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경민_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 4학년.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자. 1988년생
어릴 적 나는 늘 같은 아이스크림만을 고르는 아이였다. 친구들이 냉동고 안 가지각색의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릴 때 나는 제일 빨리 언제나 먹던 것을 골라 계산대 위에 올려두고는 했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익숙한 단맛은 지루할지언정 질리지는 않았다. 사람의 기질은 쉬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십대의 중턱에 발을 올린 지금도 별다를 것이 없다. 변화보다는 안정을,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찾는 나였다. 때문에 당선 소식을 듣고 십년 넘게 서랍에 처박아 두었던 낡은 여권을 펼쳤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찡그리고 있는 열네 살의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진 속에서조차 웃지 못했던 우스꽝스러운 얼굴이었다.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마지막 계절 학기를 수강하고 나니 어느새 여행은 다음 주로 다가와 있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짐을 꾸리고 하릴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열 세 시간의 비행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한 후 비행기에서 내리기까지 대기해야 했던 20분 남짓이었다. 그 때 나는 고등학생 때 읽었던 전혜린의 에세이를, 열여덟의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육아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여성이 아이를 낳고 기르며 느끼는 경이와 환희는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우울한 인상을 마음 속 깊숙이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일이란 나라는 그러한 우울과 뒤섞여 나는 무의식중에 내가 독일에 발을 디딜 일은 없으리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전혜린의 에세이 첫 장을 펴자마자 나오는 뮌헨의 하늘을 묘사한 표현처럼.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그러나 그러한 예감은 무참히 깨지고, 스물다섯의 내가 낯선 독일의 거리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둔탁한 회색빛 대신 상쾌한 어둠이 하늘을 감싸고 있는 것에 일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독일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은 잘 정돈된 나라라는 것이다. 건물들은 대체로 낮았고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그랬지만 고전적인 건물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에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나와 일행들은 여독도 잊고 사소한 것 하나 하나에도 소란하게 굴었다. 프랑크푸르트의 아침을 보고서야 비로소 타지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던 것이다. 날은 그리 춥지 않았고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대문호 괴테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꾸민 괴테하우스가 그 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위대한 작가의 흔적 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 나는 평범하게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재적인 경험이라는 면에서 더없이 특별한 감동이기도 했다.
다음 날 베를린에서 우리는 번역가 노선정 선생과 함께 독일의 저명 작가 페터 슈나이더를 만났다. 긴장하여 굳어 있는 어린 작가 지망생들을 바라보는 그의 파란 눈에는 미소가 스며있었다. 분열된 독일을 날카롭게 고찰하여 명성을 얻은 작가인 만큼 그는 한국의 분단 상황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미래에 대해 자신의 눈 안에 품고 있던 미소만큼 밝은 희망을 내보였다. 만남 이후에는 당연한 수순처럼 베를린 장벽을 찾았다. 우리는 벽을 사이에 두고 어느 쪽이 동독이고 서독일지 한참을 이야기 했다. 장벽의 끝에서 나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이미 벽이 무너진 마당에 어느 쪽이 동인지 서인지가 왜 중요한가. 우리는 이미 재고 가르고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가슴이 따끔했다.
웅장함에 절로 입이 벌어졌던 베를린 돔을 뒤로 하고 우리는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을 떠나 지하철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현기증에 휩싸였다. 독일에서 보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의 물결이었다. 파리의 지하철은 사람이 많고 복잡하다는 것에서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었지만 그만큼 정갈하진 못했다. 나는 금방 겁을 집어 먹었다. 그러나 파리에도 이내 아침이 왔다. 비가 내려 창백한 얼굴을 한 아침이었다. 그 날은 강행군이었다. 오르세 미술관, 노트르담 성당, 파리 시청, 퐁피두센터, 콩코드 광장, 샹젤리제에 이르기까지 다리를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본디 움직이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인간이다. 때문에 여행의 때때로 나는 내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토록 걸을 수 있었나? 내 다리가 이렇게 튼튼했나? 내 몸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순간이 이렇게 즐겁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테제베를 타고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했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두웠다. 파리와 확연히 다른 아담하고 차분한 도시였다. 그 아늑함이 마음에 쏙 들었으나 그날 밤은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있을 엑상프로방스 대학 학생들과의 간담회 때문이었다. 그들을 위해 준비한 어설픈 불어 자기소개를 다 주워 삼키기도 전에 나는 어느새 80여명 남짓한 이국의 청년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아득해졌다. 그러나 나의 희곡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이크를 쥐고 일어섰을 때, 그리고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문장이 김혜경 교수의 입을 통해 불어로 낭송될 때 나는 처음으로 그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개인이 아닌 작품으로서 누군가의 앞에 서기 위해서 이제껏 글을 써 왔구나 하고.
마지막은 언제나 돌아보기 무섭게 성큼 다가와 있는 법이어서 종착지인 런던의 문 또한 그리도 쉽게 열렸다. 하지만 런던은 아쉬움도 걷어버릴 만큼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깔끔하면서도 발랄했고 인파가 거셌지만 눅눅하지 않았다. 회색의 도시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런던에 머문 사흘 내내 감사하게도 하늘이 높았다. 우리는 빨간 이층버스를 타고 온 도시를 누비며 지치지도 않고 웃었다. 빅벤과 런던 아이가 잠겨 있는 푸른 하늘에 우리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만이 맴도는 것처럼 착각할 만큼.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 밤, 나는 런던의 뮤지컬 극장 한 구석에 오롯이 앉아있었다. 이윽고 무대가 암전되었다. 몇 천 번 마주친다 해도 영원토록 나를 설레게 만들 어둠이었다. 이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좋은 극을 보았을 때 치밀어 오르는 그 감정들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내 생애의 마지막 극을 썼을 때, 그 무대 위에서 오늘을 되새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런던에서의 사흘은 놀랍도록 짧았다. 이상한 일이다.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던 얼굴들과 웃음소리와 시답잖은 농담들 그리고 거센 바람을 피해 서로의 등으로 웅크리던 순간들 따위만이 스냅 사진처럼 생생할 뿐 거리의 풍경들은 아득한 저 너머에 위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너무도 빨라서 그 끝을 내 기억이 잡아채지 못한 것일까? 하지만 그렇기에 내게는 런던이 제일 아름답다. 극장 안, 단지 내가 극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저희들 중 가장 좋은 자리에 앉히겠노라 가만히 내 손을 잡아채던 친구들의 눈에서 본 도시이기 때문이리라.
여행 전 날 짐을 꾸리던 밤을 기억해 본다. 옷들을 가방에 우겨 넣으며 나는 무작정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여행 후에 닥칠 졸업이라는 낯선 목적지에 대한 두려움과 일견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아이스크림만이 가득 찬 냉동고를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부정하지 못하겠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대학생활 마지막에 가질 수 있어서 거짓말같이 행복하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였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었는지. 그리고 낯선 글씨가 가득한 이국의 표지판보다 훨씬 든든했던 대산 재단 담당자께 지면을 빌어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이토록 많은 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기분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 기억의 꾸러미를 가만히 상자에 채워 넣고자 한다. 말없이, 아주 사랑스러운 손길로 그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