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종연_서울예술대학교 미디어창작과 1년.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
기억에만 의존해서 쓴다. 좋았다. 이곳이 내 공책이라면 좋았다고만 썼을 것이다. 길게 쓸수록 여정은 점점 줄어들고 만다. 영국은 재료가 줄어드는 요리를 최고로 친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영국 셰프의 이름도 고든 램지 뿐이다. 우리는 스테이크를 먹었다. 하루에 한 끼 혹은 두 끼까지도 스테이크를 먹었다. 고기의 맛은 훌륭했고 만족스러웠다. 나는 주로 윗등심 부위를 먹었다. 윗등심 부위는 마블링이 많은 부위가 아니지만 고기 본연의 맛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부위다. 사실 잘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행의 시작은 영국이었다.
첫 번째 스테이크는 피카딜리 서커스였다. 내 메뉴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소심하상 햄버거를 고르고 있었다. 스테이크 취향이 아닌 양 피시 앤 칩스와 햄버거를 먹던 일행들의 모습은 정말 사회적 동물 같았다. 거리에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틀어져 있었다. 사실 처음 숙소로 가는 택시 안에서도 기사는 강남스타일을 안다고 말했다. 택시 안에 김싸이, 신싸이, 고싸이, 이싸이가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지난 학기에 싸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가 술을 마시고 썼냐는 평을 받았다. 영 무관하지는 않게 다음 식사부터는 스테이크를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날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Working Holic과 Walking Holic이 일치되는 순간의 시작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우리는 아마 런던아이와 빅 벤, 웨스트민스턴 사원을 보았을 것이다. 영국 입국 심사장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중년의 흑인 여자가 담당자였는데, 나에 대해 굉장히 많은 의심이 있는 듯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나중에 해리포터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친절하게 웃으며 영국은 처음이냐고 물었고 나는 열 다섯 살 때 와보았다고 대답했다. 십 년 만이었다. 십 년 만의 런던아이와 빅 벤, 웨스트민스턴 사원이었다. 열다섯 때의 나는 한창 중이병에 걸려있었다. 정말 십 년을 돌아 여기에 다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건축물은 여전히 거대했고 우리나라와는 다른 형식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형식에도 미학이 있다는 것을 외국의 건물들을 보고 이해했다. 그러나 갖고 싶지는 않았다. 아름다움만으로 사랑에 빠지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물론 나는 아름다움만으로 사랑에 빠지곤 했지만 그것들은 미학하기라 하기엔 구차한 것들이었다. 대영박물관에도 갔지만 유물들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이미 지나갔으면서도 계속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다음 날 우리는 자신감을 얻었다. 영국식으로 아침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지하철을 탔다. 첼시 홈구장에 가서 사진을 찍었고 기념품 가게를 기웃거렸다. 난 축구를 아주 좋아한다. 다만 첼시의 팬은 아니다. 가장 가까워서 갔을 뿐이다. 첼시 선수들의 유니폼에 적혀 있는 삼성은 그들과 나의 물리적 거리를 아주 강하게 상기시킨다. 삼성맨이 된 느낌이 들어 기념품 가게에서 아무 것도 사지 않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은 자연사박물관이었는데 이것이 정말 자연사가 맞나. 그리고 우리는 헤르미온느를 만나기 위해 킹스 크로스 역으로 갔다. 만약 해리포터에 헤르미온느가 없었다면 나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 헤르미온느가 엠마 왓슨이 되어 나타났을 때의 충격이란 대단했다. 9와 4분의3 승강장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해리포터가 승강장으로 진입할 때처럼 모형 카트가 승강장 밖으로 반쯤 나와 있도록 제작되어 있었는데 사진을 찍는 건 유료였다. 동심은 환율이 높았고 나는 쉽게 동심을 버렸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해리포터 샵에서 헤르미온느의 마법 지팡이를 샀다. 헤르미온느의 지팡이는 삼만 원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 초 챙은 호그와트에 기부입학 했을 것이다. 헤르미온느의 중국산 지팡이를 들고 런던브릿지를 돌아다녔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뮤지컬 위키드였다. 인생 최고의 뮤지컬이었다. 다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뮤지컬이었다. 이런 뮤지컬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영국인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다음 날은 옥스퍼드였다. 별 감흥이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는 입장에서 대학에 무슨 감흥을 느낄 수 있겠는가. 다만 우리나라와는 다른 학제로 일찍 대학에서 누리게 되는 젊음이 부러웠다. 젊음은 도심에 박물관이 있는 이 세계가 폐허이자 허구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보전해준다.
다음 날 우리는 마르세유 프로방스로 갔다. 나는 프랑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바게트를 들고 걷는 사람들, 값 싼 과일들이 좌판에 넘쳐나고 밝은 음악이 거리마다 가득한 나라. 그러나 길에는 사람 만큼 개똥이 있었다. 첫 날은 간단히 시내를 둘러보고 휴식을 취했고 이틀차부터는 본격적으로 걸었다. 그러나 프로방스에는 눈을 끄는 것들이 없었다. 지붕들은 낮았고 외벽에는 낙서가 많았으며 건물은 아름답지만 적막했다. 일요일이었다. 쇼윈도는 모두 거울이나 마찬가지였다. 회전목마를 타며 갑작스럽게 신현준이 되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저녁에는 김혜경 번역가 선생님과 드 크레센조 교수님의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직접 차려주신 한식을 먹으며 각자의 이야기와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에서 시는 일 년에 삼사백 권 밖에 팔리지 않는 죽은 장르라고 했다. 그래서 좋았다. 시가 잘 팔리는 것은 이상하다. 시가 잘 팔린다고 하면 속는 기분이 든다. 시는 분명 희망의 장르다. 그 내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고 해도 그 기저에는 일종의 정화의식과 같은 희망화 과정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개인의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는 타자도 없는 마운드에 등판한 구원투수다. 그것을 나는 작년에 배웠다. 프랑스의 사람들이 더욱 성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각자의 절망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는 프랑스에 다시 돌아와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어와 프랑스어, 영어로 시를 쓰고 번역을 하며 지내고 싶어졌다.
그리고 곧 찾아온 사흘차. 우리는 세잔 아틀리에에 갔고 건물과 햇빛이 너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지만 세잔은 그곳에 없었다. 세잔 아틀리에는 세잔의 빈 집이었다. 그 역시 무너지지 않는 폐허였다. 우리는 그 폐허에서 한참을 앉아 쉬었다. 점심식사로는 에밀 졸라가 자주 갔다는 레스토랑에 갔는데 스테이크를 졸라 태워서 줬다. 에밀 졸라는 몸이 작고 약해서 덩치가 컸던 폴 세잔느가 많이 지켜주었다고 한다. 그 레스토랑에 나의 폴 세잔느는 없었다. 우리는 잠시 휴식한 후 마르세유 대학의 한국어학과 학생들을 만났다. 내 작품을 소개하는 동안 집중하는 프랑스 학생들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그 학생들은 한국 문학과 더불어 한국어 자체를 사랑한다고 했다. 학생들이 한국말을 듣는 걸 좋아한다는 김혜경 선생님의 말씀처럼 나의 말들이 분절화되어 학생들 사이를 떠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언어를 배우기 전 모든 말과 사물은 얼마나 경외롭고 가능성에 가득 차 있었는가. 아무런 이해도 요구하지 않는 언어의 질감은 이제 내가 다시 감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부러웠고 대담 이후 이어진 개별 대화에서도 많은 학생들과 각자의 모국어로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었다.
이후 우리는 파리로 이동했고, 개선문과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 에펠탑을 이틀에 걸쳐 보았다. 아니 여행은 쇼핑이지라던 장근명 대리님의 말대로 이틀에 걸쳐 돈을 모두 썼다. 그동안 우리는 돈독해졌고, 파리 한복판에서 한국에서의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다행히 그것은 술약속이었다. 밤마다 마신 맥주들과 결국 각자의 속사정으로 귀결되고 마는 문학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쾌했고 때로는 경건했으며 그 끝에는 언제나 깊은 잠이 있었다. 나는 여행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여행을 생각할 때면 항상 여행에 동행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떤 여행은 우리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고 한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여행은 계속 이어진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떠나게 될 것이다. 어딘가 나의 자리를 마련해두고 나를 오래도록 기다려주고 있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