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강서현_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 전공 4학년. 제10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수상자. 1987년생
1. 침착하고 확실한, 그러나 누구보다 뜨거운 – 독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다만, 드디어 네가 스스로 친 울타리 뒤에서 한번쯤 나와야 할 시간이 되었다는 거야” (페터 슈나이더. 1982.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처음 만난 프랑크푸르트는 물기 머금은 서늘한 공기의 벽, 그 너머에 있었다. 눈앞의 뢰머 광장과 괴테 하우스는 선명한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고, 신기루처럼 희미하고 흐물흐물하게 일렁였다. 나는 낡은 영화 필름 속에 불쑥 들어온 불청객이 되어 버렸다.
낯선 타국은 불쾌했다. 공항 직원은 불친절했고 바람은 차디찼고 실내는 어두웠다. 우리는 한 선로를 나누어 쓰는 지하철과 느린 와이파이, 짠 음식을 문제 삼으며 한국을 찬양했다.
독일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 준 건 베를린으로 떠나는 주간 열차에서 만난 예쁜 꼬마아가씨였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소녀는 손짓을 섞어가며 자신이 ‘카린’이며 열 살이라 설명했다. 소녀의 독일어는 따뜻했고 또 또렷했다.
어리석게도, 나는 한국의 속도에 독일을 끼워 맞추려 했다. 사람은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사는 법인데, 나는 독일인들이 오랜 시간 구축해온 나름의 방식과 지혜를 무시하고 있었다. 독일은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다. 원전을 포기하고 집집마다 태양 발전기를 설치하는 시민들, 역사를 반성하는 자세, 그들은 ‘빠름’보다는 ‘확실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조금 느리더라도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침착하고 확고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오랜 시간을 인내할 굳은 의지가 있는, 뜨거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베를린에서 그런 독일인을 만났다. 바로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의 저자 페터 슈나이더다. 그는 ‘마음속의 장벽’이란 말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자랑할 만큼 호쾌했고, 유명해지고 싶어 작가가 되었다고 고백할 만큼 진솔했다. 대담의 말미에, 그는 작가란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람이라 했다. 나는 그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겼고, 동시에 많은 것을 이룬 노 작가의 여유를 죽을 만큼 부러워했다.
처음 작가를 꿈꿨을 때 내가 그렸던 큰 그림이 있다. 나는 참된 글은 인생을 다 겪은 후에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지금은 그것을 얻는 과정이고, 지금의 글은 시행착오라 여겼다. 하지만 먼 미래에 놓아둔 결과물은 아득히 멀었고, 나는 자꾸 조바심을 내고 부족한 나를 채근했고, 그러다보면 내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그러나 페터 슈나이더를 만난 후에 나는 그 그림을 과감히 깨고 싶어졌다. 나의 오늘은 내일이면 다시 오지 않는 어제가 된다. 지금은 지금에 하는 고민과 지금에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 굳이 아스라한 미래에 매달릴 필요 없이, 나는 현재를 열심히 살고 또 쓰면 된다. 서투르고 유치한 글도 모두 나름의 의미가 있다. 진심을 다해 썼다면, 적어도 나에겐 나의 모든 글이 참되다.
2. 아름다운만큼 위험한 – 프랑스.
“파리는 진짜 큰 대양이다. 그래서 거기에 수심 측정기를 던져보아도 결코 그 깊이를 잴 수 없다” (오노레 드 발자크. 1835. 「고리오 영감」)
파리가 왜 예술의 도시인지 궁금한 사람은 페르 라세즈 묘지에 가보라. 그곳엔 발자크, 이브 몽땅,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이름만 들어도 엄청난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그래도 만족할 수 없다면 오르세 미술관에서 고흐의 자화상을 보라. 그림을 보는 것은 글을 읽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의 야윈 얼굴과 깊은 주름에서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굳은 의지를, 갈라질 때까지 덧칠한 붓 자국에서 열정을, 눈부신 색감에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희망을 읽을 수 있다.
화려한 조각으로 꾸민 정원식 묘지에서, 오래된 미술관에서, 그림엽서 같은 후미진 골목에서, 에펠 탑과 몽마르트 언덕의 야경에서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파리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은 파리를 점거한 집시와 소매치기를 무릅쓰고라도 다시 파리를 찾게 될 것이다. 이미 당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래, 파리는 위험하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 일행은 액상 프로방스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만났다. 그들은 호의적이었고 진지했다. 한 학생이 한국에서 작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물었고, 우리는 그 고충을 성실히 답했다. 그 고충에도 불구하고 우리 여섯은 작가로 살겠다고 말한 순간이,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감명 깊은 순간이었다.
그것이 맹랑한 포부란 것은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물론, 사람은 열정만으로 살 수 없다. 하지만 열정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김혜경 교수님과 장 클로드 교수님의 열정은 나를 감동시키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함께한 친구들과 긴긴 밤 나누었던 진지한 대화를, 나는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3. 짧아서 아쉬웠던, 그래서 더 꿈같았던 – 영국.
전공생의 호기로 들릴지는 몰라도, 영국은 대중 문학이 굉장히 발달한 나라다. 특히 ‘해리포터 시리즈’ 나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소설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 일은 부럽기까지 하다. 문학에 대한 영국인들의 사랑은 때로 열정을 뛰어넘은 집착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설 속의 주소대로 베이커 스트리트 221B에 위치한 셜록 홈즈 박물관을 가보면, 홈즈가 실존한다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사실 영국은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숙소가 어마어마하게 좋았고, 듣던 것과 달리 음식도 가장 맛있었다. 본고장에서 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가히 최고였고, 피카딜리 서커스, 템스 강과 빅벤, 포토벨로 마켓을 거닐 때는 꿈과 환상의 나라를 뛰노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떠나야 할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고 대영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정은 끝이 났다. 아쉬움 때문인지 몰라도, 대영 박물관의 유물은 나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했다.
유홍준 교수는 경주 남산의 절벽에 자리한 용장사곡 삼층 석탑을 두고 ‘똑같은 탑이 박물관에 있다면 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이 산에서 이 탑은 장엄한 가치를 지닌다’ 고 하였다. 유물은 놓인 자리에도 의미가 있다. 유리관에 갇힌 석상과 수염만 남은 스핑크스는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 조각난 파르테논 신전의 웅장함은 현대식 건물 안에서 빛을 잃고 동물의 털까지 표현한 조각의 섬세함은 사람들의 손때에 닳아버렸다. 조각나고 상처 난 유물 을 전시하는 것은 부끄러운 약탈의 역사를 전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세계 각지에서 훔친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오후 네 시가 되자 시계는 일제히 아름다운 차임벨을 울렸고, 나는 히드로 공항에서도 그 환청을 들으며 무거운 마음으로 영국을 떠났다.
4. 꿈은 끝났다.
“내 미래가 암담하다면, 단순한 상상으로 그것을 밝게 색칠하려고 노력하느니 남자답게 현실에 맞서는 게 나을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 1890. 『셜록 홈즈, 네 사람의 서명』)
길고도 짧은 꿈이 끝났다. 나는 다시 잔혹한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의 업무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덮쳤고, 다시 쫓기듯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나는 헛헛한 가슴으로 일상을 살았다. 눈을 감으면 유럽의 풍경이 어지러이 스쳐갔고,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이 나를 기다렸다. 그 잠 못 드는 새벽에, 나는 조금 울고 싶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는 그 때도 내가 행복한 것을 알았다. 걱정 없이 지내는 유일한 시간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때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나 자신으로의 회귀가 더욱 두려웠는지 모른다. 나는 요즘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다. 내 자신에게 실망하고, 또 실망하고, 요즘처럼 내가 싫었던 적이 없다. 수상 소식은 급작스러웠고, 나를 수없이 돌아보게 만들었고 분에 넘치는 자리에 선 것 같아 부끄럽기만 했다.
혼자 써오던 글을 남에게 보여주는 일은 두렵다. 막연히 바라던 일이 하나둘씩 이루어지는 일은 오히려 당혹스럽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글은 하루가 지나고 보면 저급하고 조악하기 그지없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뒤늦은 사춘기는 계속된다.
어쩌면 열흘간의 여행은 마치 일어나지도 않았던 환상처럼 나를 스쳐갈 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잔상으로 또 며칠을 잠 못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흘의 긴 꿈이 끝났으니 이제는 마음의 키가 한 뼘 자랄 시간이다.
변한 것은 없다. 하지만 나는 결코 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긴 꿈을 꾼다 해도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책망하며 글을 쓰고 미련하게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이제는 애써 변할 생각이 없다. 다만 이 미련하고 치열한 마음을 진심으로 쓰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미욱한 나를 조금이라도 사랑하겠다.
끝으로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할 때까지 몸 고생하시고, 흰 머리 생길 때까지 마음 고생하신 장 담당자님과 아빠처럼 너그러운 미소로 우리의 모든 어리광을 용인해주신 최 대리님, 꿈같은 기회를 주신 대산문화재단, 그리고 최초이자 최고의 해외여행을 함께했던 나의 다섯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