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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공의 탄성에 놀라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
글쓴이 : 강수빈 날짜 : 24.03.06|조회 : 318

 

탁구공의 탄성에 놀라는 동안 벌어지는 일들 

 

‘여행’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내게 미적지근한 설렘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익숙한 공간과 관성적으로 이어지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여행객으로 관광을 한다는 사실에는 쉽게 설렜지만, 그 외의 것들에는 금방 심드렁해졌다. 정교하게 설계된 멸망한 왕조의 왕국이나 웅장한 무덤, 호수라고 해도 믿을 만한 크기의 목욕탕. 그 사이를 거닐면서 내가 정말로 감탄을 한 적이 있던가? 나는 매번 공간 자체에 압도되기보다는 그 공간에 있는 다른 이들의 벌어진 입, 탄성을 내지르느라 벌어진 그 둥글고 깊은 입들에 압도되었다. 그 입들 사이에서 꾹 닫힌 내 입술은 길을 잘못 든 미아 같기도 했고, 혼자 드레스코드를 못 맞춘 파티 입장객 같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은 내게 매번 자그마한 부끄러움을 남겼다. 여행지보다는 여행객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 어디에 갔느냐보다는 누구랑 갔느냐가 더 중요한 사람. 이런 나는 어쩐지 여행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만 같고. 그건 이번 베를린 기행을 앞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카이저 빌헬름 교회나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돔이나 박물관 섬보다도 내가 더 관심을 기울였던 건 함께 기행을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정말 베를린의 이모저모보다도 그들이 궁금했다. 광화문에서 단 두 번 만났을 뿐인 그들과 내가 베를린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어떤 형태의 관계를 맺게 될지가 몹시 알고 싶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공항철도 안에서 느꼈던 설렘은 독일에 간다는 사실보다도 수진, 수려, 원기, 경희, 혜리 쌤과 동혁 쌤 때문이었다는 걸 부끄럽지만 고백하고 싶다.

베를린에서 역시나 내 시선을 잡아끈 건 거대하고 위엄 있는 건물보다도 작은 찰나의 것들이었다. 빌헬름 교회에서 기념품을 조심히 꺼내주던 점원분의 가지런한 옷매무새. 훔볼트 대학교에서 마주친 몰타 대통령의 걸음걸이. 나와 친구들을 사진에 담아주셨던 다와다 요코 작가님의 두 손. 가장 꼭대기 층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단원의 옆모습. 현대 미술관에서 만난 뺨이 붉은 아이와 라이프치히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본 바깥 풍경. 멘델스존 박물관에서 모두와 가족사진을 찍던 시간과 바흐가 일했다던 성당에서 타오르는 초를 본 일. 슈타이프 앞에서 나와 친구의 사진을 찍어준 분의 미소와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하루를 나누었던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찍으려고 부산을 떨거나 거실에 누워 모든 불을 끄고 별을 구경했던 것. 밤마다 모여 수려가 준비한 음식과 함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던 것.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하던 라이어 게임과 규격에 맞지 않는 탁자에서 진행하던 탁구. 나는 지금 그런 것들 속에 있다.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원기와 수려에게 탁구를 배웠고, 탁구의 규칙은 상대의 코트에 무조건 한 번 공을 바운드시켜야 한다는 것. 바운드 되지 않고 날아간 공은 실점이라는 것. 낮의 일정을 끝내고 지친 몸으로 돌아온 숙소에서 라켓을 쥐고 공을 튕기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주고받았을까. 놀라운 탄력으로 튀어 오르는 게 공뿐이었을까? 사람을 안다는 건 뭘까? 어느 밤에 원기는 사람이 사람을 파악하는 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일 것이다, 라고 틀을 정해두고 몰랐거나 생각과 다른 모습을 덜어내는 조각과 아무런 틀도 정해두지 않은 채로 알게 된 부분들을 덧붙이는 조형. 우리는 각자가 어떤 쪽에 가까운지 이야기했고, 결국 사람을 아는 일이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않나, 생각이 들었지만…. 마지막 날 밤에 내가 써간 엽서를 보고 원기는 ‘수빈이 같은 편지다.’라고 말했다. 원기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소개했는데, 원기 안에서 조각된 나는 어떤 형태였을까. 수진이는 웃음소리가 크고 일정에 나서기 전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우리가 길을 막거나 통행에 방해를 주고 있으면 자리를 옮기자고 가장 먼저 말한다. 수려는 새로운 맛을 탐구하는 데 겁이 없고 낯선 사람에게 말 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손끝이 야무지고 조용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한다. 원기는 자주 멈춰 서서 거리 사진을 찍었고 탁구를 가르치는 데 재능이 있어 보인다. 최근 가요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소녀시대의 ‘I got a boy’는 잘 안다. 경희는 말을 느릿하게 하고 말끝을 늘리는 버릇이 있다. 귀여운 키링에 관한 기준이 확고하고 분홍색과 흰색 옷을 주로 입는다. 이 정도로 내가 어딘가에 가서 수진이와 수려와 원기와 경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탁구공이 튀어 오르는 동안 나는 어쩌면 알게 된 걸 비로소 알았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밤에는 각자 쓴 시를 서로의 입으로 낭독했는데, 우리는 참 서로 같은 시다, 말하며 웃기도 했다. 그렇게 웃는 동안에 우리의 입매는 둥글게 벌어졌고.  

태어나 처음 쳐보는 탁구에 나는 자주 헛스윙을 하고 땅에 떨어진 공을 줍느라 자세를 납작 엎드려야 했고 바닥에서도 멈추지 않고 통통 튀는 공은 나를 헛손질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헛’짓들이 모여 우리의 기행이 완성된 것 아닐까, 서울에 와서야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엉망진창인 규칙으로 서로의 코트에 공을 던지는 동안에. 터무니없이 날아오르는 공을 받으러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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