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萬里城 만리성

소설에 새긴 이름, 영원의 장소들

수필은 삶의 모습을 그대로 남긴다

서울,2030년 - 포스트코로나 시대 읽기 ①환란일지 ②2030년 서울, 그리고 레이턴시 ③바이러스와 함께 돌아보기 ④마스크에 관한 학교괴담

군함도가 울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현을 기억하는 이유

유머는 엄숙함이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늘 지루하고 딱딱한 아버지의 설교

소설가 상허 씨의 일일

찬탄과 논란의 굴곡, 미녀 뽑기 90여 년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2001년 봄, 젊은 시조시인들

당산대형의 꿈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이 일본에서 그린 특이한 형식의 그림

①울릉도,초생활 ②미의,저쪽은 모른다

①그분이 오신다 ②기미

화내지 마세요!

①완성의 속도 ②코로나 여름, ‘국뽕 아재’의 기원 ③적막과 고요와 침묵

아무일 일어나지 않는 40호 남짓 시골마을, 그 사람들과 정서

진퇴양난의 그해 겨울 막바지에 쓴 시

7월은 가장 잔인한 달

①일상과 일상 너머를 아우르는 탄력있는 상상력 ②포스트코로나 시대 한국문학의 흐름과 성취는?

한반도, “지리의 포로”에서 “지리의 힘”으로

인간의 눈, 개의 마음

첫 책, 『자연사박물관』 그 예측을 넘어

어떤 가족의 우스꽝스러운 비극

“일본 동북사투리가 너무 어려웠어요. 게다가 한국역사도…”

새로운 창작품을 읽는 느낌

대산창작기금,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대산세계문학총서

2020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지원대상작 선정 제28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수상자 선정 김소월 등단 100주년 기념 시그림전 - 소월시 100년, 한국시 100년

노트 위 패스포트

소설에 새긴 이름, 영원의 장소들

-루아르 고성들에서 파리 페르라셰즈까지

함정임
소설가,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1964년생.
소설집 『이야기, 떨어지는 가면』 『당신의 물고기』 『아주 사소한 중독』 『버스, 지나가다』 『네 마음의 푸른 눈』 『저녁 식사가 끝난 뒤』『사랑을 사랑하는 것』 등


소설에 새긴 이름, 영원의 장소들
-루아르 고성들에서 파리 페르라셰즈까지



소뮈르(Saumur)

그때 소녀가 길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소녀가 사라진 쪽은 소뮈르 성(城)으로 이어지는 오르막 비탈길이었다. 집과 집이 맞닿을 듯 마주보고 있어 소녀가 올라간 골목은 마치 오르막 터널 같기도 했다. 비둘기 한 마리가 요란하게 날개를 치며 ‘낡고 음침한 저택’의 나무 창틀에 내려앉았다. 오후의 햇살이 눈을 찌르듯 번쩍였다. 나는 골목 입구에 있는 이곳 전통 크레프(crêpe) 식당 라몽테뒤포르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올라오는 참이었다. 소뮈르는 2013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성 아래, 강변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고, 5년 만에 다시 찾은 이번에는 성 바로 아래에 있는 저택, 그러니까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낡고 음침한 저택’과 맞닿을 듯이 서 있는 저택 1층에 숙소를 구했다. 원래는 7월과 8월, 소뮈르에서 강을 따라 11km 떨어진 몽소로(Montsoreau)라는 중세 고성마을에 오두막을 얻어 체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입주일보다 사흘 먼저 도착한 것은 순전히 발자크(1799~1850)의 『외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의 서두 때문이었다.

소뮈르 중심 생 피에르 광장과 성당 

 

어느 지방의 몇몇 도시에는 겉모습에서 아주 음침한 수도원이나 지독히 쓸쓸한 황야, 아니면 말할 수 없이 서글픈 폐허가 연상되는 그런 우울함이 느껴지는 집들이 있다. 그런 집은 틀림없이 수도원의 침묵과 황야의 쓸쓸함 그리고 해골이 나뒹구는 폐허의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그곳에선 삶의 움직임이 하도 고요해서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에게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집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런 우울함의 원리가 소뮈르 마을에서 위쪽으로 난, 성으로 가는 오르막길의 맨 끝에 자리 잡은 어떤 집의 외관에 나타나 있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제니 그랑데』, 조명원 옮김, 지만지

영화가 세상에 출현하지 않았던 시절, 발자크는 마치 소설을 읽는 독자가 관객이라도 되듯,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될 때처럼 소설의 서두를 연출했다. 어휘, 문장, 단락이 한 장면 한 장면 이어지고, 쌓여지면서 그곳 그 사람이, 이곳 내 눈앞에, 나에게 펼쳐지는 것이다. 영화의 미장센(mise-en-scène)이 탄생하는 순간인데, 나는 소설을 알아갈수록, 『외제니 그랑데』를 손 가까이 두고 첫 장면을 펼쳐보곤 한다. 마치 이런 나의 성정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주인으로부터 열쇠를 건네받아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의 서가에는 『외제니 그랑데』를 비롯 발자크의 소설들이 기다리듯 놓여 있었다.

루아르 강변 고성(古城) 마을들
프랑스 중부 내륙에서 대서양으로 1천km에 걸쳐 흐르는 루아르 강변의 수많은 마을들 중에서 경관이 빼어나기로 이름난 곳들이 소뮈르를 중심으로 좌우로 줄지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소뮈르 옆 동네 몽소로이다. 몽소로와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는 마을이 캉드생마르탱(Candes-Saint-Martin)인데, 두 마을은 인구 4백 명 내외의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매년 프랑스 전국 마을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꽃마을(미슐랭 스타처럼 꽃을 부여한다)에는 선두에 이름을 올리는 곳이다. 몽소로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강변 삼거리에 장이 서는데, 큰 마트에 가려면 소뮈르나 시농(Chinon)으로 가야 한다. 두 곳은 몽소로를 가운데 두고 비슷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둘 다 루아르 강변의 고성마을이고, 둘 다 와인산지 고유명으로 유명하고, 둘 다 발자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소설 『외제니 그랑데』의 주인공 외제니의 아버지 그랑데 씨는 포도주 통장수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그랑데 씨의 행적을 보면, 발자크의 부친의 그것과 겹쳐지고, 드(de)라는 귀족 칭호를 붙인 그의 이름의 내력도 짐작 가능하다.

『외제니 그랑데』의 무대 몽테뒤포르 오르막길

“그랑데 씨는 1789년 자유자재로 읽고 쓰고 계산할 줄 아는 힘 있는 통장수였다. 프랑스 공화국이 소뮈르 지방에서 교회 재산을 매각할 당시 40세였던 그는 돈 많은 목재상의 딸과 막 결혼을 한 직후였다. (중략) 그는 정당하진 않지만 합법적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좋은 포도밭과 낡은 수도원 그리고 약간의 소작지를 한 조각의 빵처럼 쉽게 얻어냈다. (중략) 소뮈르에서는 부동산 수입에 따라 재산의 가치를 추정했다. 그랑데 씨는 평등에 대한 우리의 열망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새로운 귀족 칭호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 지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사람이 된 것이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제니 그랑데』, 조명원 옮김, 지만지

소설 『외제니 그랑데』는 나폴레옹 제정기와 공화정이 오가던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포도주 통장수 사업과 세 번의 깜짝 상속으로 소뮈르 지방에서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그랑데 씨와 그의 외동딸 외제니의 결혼을 둘러싼 이야기다. 수전노 그랑데 씨의 막대한 재산의 무게로 인해 외제니의 결혼은 순탄치 않고, 어쩌다 깃든 사촌과의 사랑도 안타까운 이별과 지리한 기다림에 그칠 뿐이다. 도대체 소설 제목이 될 만큼 무엇 하나 강렬하지 않은 외제니의 이야기를 발자크는 왜 썼을까. 발자크는 100편 가까운 소설들을 모아 명명한 『인간극 (Comédie Humaine)』에서 풍속 연구(Étude de mœurs)와 지방 생활의 장면들(Scènes de la vie de province)에 『외제니 그랑데』를 배치했다. 발자크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요동치던 19세기 전반의 프랑스를 소설로 기록하고자 했는데, 인간의 황금(돈) 추구, 곧 물욕에 대한 탐구가 그의 관심 사항이었다. 그런 그가 집요하게 파헤친 인물들의 행로는 ‘강한 인간은 어떻게 서서히 무너지는가’로 귀결된다.

루아르 강변의 몽소로 고성(古城)과 마을

 

거대하게 펼쳐지는 포도밭과 해바라기밭

 

80만 프랑의 연금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쌍한 외제니 그랑데 시절과 똑같이 생활했다. (중략) 소뮈르의 집, 햇볕이 들지 않고, 불기운도 없이 언제까지나 어두컴컴하고 우울한 그 집이야말로 그녀의 삶의 이미지인 것이다. (중략) 그녀의 영혼이 지닌 위대함은 교육의 부족과 유년시절의 관습을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한가운데에 살면서 속세에 속하지 않은 여인, 훌륭한 아내이자 어머니였으나 남편도, 아이도, 가족도 없는 한 여인의 이야기이다.
-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제니 그랑데』, 조명원 옮김, 지만지

소뮈르에서 몽소로로 거처를 옮긴 뒤, 처음엔 소뮈르 쪽으로 장을 보러 가다가, 차츰 시농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몽소로 강변 삼거리에서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면 소뮈르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마을 자체가 유네스코유산으로 지정된 캉드생마르탱을 거쳐 시농으로 이어졌다. 나머지 한쪽은 루아르 숲길로 장 주네가 수감생활을 했던 퐁트브로수도원 마을과 프랑스 신문의 창시자 르노도의 태생지인 뢰댕 마을, 푸코의 태생지이자 영면처인 푸아티에 쪽이었다. 캉드생마르탱은 시속 30km, 그 외는 50km 제한 속도의 마을들이었다. 발자크는 루아르 지방의 와인들 중 특히 시농 와인 애호가로, 시농의 한 와이너리를 소유하기도 했다. 파리 센강 기슭 파시의 레이누아르 거리에 있는 발자크의 집 바로 지척에 와인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는 것과 박물관의 포도주 저장 동굴(카브)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다 보면, 또 다른 동굴에서 등불을 켜들고 내려오는 발자크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몽소로에서 시농에 이르는 길은 루아르 강의 지류인 비엔 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해바라기 밭이 장관이다. 내가 소뮈르 쪽에서 시농 쪽으로 장보기를 옮겨간 것에는 이 해바라기 밭의 황금물결도 한몫했다. 마을과 마을 사이, 보이는 것이라고는 강 양안에 펼쳐진 포도밭과 해바라기밭이 전부이지만, 이 작은 마을들은 발자크의 소설들이 잉태된 곳이고,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의 작가 라블레, 20세기 초 패션 혁명을 일으킨 가브리엘 샤넬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들은 수도원과도 관계가 있다. 『외제니 그랑데』에서 그랑데 씨가 부의 축적 과정에서 수도원을 사들이고, 수도사이자 의사이자 작가였던 프랑수아 라블레는 시농 교외 라 두니에르에서 태어나 시내에서 살다가 수도원에 들어가 신학을 전공했다. 장 주네는 인근 퐁트브로수도원 감옥에서 노동하며 수감 생활했으며, 샤넬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언니와 함께 수도원 고아원에 맡겨져 성장했다.

사셰(Saché)
소뮈르, 몽소르, 시농과 마찬가지로 사셰는 성 이름이자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789년 900여 명이 살던 마을에서 2020년 현재는 1,400명에 달하도록 증가하였다. 사셰성(Châteaux de Saché)은 발자크의 어머니의 연인 장 드 마르곤 소유의 저택이었다. 투르에서 태어나 방돔 기숙학교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발자크가 이 저택에 머물며 집필을 한 것은 1824년부터 1837년까지이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머문 것은 죽기 2년 전인 1948년이다. 이 성의 소유자인 장 드 마르곤은 어린 오노레(발자크, 1807년)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정신의 감옥’이라고 불렀던 방돔 기숙학교로 보내지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드 마르곤과 아들을 낳았고, 앙리라는 이 아들은 애정 없는 결혼에서 낳은 아들(발자크)과는 다른 사랑을 받았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6년 동안 한 번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기숙학교 생활을 해야 했던 발자크는 모성 결핍 속에 어머니와도 같은 귀부인들에게 연정을 느끼고, 평생 여러 귀부인들과 연인관계로 삶을 지탱했다. 발자크는 파리에서 채무자들에게 쫓기거나, 중요한 원고를 시작하고 손보아야 할 때, 이곳으로 피신해 와서 심신을 휴양하며, 집필에 매진했다.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정신을 차리고, 침대에 앉아 오후 5시까지 글을 썼다.’ 이곳은 그의 첫 연인이자 오랫동안 정신적, 경제적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23살 연상의 베르니 부인을 모델로 쓴 『골짜기의 백합』의 배경지이자 그의 대표작인 『고리오 영감』, 그의 자전소설인 『루이 랑베르』의 집필지이다. 수많은 가명으로 소설과 콩트를 썼던 발자크가 비로소 ‘오노레 드 발자크’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출세작 『나귀 가죽』(파리, 1830~1831)의 대성공 이후, 곧이어 착수한 『루이 랑베르』의 끝에는 ‘1832년 6월에서 7월 사셰에서,’ 『고리오 영감』에는 ‘1834년 9월 사셰에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발자크는 이 성을 방문하고, 머문 인상을 장 드 마르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에 써보냈다.

“사셰에서, 저는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처럼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하늘이 너무 맑고, 참나무가 너무 아름답고, 고요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곳에는 루아르강의 또 다른 지류인 엥드르강이 흐른다. 여름날 해질녘이면 루아르강을 따라 이 마을 저 마을 고성들 순례에 나선다. 몇몇 성은 아예 하루를 잡아 방문을 하는데, ‘발자크의 집’으로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셰성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이 성 역시 두 번째 방문인데, 처음 방문했을 때 보이지 않던 것이 성문을 들어서자마자 건물 앞뜰에 자리 잡고 있다. 알렉산더 칼더의 대형 모빌작품이다. 사연인즉슨, 미국인 설치 조각가 칼더가 1958년 처음 사셰에 왔다가, 아예 마을에 집을 구입해 아틀리에를 만들어 작업했는데 현재 그곳은 예술가 공동체 레지던스로 시에 위탁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1층 아트숍을 통과해 발자크가 주로 머물던 2층과 집필 공간이었던 지붕 밑 다락방까지 올라간다. 다락방으로는 좁은 나선형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한다. 나는 묵묵히 계단을 밟고 오르다가 벽에 낸 작은 창 앞에 멈춰서서 한 숨 돌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발자크가 ‘고요하기 그지없다’고 했던 그 정원과 숲, 하늘이다. 작가는 왜 넓고 환하고 쾌적한 2층을 두고 지붕 밑 다락방을 창작의 공간으로 삼았던 것일까. 나선형 계단을 밟고 오르고 내리면서 생각했다. 세월이 흘렀으나, 방도 책상도 여전하다. 책상 위, 『고리오 영감』 친필 원고 형태도 그대로다. 나선형 계단을 밝고 내려와 아트숍에서 발자크 커피와 그의 책들, 그의 육필이 새겨진 연필들을 돌아보는데, 옆에서 ‘엘티 피버(L.T. PIVER)가 여기에 있네!’라는 감탄사가 들려온다. 파리에서 향수를 전공하는 청년 K가 최근 찾고 있던 향수가 ‘엘티 피버’라는 것인데, 향수와 함께 발자크의 소설 『세자르 비로토』(1837)가 배경처럼 놓여 있다. 엘티 피버는 1774년에 설립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향수회사 중 하나이다. 이 소설을 쓸 시기 발자크는, 오랜 연인이자 후원자이자 동업자였던 베르니 부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지 1년 후로, 훗날 결혼에 이르는 우크라이나의 한스카 백작 부인에게 열렬한 편지를 보내고, 『잃어버린 환상』의 일부를 발표하고, 이탈리아의 은 광산에 투자하며 사랑과 집필, 사업가로서의 야망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다. 소설 『세자르 비로토』는 1830년대 파리의 조향사 장 벵상-뷜리와 그의 사업장에서 영감을 받아 세자르 비로토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투영한 작품이다. 급변하는 정치, 경제, 사회 체제 속에 한 인간의 과도한 열정과 파괴 과정이 그의 소설 법칙에서와 같이 이 소설의 흐름에서도 중심을 이룬다.

발자크에게 위안과 평온을 주었던 사셰성의 뜰과 나무 

사셰성 발자크의 집 앞 필자


샤토 다르티니(Château d’Artigny)
이번 사셰성 발자크의 집으로의 하루 여정의 동행자는 스물네 살의 청년 조향사 K. 그는 캉드생마르탱의 유서 깊은 향수 아틀리에에서 2개월간 연구차 머물고 있었고, 내가 이곳에 체류하는 주된 이유기도 했다. 발자크의 창작의 산실인 지붕 밑 다락방에서 나선형 계단을 밟고 내려와 ‘투르 지방의 발자크 소설 지도’와 소설 ‘ 『골짜기의 백합』의 지도’를 눈으로 따라가며, 안뜰 참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때 숲의 향기, 참나무 향을 음미하고 있었던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조향사 K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근처에 그가 오랫동안 품어온 성이 하나 있는데, 함께 가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사셰 인근에는 샤를 페로의 동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무대로 널리 알려진 위세성을 비롯 서너 채의 아름다운 고성들이 숨바꼭질하듯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 중 하나인가 했는데, 그가 내비게이션을 통해 안내한 것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샤토 다르티니’라는 이름의 성이었다.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에서 말을 타고 달렸던 길들이 그대로 차도가 되어 차선이 없고 좁아서 달구지 속도로 겨우 숲속의 기나긴 길을 통과해 도착하니 중세 고성들과는 다른 20세기 모던한 양식의 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조향사 K의 안내로 성 내 호텔 레스토랑에서 채식으로 늦은 점심을 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갔는데, 드넓은 홀에 그랜드 피아노가 넓은 창가에 놓여 있었고, 천정 궁륭에는 프레스코화로 한 여인이 한 남성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피아노 옆 이젤에는 흑백으로 그려진 한 남성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성주(城主)인 프랑수아 코티(François Coty)라는 조향사였다. 그러니까 이 성은 프랑스 전국에 퍼져 있는 500여 개의 성 가운데, 루아르 강변 양안에 자리 잡고 있는 80여 개의 성 가운데, 20세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어진 성으로, 조향사의 성이었다. 조향사 K에 따르면, “프랑수아 코티는 향수를 대중 산업으로 발전시켜 현대 조항계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조향사이다. (중략) 코티의 업적은 향수의 대중화에 끝나지 않는데, 대단한 전략가이기 전에 창조적인 예술가이자 조향사였다.” 소뮈르 출신의 불우했던 가브리엘 샤넬이 인근 쉬농소성의 실내 건축 문양에서 이니셜을 본 따 향수의 이름을 영원에 새겼다면, 프랑수아 코티는 향수 산업을 후세의 자본가에게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숲속의 은둔자처럼 이 성에 이름을 새겨 놓았다. 세상에 내놓을 조향사 K의 향수는 가브리엘 샤넬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프랑수아 코티의 창조적 예술혼을 기리고 있는 셈이다.

사셰성 발자크의 집 창작의 산실

발자크와 향수 L. T. PIVER 













페르라셰즈 묘지(Cimetière du Père-Lachaise)

두 달 가까이 루아르 강변 고성 마을에 머문 뒤 파리로 돌아와 찾아간 곳은 19구 페르라셰즈 묘지이다. 파리에서 내가 도서관과 카페만큼이나 자주 찾는 곳이 묘지인데, 그중에서도 몽파르나스 묘지는 단골 카페 들르듯 가고, 페르라셰즈 묘지는 프루스트와 페렉, 발자크의 소설들을 읽다가 홀연히 찾아가곤 한다. 발자크의 집은 프랑스에서 사셰성과 파리의 파시 두 곳에 있는데, 파리에 체류할 때면 페르라셰즈의 그의 묘보다는 이 집에 자주 들른다. 특히 에펠탑이 보이는 뜰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면 문학이 주는 지복인 심적 고요와 충일감을 얻는다. 투르에서 태어나 유년기의 외로움을 혹독하게 치른 발자크는 페르라셰즈 묘지에서 혼자가 아니다. 프루스트가 가족묘에 부모와 동생과 묻혀 있고, 페렉이 납골당 벽에 잠들어 있다. 발자크의 묘는 야망가의 모습 그대로 청동 동상이 옆을 지키고 있다. 그 앞에는 제라르 드 네르발이 잠들어 있다. 프루스트와 페렉, 네르발, 그들은 내게 영원한 청년의 초상으로 남아 있다. 마치 고리오 영감을 페르라셰즈 묘지에 묻어주고, ‘이제부터 파리와 나와의 대결이야!’라고 외치며, 파리 중심을 향해 돌격하듯 문을 나서기 직전의 청년 라스티냐크처럼.

※ 이 글을 위해 Maire de Saché 홈페이지(https://www.sache.fr)와 오노레 드 발자크의 Eugenie Grandet(Le Livre de Poche, Paris, 1972), 『외제니 그랑데』(축약본, 조명원 옮김, 지만지), 『고리오 영감』(박영근 옮김, 민음사), 『루이 랑베르』(송기정 옮김, 문학동네), 『나귀 가죽』(송기정 옮김, 문학동네, 김태형 『나는 네Nex입니다』, 졸저 『먹다 사랑하다 떠나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파리 동부묘지 페르라셰즈의 발자크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