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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대학문학상 유럽문학기행 기행문
작성자 윤재민
날짜 12.03.07 조회 9488

글 / 윤재민_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자. 1985년생 



새로 산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았다.
 얼굴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섯 명의 수상자들과 최종원 대리님, 장근명 담당자님과 함께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에 올랐다. 열한 시간의 비행 내내 우리는 떨어져 앉아 허공 팔천 미터 상공을 배회했다. 다시금 땅에 발을 딛고 서자 서먹했던 그들이 조금은 낯익어 보였다. 프랑크푸르트 공항. 여행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숙소로 가기위해 거쳐 간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을 잊을 수 없다. 도심 한가운데라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좁은 도로와 좁쌀만 한 신호등. 분명 모든 게 생경한 공간이었지만 왠지 낯이 익었다. 여행 내내 함께한 일행들의 표적(?)이 된 아이패드를 꺼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게걸스레 채집하여 숙소로 돌아와 이물감 속에 감춰진 기시감을 더듬거리다보니 열 몇 시간의 노곤함이 온 몸에 퍼지며 스르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게 된 것은 독일에서의 여정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쯤이었다.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비밀로 하고 싶다.
 독일에서의 클라이맥스는 '궁전'이었다. 번역가 노선정 선생님과 페터 슈나이더 작가는 아직 청맹과니에 불과한 우리의 설익은 질문과 대답에 성실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내주셨다. 구석에 자리한 나는 고개를 빼물고 두 선생님들의 눈과 입에 집중했다. 분단체제, 북한문제, 통일, 삼대세습. 듣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이야기였건만 두 분은 행여나 내가 고개를 돌릴세라 커다란 눈망울로 이야기 중간 중간 시선으로 나를 채근했다.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고 결코 고개를 돌리지마라, 선생님들의 눈빛이 내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언젠가 두 분 앞에 다시 서게 될 날이 온다면 내가 받았던 이 좋은 시선과 자극을 당당히 되돌려드리리라.
 파리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든 아프리카계 이민자들과 아랍인들, 더러운 거리, 무질서함. ESPN에서 즐겨 시청하던 티에리 앙리의 말끔한 육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까이서 본 에펠탑과 개선문, 오르셰 미술관의 위대한 미술품들은 너무나 선연하여 사진 속 이미지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독일과는 사뭇 다른 기시감.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을 목표로 한 여행객이 아니라면, 파리는 어떤 식으로든 여행객들에게 실망감을 안길 도시 같았다.
 액상프로방스에서의 며칠은 파리에서의 실망을 보상받기에 충분했다. 한국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낙후한 캠퍼스에서 만난 액상 프로방스 대학 학생들과의 교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답하는 우리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놀라운 경험. 청맹과니들의 설익은 말들을 아름답게 통역해주신 김혜경 선생님과 장 클로드 선생님과의 만찬은 프랑스, 아니 이번 여행의 클라이맥스였다. 허심탄회한 두 분의 환대 가득한 사려에 그간의 여독이 눈 녹듯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여행 내내 뻣뻣하고 어리숙하던 시인이 어른이 되었던 게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훌륭한 어른과의 만남을 통해 아이는 성숙을 도모한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 또한 시인과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날 밤 액상 프로방스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삼년 만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의아했다.
 굳은 날씨만큼이나 까칠했던 영국에서의 입국심사. 심사관의 딱딱 떨어지는 냉정한 영국식 영어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입국심사장을 벗어났다.
 대체 누가 영국음식을 맛없다고 했던가. 갑작스럽게 발생한 숙소문제로 기약 없이 서성이는 동안의 공복이 미각을 마비시켰던 것일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극심한 공복이 조미료는 됐을망정 이십 몇 년을 동고동락한 미각을 통째로 배반하진 않았을 게 확실하다.
 이층버스라는 생소한 시점에서 감상하는 런던 시가지는 모든 게 그럴듯해 보였다. 그간 사진 속에서만 보던 피카델리 서커스나 토튼햄을 하염없이 맴도는 것만으로 흐뭇한 기분. 백여 년 전 자신들의 영광을 그대로 간직하고자 하는 런더너들의 과도한 정성이 그대로 묻어난 거리는 어찌됐든 그들의 정성에 값하는 것처럼 이방인에게 전해졌다.
 모든 것이 알리바이이자 트릭인 셜록 홈즈 박물관. "여기 있는 누군가는 분명 셜록 홈즈가 실존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라는 미국인 관광객(확실하진 않다)의 조롱 섞인 농담이 울려 퍼지는 곳. 미국인 관광객의 농담은 내게 언제나 틀린 해답을 늘어놓는 것으로 셜록 홈즈의 추리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왓슨의 말처럼 들렸다.
 뮤지컬 빌리 엘리엇의 무대 또한 잊을 수 없다. 자아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마다 부지불식간에 무대 위로 솟구쳐 올라 빌리의 내적 고립을 극대화하는 빌리의 다락방, 극 초반 공권력과 광산노조의 겯고 틈을 아름다운 군무로 승화한 엘튼 존의 'solidarity'는 뮤지컬의 너무 이른 절정이었다.
터무니없는 규모의 대영 박물관, 빅 밴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히드로 공항으로 떠밀려 인천으로 향해야만 했다. 어느새 새로 산 신발이 내 발처럼 느껴졌다. 그간 누구 하나라도 잃어버릴라 꼭꼭 붙어 다니던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낯설어 마음이 뻐근했다.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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