자유를 찾아 떠났던 모국 불가리아에서 귀향 공연을 한다. 그녀가 모국에 돌아와 객석과 하나 되어 열창하는 바로 그 노래 「마리차강변의 추억」은 세월이 흐르니 더 깊은 내면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TV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기억은 주말에 보던 영화들이다. 감독이던 아버지는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집안 돈을 투자해 제작하고 연출한 <파멸>이 검열에 걸려 엄청 고생하셨다. 그러던 와중에 서라벌대학에서 극작술을 강의하시다 쓰러지셨다. 수년간 집에서 요양 중인 아버지는 절망적인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린 내게는 TV 같이 보기 친구였다. 시중에 걸리던 영화도 온가족이 관람했지만, TV 영화는 늦은 밤에도 자지 않고 같이 보던 말 그대로 안방극장이었다. 검은 뿔테에 검은 터틀넥을 입고 <명화극장>에 등장한 정영일 영화평론가의 모습도 떠오른다. 당연히 그때는 내가 영화평론과 함께 하는 인생길을 갈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 시절 온가족이 함께 봤던 영화들을 훗날 DVD로 다시 보면 그땐 몰랐던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눈높이로 보는 영화의 진미를 깨닫는 쾌감도 느낀다. 주말 영화로 수차례 본 그 시절 영화들에서 느꼈던 앙금들은 훗날 내게 영화를 푸는 화두로 작동했다. 이를테면 <애수>에서 착하고 예쁜 비비안 리가 왜 워털루 브리지에서 뛰어내려 자살해야 했을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삭발당한 잉그리드 버그먼은 왜 게리 쿠퍼에게 데려가 달라고 눈물 글썽이며 애원했을까? 그 많은 서부극에서 여자들이 카우보이가 떠날 때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지 그땐 몰랐었다. 그걸 보는 나야 어린애라 어른 없이 멀리 가지 못했지만, 저렇게 큰 어른 언니들이 자기 발로 가고픈데, 가면 되는데, 왜 남자에게 데려가 달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됐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짜여진 대본이고, 그렇게 프로그램 된 여자들의 의존심을 보여주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내 일상에서 TV보기는 그때만큼 정겹지도 않고, 어디가나 켜있는 TV는 소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 TV에서 본 이미지들이 두고두고 반추할 노스탤지어이자 내 취향과 욕망의 보루였음을 인정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