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학기행문

겨울 방학
글쓴이 : 노경희 날짜 : 24.03.06|조회 : 362

겨울 방학

   

겨울 방학이 오면 절대 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2학기 마지막 시험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였다. 그동안 너무 많이 돌아다닌 것 같았다. 어떤 사건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나가고 싶을 때 나가고 싶었다. 그러다 갑자기 베를린에 가게 됐다. 

내가 베를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내 방과 몹시 멀다는 것 하나였다. 출국하기까지 시간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그렇게 아는 것 하나 없이 조금은 긴장한 상태로 비행기에 올랐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장거리 비행도, 독일이라는 나라도, 이런 식으로 떠나는 여행도.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멀리 있는 것은 잘 떠오르지 않았고, 놓고 온 것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게 신기했다. 그저 뒤바뀐 시차 적응에 힘썼고, 처음 걸어보는 거리에 온전히 집중했다. 모르는 게 많아 그만큼 새로웠다. 그것만으로도 하루는 충분했다. 매일 밤, 잠든 수려 언니 곁에서 작은 불을 켜고 꾸벅꾸벅 졸며 썼던 일기에는 풍경의 조각들이 두서없이 흩어져 남았다.

  

비행기 창문 너머로 촘촘히 이어진 오렌지색 불빛들 

누군가 입바람을 후 분 것처럼 빠르게 밀려났다가 다시 밀려오던 구름 

일찍 떠진 눈과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은 날에도 늘 친절했던 날씨 

미술관 한쪽, 누구도 앉지 않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큰 종이 위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던 우리 

그렇게 완성된 우리의 엉터리 장점 목록 

어느 날에는 모르는 할머니와 함께 신중히 엽서 기계의 손잡이를 돌리기도 했고 

혼자 남겨진 베를린 돔의 좁은 계단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나란히 선 채 숨을 고르다 별안간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소리 내 읽을 수는 없지만 눈에 익은 몇몇 단어들을 따라 걸으며 길을 헤매던 시간 

결국 내가 찾아낸 것들 

슬픈 가사 같은 건 도무지 쓸 수 없어 헤드폰을 내려놓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가던 가벼운 발걸음과 

낡은 퍼즐 상자를 베고 누워 손가락으로 천장의 별을 짚어보면 옆에서 가만히 들려오던 목소리들 

주고받던 이야기와 닫힌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던 주방의 불빛 

식탁에 놓인 카프레제 샐러드와 딸기 요플레, 달고 짠 과자들 

웃기고 이상한 게임 

그것보다 더 이상한 멘델스존 하우스 가족사진 

처음 쥐어본 탁구채는 거짓말처럼 손에 꼭 맞았고 

우리만 보면 크게 짖던 앞집 강아지는 그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혼자 숙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어쩐지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어서

이상한 운명처럼 장바구니로 툭 떨어진 곰 젤리 열쇠고리와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는 사람들, 다정한 끄덕임 

그런 우연과 용기는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언니, 하고 부르면 동시에 뒤돌아보던 수진, 수빈, 수려 언니의 뒷모습과 

뒤에서 매일 재미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던 원기 오빠 

뒤처지면 뒤돌아 오래도록 기다려 주던 마음들까지

  

무거운 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잃어버린 것은 있지만, 두고 온 것은 없다. 자고 싶은 만큼 푹 자고 일어났다. 밥을 먹고, 어쩌다 보니 외출했고, 친구도 만났다. 익숙한 거리를 걸었고, 그만큼 걸어 돌아왔다. 다시 겨울 방학이었다. 

그렇게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 서로 나눴던 시시한 농담들이 떠오르곤 한다. 함께 숙소로 돌아가던 밤이 생각난다. 우리는 말도 안 되게 유치했고, 바보 같은 장난만 쳤지만, 그래서 좋았다. 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처음 세웠던 방학 계획과는 다르게 아주 큰 사건이 생겨버렸다. 쌓인 흰 눈에 찍힌 수많은 발자국처럼 내 안에 무수히 남았다. 이제 더는 기온이 낮아질 일도, 거짓말처럼 겨울이 반복될 일도 없을 테니 다시 눈이 내려 지워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싫지 않다. 계속 함께 남아 서로에게 크고 작은 자국을 남기며 살아가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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