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신윤희_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3년.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자
짧지만 깊은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한 기분이다. 누군가의 삶을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게 되는 강렬한 순간이 있다면, 내게는 이번 유럽문학기행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국내여행조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내게 이번 유럽문학기행은 생애 첫 여행이었다. 지극히 상투적인 말이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차가운 물에 살결을 닿은 아이가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내가 모르는 물 밑에 놓인 것들이 막연하고 두려웠다. 나는 여행 내내 나를 감싸고 있는, 수심을 알 수 없는 차갑고 맑은 물의 흐름 속에 온 몸을 맡기기도 했고, 때로는 그 물 속에서 오랫동안 고여 있으면서 낯선 한기를 느끼기도 했다. 10박 11일의 모든 순간동안 나는 차갑고 맑은 물속에 잠겨있었다. 깊은 강바닥에서 숨을 참으며 빛나는 사금을 주워 올리듯, 여행의 아름다운 순간은 그렇게 왔다.
1. 낯선 시간
히드로 공항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영국은 한낮, 오후 2시였다. 아마 한국에서였다면 지금쯤 나는 하루를 마감한 후 깊은 잠을 자고 있었겠지. 하루를 더 벌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몸은 낯선 시차에 힘겹게 적응해야만 했다. 나는 한국에서 잠들어 있는 내 몸을 억지로 빌려와 영국 땅 위에 간신히 서 있었다.
반 쯤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기분으로 걷는 와중에도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웅장하고 우아한 건축물들이 곳곳에 있었다. 건물들의 낡은 외벽에는 세월이 주는 우아한 풍화가 그대로 느껴졌다. 오래된 풍경들은 그 자리에서 간직해온 온화함으로 여행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2층 버스를 타고 런던의 거리를 지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와, 하는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풍경 바깥에 있었다. 2층 버스의 유리창만큼 투명한 간격으로. 한국에서의 나는 내가 보는 풍경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내가 보게 될 풍경들은 모두 다 나를 스쳐 지나갈 것들이었다. 나는 내가 보는 풍경 안에서 살 수 없으며, 살면서 다시는 이 거리를 볼 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거리와 건물들과 동상들이 풍경의 일부가 아니라 개개의 하나하나로 나를 압도하며 치고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전부 기억하고 싶었다. 거리 속으로 녹아들어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풍경과 일 대 일로 마주보며 서 있고 싶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이방인의 감정을 느꼈다. 그렇기에 이방인은 언제나 기록자로 남는 것일까. 다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히 기억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내 시야에 걸리지 않은 것들까지 전부 다. 내가 언제든지 이곳을 떠나갈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돌이켜보면 여행이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기억은 하되, 그것들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는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둘째 날은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영국의 여러 관광지들을 돌아다녔다. 빅벤, 국회의사당, 버킹검 궁전 앞, 코벤트 가든, 대영박물관 등등 갈만한 곳들은 거의 다 돌아다녔다. 특히 깊은 인상을 주었던 곳은 대영박물관이었다. 사실 대영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시차적응이 안된 터라 몹시 피로했었다. 관람객용 의자에 앉아 유리벽 안의 오래된 유물들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 그저 바라보았다. 박물관 안의 모든 것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멈추거나 죽은 것들이었다. 오래된 유물과 죽은 미라, 화석들은 몇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에도 자신들의 의미 있는 한 순간을 붙잡아 둔 채 아주 길게 늘이고 늘여 대영박물관까지 오게 된 걸지도 모른다. 늘 그 시간 속에 멈춰 있는 것이다. 박물관 안의 시간과 박물관 바깥의 시간은 또 다르게 흘러간다. 한국의 시간과 영국의 시간, 박물관 안과 박물관 바깥의 시간, 여러 빛깔의 시간과 시차들이 중층적으로 몸 안에 쌓였다. 나는 어느 시간에 속해야 할지를 모르는 채로 걸었다.
천천히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발견한 곳은 대영박물관 내에서 시계를 전시하는 공간이었다.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명징해져서 그 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시계바늘은 움직이고 있었다. 여전히 판 위의 시계 구슬은 굴러가고 있었다.―시계의 구슬이 판을 다 도는데 약 30초 정도가 걸렸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재는 시계였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와중에도 그것들은 조용히, 아주 오랫동안 움직이고 굴러갔다. 어쩐지 영원을 훔쳐본 것만 같아 다시 한 번 작게 탄성을 질렀다.
2. 낯선 몸
런던의 찬바람과 시차적응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다음날 심한 몸살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그 전날 저녁에 대담을 가진 작가 벤 오크리가 내 건강을 걱정해 줄 정도였다. 국내에서도 감기를 달고 사는 편이었는데 집에서 아픈 것과 타지에서 아픈 것은 그 결이 조금 달랐다. 증세는 똑같았지만 그 병을 받아들이는 몸이 달랐다. 단순한 감기몸살일 뿐이었는데도 몸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부끄러움, 이상한 향수와 서러움이 섞여서 내내 우울했다. 다행히 그 날은 자유 일정이었다. 함께 여행 온 일행들은 모두 외출했고 나는 텅 빈 숙소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잤다. 느즈막히 잠에서 깨 보니 어느 새 늦은 오후, 4시였다. 약을 먹고 잠든 터라 감기기운은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몸은 살짝 열에 들떠서 몽롱했다. 사위가 조용했고 창문가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천천히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을 오래 보았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산책을 나갔다. 멀리까지는 가지 못하고 집 앞의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셨다. 내 옆에 앉아있는 남자는 천천히 오래 밥을 먹었다. 나는 천천히 오래 핫초코를 마셨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내 머릿속의 모든 잡념들이 씻겨 내려갔다. 그 날 내가 장근명 대리님께 했던 말을 빌리자면 어디 가서 뇌를 씻고 온 기분이었다. 카페에서는 내가 모르는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흘렀고 밥을 먹고 있는 남자와 카페의 여주인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여행지까지 미련하게 싸들고 온 사소하지만 무거운 잡념들과 개인적인 고민들, 한국에 두고 온 시간과 영국에서 머물고 있는 시간 사이의 간극, 그 틈에서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빌려온 것 같은 내 몸에 대한 감각까지도 그 순간에는 모두 내가 모르는 노래를 가볍게 듣듯이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런 힘이 생겼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듯이 나도 그렇게 흔들렸다.
이곳에는 온전히 나 혼자였고 숱한 고민들과 관계들 틈에서 발붙이고 서 있지 않아도 좋았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누군가가 나를 흔들기 때문에 흔들렸다. 내가 맺고 있는 어떠한 관계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흔들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홀로 흔들릴 수 있었다. 홀로 있었기 때문에, 홀로 흔들릴 수 있었다. 내 안에서 흔들리는 내 몸과 같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채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핫초코를 마시면서.
3. 낯선 말
안타깝게도, 정민 오빠가 사람이 붐비는 런던 지하철에서 그만 발목을 접질리고 말았다. 정민 오빠가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우리는 기차를 타고 런던을 나가 옥스퍼드를 가볍게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영국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다음 날 테제베를 타고 프랑스의 마르세유를 거쳐 액상 프로방스로 이동했다.
액상 프로방스에서 우리는 ‘드 크레센조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 드 크레센조 교수 부부 내외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입에 잘 맞지 않던 영국 음식 때문에 고생하던 우리 일행들에게 한식을 대접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 순간만큼은 김혜경 선생님을 ‘프랑스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었다.
한국 문학 출판 및 번역에 힘쓰고 있는 드 크레센조 선생님과 김혜경 선생님과의 대담은 내게 ‘번역’이라는 화두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 온 이후, 외국인과의 몇 번의 대화 (그들에게는 내가 외국인이었겠지만) 끝에 기가 죽은 나는 농담 삼아서 ‘옛날 사람들은 왜 바벨탑 따위를 만들어서 날 이렇게 피곤하게 만든 거야.’라고 이죽거렸던 적이 있었다. 장근명 대리님께서는 김혜경 교수님께 지나가는 말로 ‘번역은 실패의 예술이라고 하더라고요.’ 라고 말했다. 나는 장근명 대리님의 말에 깊이 동감했다. 오래 전 바벨탑 쌓기에 실패한 사람들의 말이 제각기 갈라져 지금까지도 불통하게 되고 말았듯이, 번역 또한 매번 차곡차곡 쌓은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혹은 스스로 무너뜨려야만 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또 다시 불통 앞에 마주서게 되어야만 하는 실패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패의 일화에서 이상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프랑스에 최초로 번역된 한국문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했다. 드 크레센조 선생님께서는 검색을 한 후, 작자 미상의 ‘향기 나는 봄’이라는 작품이라고 알려주었다. 향기 나는 봄? 우리나라 작품 중에 그런 것이 있었나? 서로 의아해 하며 질문하고 있는 도중에 장근명 대리님이 엄청난 현답을 내놓았다. “춘향이지 뭐.” 아, 춘향! 향기 나는 봄! 세상에! 우리 모두는 장근명 대리님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나는 ‘춘향’이라는 이름과 ‘향기 나는 봄’이라는 문장을 천천히, 입 안에서 굴려본다. 분명 ‘향기 나는 봄’은 ‘춘향’에 대한 일종의 실패한 번역이지만, ‘향기 나는 봄’이 ‘춘향’과 겹쳐지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흔하게 들어온 ‘춘향’이라는 이름에서 정말로 이상한 향기라도 맡게 된 것처럼 마음이 간지럽다. 마치 무너진 탑의 돌 틈에서 작게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발견한 느낌이다.
그 다음 날은 프로방스 대학 학생들과의 간담회가 있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나 문학에 대한 열정, 진지하고 깊은 생각들은 굳이 번역을 통하지 않더라도 내게로 생생히 전해져 왔다. 특히 내 소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많은 관심을 가져준 것 같아 몹시 쑥스럽기도 했다. (내 부족한 졸고를 번역하느라 고생하신 한지희 번역가님께 감사드린다) 때문에 내 소설이 정말 불어로 번역된다면 어떨까? 하는 약간은 헛된(?) 망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은 부끄럽다. 벤 오크리를 만날 때에도, 프로방스 대학 학생들을 만날 때에도 나는 늘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마음이 많이 약해지고는 했다. 특히 프로방스 대학 학생들과의 만남과 그들과 함께 나눈 대화 이후로 나는 내가 쥔, 그리고 앞으로 쥐게 될 펜의 무게를 어느 정도 실감했다. 언제부턴가 내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나, 내게 주어진 이름들을 정말로 가져도 되나.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던 것 같다.
여행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평소의 1/10 정도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향수와 우울함, 평소에도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처리해야만 하는 공식 일정들에 대한 압박감 같은 것들이 말문을 닫게 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낯선 나라와 낯선 언어가 주는 격리감과 고립감이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침묵 속에서 다정한 무관심 같은 것을 느꼈다. 한국에서는 모국어를 쓰면서도 내가 ‘이방인’이구나 라는 사실을 느낄 때, 그리하여 침묵해야만 할 때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는데,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혼자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나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이방인’이라는 이름 아래 들어와 있다는 기묘한 소속감까지 느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이방인의 시간 동안 처음으로 내 안에서,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 틈에 치여, 타인의 눈치만 보고 사느라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비로소 혼자가 된 이 순간에야 나는 내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런데 혼자가 된 나는 아주 낯선 언어로 낯선 나라의 말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나라의 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말은 내가 나에게 불러주는 이상한 노래 같기도 했고, 쓸쓸하지만 다정한 위로 같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낯설어서 나는 외로워졌다. 여행 내내 몸 안에서 낯선 이방인의 말을 키웠다. 어떤 말로도 번역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4. 낯선 방
나는 ‘방’이라는 공간을 유난히 좋아한다. 나는 휴일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 집에서도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위 ‘집순이’인 것이다. 여행 내내 정민 오빠와 집,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정민오빠가 집! 이라고 외치면 나는 자동으로 보라색 극세사 이불! 이라고 외쳤다. 나는 지금 그 보라색 극세사 이불을 덮고 누워서 배 위에 넷북을 올려놓은 채 이 기행문을 쓰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특별히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방’이다. 액상 프로방스에서 세잔이 쓰던 아틀리에에 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세잔이 쓰던 그 방안에서 주어진 시간 안에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을 다 보려고 노력했다. 사물과 눈높이를 맞추고 한참을 서 있기도, 쪼그려 앉아있기도 했다. 30분이 넘게 그 작은 방 안에 있었다. 한 사람의 생활감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공간을 나는 사랑한다. 세잔이 앉았을 의자와 그가 누웠을 침대, 그가 입었을 옷의 윤곽, 그가 몸을 녹였을 난로와 그 난로를 지피는 불씨에 대한 상상을 토대로 나는 살아있는 한 사람을, 그가 사랑했을 사람들까지도 천천히 그려내 본다. 눈을 감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만져보듯이. 나는 사실 화가 세잔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자신의 ‘방’을 가지고 있던 세잔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방과 그 안의 정물들을 유난히 즐겨 그렸던 세잔이, 이 방에서 죽어갔을 세잔이 왜 그리도 애틋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세잔의 아틀리에에서 나오는 길에 내가 본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엽서를 모조리 사들였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방에만 있느라 돈을 거의 쓰지 않던 내가 엽서에만 10유로를 넘게 썼다.
지금 나는 한국의 내 방,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 모든 사물들이 내 신체처럼 느껴지는 내 방에서 기행문을 쓰고 있다. 나는 내가 지금 보라색 극세사 이불을 덮고, 이 기행문을 다 쓴 후 낮잠을 잘 수 있는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긴다. 열흘 동안 마음을 주지 않는 연습을 하다가 이제 내 마음이 사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살면서 가장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으니 한동안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나도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가끔, 아주 못 견디게 그리워 할 것이다. 내가 짧게 머물렀던 그 방들을. 영국 써더크 역 근처에 있던 우리의 첫 숙소, 창문 밖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보였던 그 방. 프랑스 액상 프로방스의 조용하고 한가로웠던 방. 까무룩 잠들기 전 눈 틈새로 스미던 스탠드 등 불빛과 침대에 엎드려 늘 책을 읽고 있던 룸메이트 지혜 언니의 옆모습.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대화가 있었던 드 크레센조 선생님과 김혜경 선생님의 방. 문득 올려다 본 액상 프로방스의 밤하늘에 쏟아질 것 같이 빛나던 별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검은 커튼을 젖히면 고요히 태동하던 샹젤리제의 새벽 풍경들.
마지막으로 여행 내내 나와 함께 같은 방을 쓴 사람들, 여행을 함께 한 친구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우리가 낯선 방에서 함께 나누었던 음식과 대화, 기억들이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하는 문학의 길에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또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대산문화재단과 여행 내내 정말로 고생 많이 하신 장근명 대리님께 죄송한 마음과 더불어 깊은 감사를 전한다.

| 번호 | 기 행 문 | 글쓴이 | 조회 |
|---|---|---|---|
| 6 | 대산대학문학상 유럽문학기행 기행문 | 고정민 | 9355 |
| 5 |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해외문학기행문 | 김종연 | 10983 |
| 4 | 개구리 우물 밖을 엿보다 | 김지혜 | 9484 |
| 3 | 낯선 꿈을 꾸다 | 신윤희 | 10256 |
| 2 |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 염동규 | 9864 |
| 1 | 핵꿀잼이었다. | 이현우 | 10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