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시인, 1967년생.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
하루하루 죽음이 배달되고 하루하루 죽음에 연루되고 하루하루 죽임을 시행하는 걸 일상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하지만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는 마음
소각
그녀는 성냥을 한 장 사진의 꼭짓점에 가져다 대었다 불이 붙었다 세 장의 사진을 불 속에 던졌다 열 장의 사진 스무 장의 사진 혼자서 찍은 사진 모두 함께 찍은 사진…… 불길 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아기였던 얼굴 청년이었던 얼굴 면사포를 쓴 얼굴 눈을 감은 얼굴 들이 불길 속에서 잠시 환했다가 금세 검은 재가 되었다 얼굴이 사라졌을 뿐인데 전생이 지워진 것 같군 불길 같 은 이런 기쁨 조용하게 출렁이는 이런 기쁨 검정 같은 마지막 기쁨 비로소 고요해지는 것 같군 그녀는 그때 그녀가 되고 있었다 불 속에서는 재가 된 것과 되지 못한 것, 두 가지만 남겨져 있었다 입에는 말이 들어 있지 않았으나 눈에는 불이 담겨 있었다 주문진의 바다와 노고단의 구름과 비둘기호의 창문 바깥이 차례차례 재가 되었다 거의 모든 것이 깨끗하게 타들어갔다 사진에 담아보았을리 없는 그녀의 좁고 작은 미래가 빨간 불씨처럼 남아 있었다 그 불씨들마저 꺼졌을 때 완전한 암흑이 찾아왔다 그녀가 오래 기다려온 장면이었다 그 속에서 그 안을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온기마저 모두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았다는 것을 더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남은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