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현우_경희대학교 아동가족학과 3년. 제13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수상자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며칠 뒤면 우리도 유럽을 추억이라 말하겠지. 눈에 담은 장면들은 문명을 따라갈 수 없으니 사진보다 엉성하게 각자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 추억할 것이고. 아쉽게도 너희와 나 모두가 명색이 글로 누린 영광인지라 이 자유로운 기행문에서 조차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니, 어떤 이는 혹은 우리 중 누구는 각자의 기행문을 읽는 와중에도 서로의 문장과 기교를 맞대 보겠지. 곱씹어 보면 아무리 장르가 달라도 우린 넓은 의미의 경쟁자구나.
처음 영국에 도착해 피카딜리 서커스에 갔을 때가 기억난다. 가장 엄마 같을 줄 알았던 77년생 김지혜 여사님이 길을 잃었지. 키도 조그만 해서 한 20분 정도를 찾았나? 12시간의 긴 비행 끝에 겨우 식당 앞에 도착해서 다시 광장에 돌아가 누나를 찾으러 갔을 거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 누가 알았겠니? 지혜 누나가 길 잃어버리는데 선수란 사실을. 나중가선 우리 모두 그러려니 했지 아마.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와중엔 입이 다물어 지질 않더라.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즐비하던 광장을 보며 참 아름다운 나라라 느꼈지. 그런데 생각보다 무단횡단과 신호위반을 밥 먹듯이 하는 걸 보니 놀랍더라. 대한민국이 세상 제일 후진국 의식으로 사는 줄 알았는데 영국에 비하면 우린 엄청난 질서의식을 가지고 살아간 다는 걸 느꼈지. 하긴 여기처럼 좁고, 인구밀도 꽉 찬 나라에서 신호마저 안 지키면 바로 비명에 가겠지.
우린 참 어색했어. 한 이틀째 되는 날까지 서로 존댓말을 했으니. 윤희와 동규는 거의 끝날 때 까지 존댓말을 했고. 나는 정민이를 자꾸 동규라 불렀는데 나중에 잠들기 전에 정민이가 ‘현우야 난 정민이야.’라고 한 마디 하더라. 그래도 난 끝까지 정민이를 종민이 또는 동민이라고 불렀던 걸로 기억해.
서로 말을 편하게 할 때 쯤. 우린 아마 각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을 거야. 동규는 샤워를 참 오래 했지. 샤워하러 들어가면 기본으로 3~40분쯤은 걸렸지? 대리님까지 합쳐 남자는 다섯 명, 화장실은 한 곳이었는데 지금 떠올려 보면 가위, 바위, 보를 목숨 걸고 한 것 같다. 특히나 동규 뒤에 순번이 걸리면 아무리 2등으로 샤워 할 수 있어도 한 40분 정도는 아무것도 못했지. 내 생각엔 분명 한 번 이상은 반신욕도 했을 거야. 더욱 재미있는 건 그렇게 열심히 씻어 놓고선 샤워하고 나올 적엔 그날 신었던 양말에, 신발을 신고 나왔지. 정민아 동규 얘기로 희곡을 쓰면 적어도 10만 관객은 가능하지 않을까?
벤 오크리를 만나기전, 우린 아침에 여러 가지 계획들을 세웠지. 나는 나이지리아의 특수한 역사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말했고 종연이는 굶주린 길이란 작품 자체가 상당히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는데, 성경에서 많은 모티프를 따왔을 수도 있으니 이에 기반을 두어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말했지. 그러면서도 우린, 절대로 인터뷰가 우리가 의도한 방향 그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란 걸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욱 예견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당황하기도 했지.
벤을 초대한 한식당은 노래방 기기가 갖추어져 있을 만큼 시끄러웠고, 우리 옆 테이블의 영국 남녀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느라 뜨거워져서 주위가 보이지 않았나봐. 문단의 어르신들은 우리가 따온 인터뷰만 보겠지, 이런 뒷얘기는 아마 상상도 못할 거야. 옆 테이블의 영국 남녀들, 꼭 결혼까지 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영국의 마지막 일정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관광하던 날. 정민이의 다리가 부러졌지. 다리가 부러져 슬픈 짐승 정민아! 도대체 무슨 패기로 유럽을 동네 마실 쯤을 생각했던 거니. 우리 모두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데 저 혼자 크로스백 하나 메고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참 슬퍼 보이더라. 결국엔 내 캐리어에 짐을 올리고 몇 번이고 끌어 달라 부탁했지. 아주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사라질 적마다 ‘현우야 어디 갔었어? 자꾸 도망 가지마.’ 하는 모습이 절대 농담처럼 들리진 않더라.
프랑스 병원에서, 금간 게 아니라 아주 부러져 버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 네 특유의 표정이 상상이 간다. 너무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리얼리? 했다던 네 표정이.
그래도 네 덕에 김혜경 선생님께 초대된 날 우린 한식을 먹을 수 있었지. 정말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가 아직도 그 고마움이 잊히지 않는다. 드 크레센조 출판사는 참 아담했지. 나는 나중에 정말 멋진 작품을 써서 그곳을 열배, 백배 풍성한 출판사로 선물해드리고 싶더라. 내가 선생님께 5년만 기다려 주시면 여길 열배, 백배로 키워드리겠습니다 라 말했지만 5년 뒤에 나는 내 한계를 깨닫고 한 가정의 어엿한 가장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내가 할 수 없더라도 우리 중 누군가에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고.
프로방스대학 동아시아학과 학생들과의 만남도 잊을 수 없다. 그들이 쏟아내는 질문도 참 인상적이었지만 우리들 사이에서 맴돌던 참 오묘한 긴장관계가 더욱 인상적이었지. 지금 돌이켜보면 정민인 참 비극을 희극으로 표현하는 재주가 뛰어 난 것 같다. 대담이 끝나고 각자 자유로운 질문을 하라 했을 때, 과연 그것이 누구한테 하는 질문인가가 우리를 꽤 긴장하게 만들었을 거야.
소설을 쓴 윤희는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무수히 많은 질문을 받았지. 이리 저리 불려 다니고, 이 질문 끝나면 저 질문 들어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이더라. 그 모습이 어찌나 부럽던지.
정민이와 종연이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너희들의 분야가 조금 어려웠나보더라. 질문이 없었지. 종연이는 자신더러 마치 동사무소에 앉아 있는 직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이라 말했고 정민이는 자유와 인권의 나라 프랑스에서 사람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고 푸념 아닌 푸념을 했지. 그런 상황에선 오히려 고개를 숙이면 안 되고 더욱 당당히 있어야 한다 말하는 너의 표정을 보고 거의 기절할 뻔했다.
아쉬운 대로 우린 그날 밤 맥주 한 잔 들이키며 과연 태초에 희곡이 먼저 일까, 시가 먼저 일까에 관한 열띤 토론을 벌였지. 정민이와 동규는 극구 희곡이 먼저라 말했고 나와 종연인 시가 먼저 일 것이라 말했지. 내가 왜 태초에 시가 있었나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지. 사람은 먼저 자신의 기분을 그림으로 표현했을 것이고 그 그림은 문자가 되고 그 문자는 한편의 시가 되었을 것이라고 그러자 정민이는 그런 식으로 올라가면 무조건 희곡이라고,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춤을 출 것이고 그러다 보면 하나의 연극이 만들어져 결국엔 희곡이라고. 우리의 토론을 듣고 문단의 어르신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의 토론은 의견이 갈렸지만 그날 밤 대리님의 모습에 대해선 한 마음으로 같았을 거다. 우리랑 어떤 목적지를 향해 걸을 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묵묵히 길만 걸으시는 분인데 그 날 밤 드 크레센조 여자 관계자 분들과의 저녁 만찬에선 어찌나 상냥하시고 나긋나긋 하시던지. 대리님이 어떤 여자 분에게 누나라고 장난삼아 불렀던 게 우리에겐 참 큰 충격이었지. 저분이 저런 분인가?
참 아무리 떠올려도 즐거운 여행이었다.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 글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귀국하는 비행 중 내내, 겨우 받게 된 문단의 이 작은 관심도 이걸로 끝이구나 하는 잡념 때문에 괴로웠지만 여행은 참 즐거웠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며칠 뒤면 이 모든 것이 또 추억이 되겠지. 이 멋진 여정의 마무리를 빈말로 끝맺고 싶진 않다. 서로 자주자주 연락하며 오랜 우정 함께 하자고 말 못하겠다. 저마다 삶의 방식이 있으니 만날 일이 있다면 또 만나겠지. 그땐 또 서로 어색해서 존댓말부터 하려나? 기왕 그럴 거면 서로 아주 엄청난 인물이 돼서 만나자. 각자의 분야에서 장인이 되어 서로 아주 어려워 할 정도의 인물이 돼서 만나자. 그러면 다시 존댓말부터 써도 억울하지 않으리.
-핵꿀잼 추억을 선물해준 재단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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