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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대학문학상 유럽문학기행 기행문
작성자 조우리
날짜 12.03.07 조회 9351

글 / 조우리_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자. 1987년생


돌아오니 노트북이 켜지지 않았다. 이 문장은 나에게 아주 이상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니’라니. 떠났다는 것도, 도착했다는 것도, 다시 돌아왔다는 것도, 어느 하나 익숙하지가 않다. 아주 생경하다. ‘노트북이 켜지지 않았다’는 것도 참 이상스런 일이었다. 열흘 전엔 멀쩡했던 녀석인데. 왜 이러나. 전원 버튼이 불량이려니 하고 찾아간 수리점은 나에게 하드디스크를 교체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무이자 할부로 카드결제를 하고 나니 노트북은 마치 처음 샀을 때처럼 멀끔해졌다.
  텅 빈 바탕화면을 바라보다가 하릴없이 인터넷에 접속해 메일함을 열었다. 내 손에는 낯선 계정의 이메일 주소가 적힌 명함 몇 장이 있었다. 여덟 시간, 아홉 시간 뒤의 나라에 메일을 보냈다. 그 나라들에, 그 도시들에, 나도 머물렀다는 게 잘 실감나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파리, 액상 프로방스, 런던. 먼 도시들의 이름이 내가 발 디뎠던 순서대로 떠올랐다. ‘발송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노트북을 껐다. 키보드 위를 딸깍거리던 손톱을 자르기로 했다.
  끝이 벗겨진 매니큐어를 지우고 나니 열흘 치만큼 자란 손톱이 보였다. 공항에 날 마중 나온 사람은 머리칼도 그세 자라있었다고 했다. 웅크리고 앉아 손톱을 자르고 그런 김에 발톱도 잘랐다. 모르는 새에 생겼다가 사라진 물집이 남긴 흉터들이 보였다. 참 많이도, 열심히도 걸어 다녔다. 불쑥 먼 곳에서의 어떤 밤이 떠올랐다. 어쩐지 그때도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열 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고 나니 하루가 길어져 있었다. 걱정과 달리 미소 한 번으로 입국심사를 끝내주었던 프랑크프루트 공항의 직원에게 새삼 감사를 보낸다. 여행 내내 날이 궂었다. 덕분에 더 선명하고 진한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가끔 빛은 많은 것을 지운다. 어두운 하늘 아래 찰박이는 발자국들, 찬바람에 옷깃 여미며 지나치던 거리들. 오래 지나지 않았음에도 잿빛인 기억들이 차갑고 분명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독일에서는 한 도시와 함께한 삶에 대해 묵묵히 쏟아낸 작가를 만났다. 먼 땅에서도 언제나 고국을 향해 눈을 두기를 주저하지 앉는 번역가도 만났다. 붉은 벽돌의 집들, 익살스럽고 가슴을 찌르는 벽화들로 장식된 베를린 장벽. 외국인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독일 기차에서 만난 소녀. 프랑스에서는 어설픈 프랑스어로 프랑스 대학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과 한국 문학을 소중히 여겨주는 분들을 만났다. 오르셰 미술관에서 나를 울렸던 마네, 마네의 여인들. 샹젤리제의 밤, 에펠탑의 아침. 영국의 이층버스와 빌리 엘리엇. 대영박물관의 무시무시함. 히드로 공항에서의 출국 수속.
  동화 쓰는 이진하가 말했다.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지나고 난 뒤에야 후회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일행들이 모두 둘러 앉아 저녁을 먹고 나서였다.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즐겨야 할 때에 즐기고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꼭꼭 다짐을 한 것도 아닌데 정말 맘껏 ‘지금’을 누린 날들이었다. 정신없이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걷고, 보았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다시 없을 날들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모두가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이제 ‘동료’라고 불러도 좋을 사이. 비행기에서, 기차에서, 전철에서, 이층버스에서, 미술관에서, 박물관에서, 흩어졌다 모일 때마다 반갑게 얼굴 맞대던 사이. 둘러앉기만 하면 웃음이 넘쳐 오히려 힘이 빠지던 사이. 먼 도시의 이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를 얼굴들.
  언니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귀여움 받을 짓만 골라하던 극 쓰는 경민. 유럽에서 액땜 제대로 했으니 이제 승승장구만 남은 동화 쓰는 진하. 무심한 듯 자상하게 챙겨주던 시나리오 서현. 유럽까지 가서 한국 책 얘기 함께 했던 윤(재민)평(론가). 모두의 ‘앞으로’를, 그 곳에 있을 ‘글’들을 기대한다. 시 쓰는 효정아, 누나들 모아서 면회 갈게. 너의 시를 제일 기대한다. 그리고 앞에서 끌어주시고 뒤에서 보살펴주신 대산문화재단의 장근명님과 최종원 님께, 덕분에 말도 글도 안 통하는 타국을 마냥 동네 마실처럼 돌아다닐 수 있어 감사했다고 전하고 싶다.
  떠나는 비행기에서, 나는 하나의 문장을 떠올렸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문장이 하나씩 늘어났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고 다시 낮이 오는 동안, 그 문장들이 신나게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마치 하나의 풍경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여기저기 고개 돌리느라 정신없는 나처럼, 분주하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그 문장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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