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을 기획하며｜2016 우리 문화의 아젠다 혹은 쟁점들 ①국가라는 신체, 애국이라는 증상 ②‘젊은 문예지’ 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③미술계의 위작·대작 사건 톺아보기 ④기계적 친절이 싫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첫 번째｜내설악 겨울나기 두 번째｜대한민국에서 경차 타기 세 번째｜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넘어 네 번째｜이렇게 길을 달리다 보면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한국문학의 푸른빛을 보다 소설 부문｜분단문학을 넘어선 연대기적 가족서사 시 부문｜주체 없는 어떤 영원성 평론 부문｜흔들릴수록 더욱 뚜렷이 보이는 희망의 불빛 번역 부문｜유려하고 성취도 높은 스페인어 문장의 진경
이 계절이 몰고 온 문학계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
기획특집
문학의 한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빌미삼아 문학 생산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는 문예지의 변신이 시도되어, 확산하면서 기존 문예지의 변신도 압박하는 중이다. 산뜻한 문예지 《악스트》 열풍, 《세계의문학》 폐간과 《릿터》 창간, 《문학과사회》 혁신 등이 이어지고, 창비의 ‘젊은 잡지’ 발행이 조만간 예고되어 있다. 《더 멀리》, 《16시》, 《조립형 텍 스트》, 《애널리얼리즘》, 《읻다》 등 독립잡지 형태를 빌려서 발행하는 동인문예지가 던지는 소소한 문학적 파문 또한 아주 흥미롭다. 움직임이 균열로 이어지고 지진을 일으키며 단 층을 이룩해 문학의 지형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있었던 자잘한 여러 시도와 마 찬가지로 약간의 산울림에 그친 후 사그라질 것인가. 문학 출판의 이러한 움직임에서 우 리는 무엇을 주목하고 어떤 것을 증진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은 대개 대중들이 문학 작품을 대량으로, 또는 골고루 읽어 주지 않아서 문학 출판의 지속가능성이 파괴되고 있 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학이 주로 출판의 도움을 받아 책이라는 소수미디어의 형태로 실현되고, 작가나 시인이 책의 판매를 통해 적으 나마 생계를 해결하는 만큼, 문학 출판의 위기 는 잠재적으로 문학의 위기와 겹치는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문학이 반드시 책의 형태로만 실현 될 이유가 없고, 또 만인과 만인이 연결되어 있는 초연결시대의 미디어 환경에서 문학의 실존적 한 주체인 작가나 시인이 다른 주체인 독자를 만나 려면 가능한 경로가 거의 무한에 가까우므로, 문 학이 반드시 종이책 출판과 운명을 같이할 까닭 도 없다.
작품의 질적 수준을 일단 논외로 하자면, 오 늘날 문학 읽기는 스마트폰 혁명에 힘입어 오히 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른바 ‘웹소설’ 시 장은 해마다 큰 폭으로 독자를 늘려가는 중이다. 저작권 문제가 숨은 쟁점이기는 하나 블로그, 카 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나 소설(의 구절)을 공유하면서 감상하는 경우 역시 폭발적 으로 늘어났다. 중국에서 만난 온라인서점 아마 존의 관계자는 독자의 읽기를 도와주는 기술, 즉 리딩 테크놀로지(Reading Technology)의 비약 적 발전이 오늘날 쓰기와 읽기를 둘러싼 낡은 지 형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문학 작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비교적 정체된 반면에 문학을 수용하는 기술은 계속 혁신되는 중이므로, 그 벌 어진 간극 속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무엇이 기존 문학 제도의 장에서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그 중 하나가 계간 문예지일 수 있다). 인쇄 테크놀 로지 혁명이 음유시인을 문학의 변방으로 쫓아내 고, 소설가를 시대의 총아로 불러들였듯이 말이 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오늘날 자주 고지되곤 하는 ‘문학의 위기’는 문학 생산이나 향 유의 양적 위기를 가리키는 말은 분명히 아닐 것 이다. ‘문학의 위기’는 사실상 인쇄 기술을 이용하 는 문학의 위기이고, 인쇄 기술과 밀착해 있는 특 정한 문학의 위기이며, 이는 결국 출판산업의 가 치 사슬에 누적된 내적 모순(생산과 소비의 불일 치)의 지양을 통해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 다. 오늘날 문예지의 다양한 시도를 일으키는 근 본적인 동력은 일차적으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중이 문학을 읽고 쓰는 시대의 도래는 ‘문학 의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아주 찬양할 일이다. 초기 계몽주의자에게 독서의 폭발적 확산은 스 스로 사고하는 자율적 주체의 탄생으로 이어지 는 인간 해방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실제 로 독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나자 똑같은 희 망의 기호가 곧바로 절망의 신호가 되었다. 오늘 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대중의 읽기는 스스로 를 미적으로 교육해서 내면적 고귀함을 이룩하는 실천적 행위가 아니라, 통속적 대중소설에 대한 지독한 탐닉과 중독으로 떨어져 우아함으로 천박 함을 위장하는 속물적 과시 행위의 일종이 되었 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슐레겔은 대중 독자 를 “생각도 하지 않고 행동도 하지 않는 가장 끔 찍한 수동성”이라고 불렀다. 읽기를 경험의 확장 을 통해 정신적 성숙에 이르는 힘찬 경로로 쓰지 못하고, 반복되는 말초적 자극에 빠져 오히려 현 실을 망실하는 아편으로 사용하는 처참한 현실 을 폭로한 말이다. 문학 읽기가 대중 속으로 널리 퍼져갈수록 문학의 좌절이 함께 깊어지는 아이러 니의 탄생. 그래서 서사적 몰입을 통해 대중의 미 적 교육을 이룩하려 했던 계몽의 기획은 파산하 고, 새로운 스타일의 문학적 기획이 시도된다. 이른바 ‘좋은 문학’은 독자의 맹목적 몰입을 방해하 는 온갖 서술적 책략을 구사함으로써 대중을 미 적으로 각성하는 역할을 부러 떠맡는다. 문학과 대중의 적절한 이격은 그 자체로 이른바 ‘좋은 문 학’ 생산의 중요한 필요조건 중 하나가 된다.
통속적 대중소설을 출간하지 않고 좋은/고급/ 본격/순 문학을 출간하려는 출판사들은 태생부 터 이미 문학과 대중의 이격을 부추기면서 동시 에 해소해야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떠안고 시작 했다. 문학의 창공에 걸린 한 가닥 줄 위에서 비 틀거리며 한없이 재주를 넘는 곡예사 신세를 자 처할 수밖에 없다. 괴테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여신’을 순정하게 섬기면서 ‘상업의 여신’의 질투 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그 위태로운 행위를 통 해, 한 시대의 문학을 형성하는 임무를 수행 중 이다. 상업의 여신이 질투함으로써 ‘문학의 위기’ 가 찾아올 때마다,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져 장 엄히 스러지는 베르터가 되거나, 또 다른 곡예술 을 선보이며 신세계를 개척하는 빌헬름이 돼야 하는. 이럴 때 모두가 집중할 중요한 선포는 하 나뿐. “아메리카가 따로 없다. 바로 여기다.” 문학 출판이 본래 발 디딘 자리는 단단한 대지가 아니 라 공중에 걸려 요동치는 줄이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문학 출판이 아름다운 곡예술을 선보일 때 마다 모두 마음껏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악스트》에서 시작한 이른바 ‘젊은 문예지’ 또 는 ‘문예지의 혁신’은, 대중과 이격해야 하지만 동 시에 포괄해야 하는 문학 출판의 태생적 모순이 생성하는, 새로운 레퍼토리의 공연과도 같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문학 출판과 문학 대중 사이의 거리가 지속적으로 멀어지면서, 상업의 여신의 질투를 받은 끝에 문예지 자체의 존재감마저 아 주 희미해지자 주로 형식의 파격과 탈피를 통해 이를 만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다. 새로 나 온 문예지를 살펴보면, 어디가 ‘젊은’이고, 무엇이 ‘혁신’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 문학의 혁신이라기 보다는 문학적 소통의 혁신이고, 청년세대의 감 각을 문학의 중점으로 삼으려는 젊은 목소리의 도발이라기보다는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소 프트하고 비주얼하며 감성 친화적인 편집의 세련 된 제안에 가깝다.
개인이 여러 매체를 옮겨 다니면서 자신이 즐 길 콘텐츠를 조각조각 선택해서 소비할 수 있는 다매체 시대를 맞이하여, 고압적이고 계몽적인 그동안의 문학적 소통방식(그 결과는 독자의 파 멸적 외면이다)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성 하고, 태도를 한껏 낮춘 상태에서 문학과 독자 사이의 다리를 새로 놓는 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학 출판사에서 꾸준히 좋은 작품 을 생산해서 세상으로 내보내도 독자들은 그 작 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 즉 발견성(discoverability) 문제가 문학의, 조금 좁히면 문학 출판의 시대적인 과제로 떠올랐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른바 ‘문학의 위기’란, 문학 생산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적 소통의 잘못에서 비롯한 위기이고, 발견성 문제를 해소하려는 여 러 가지 도전들 속에서 문학 독자의 대대적인 귀 환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바탕에 회칠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문학 작품을 생 산해도 읽기로 이어지지 않는 ‘문학의 위기’를 명 분 삼아 문학의 주요 초점을 독자 생산에 놓아 보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릿터》의 창간 기 자회견에서 선명하게 ‘독자’를 언급한 것은 문예지 의 존재방식이 ‘생산만’에서 ‘소통도’로 그 중심점 을 이동했음을 잘 보여준다.
독자의 반응만을 놓고 보면, 이러한 시도는 일 단 성공적으로 생각된다. 《악스트》와 《릿터》의 편 집 및 디자인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선명하다. “[이들은] 독자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 학잡지 Axt & Littor」라는 한 블로거의 글은 계 간지 중심의 문학 생산구조에 대한 독자들 불만 이 무엇이었는지, 《악스트》와 《릿터》에 대한 애호 가 무엇에서 비롯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악스트》가 나오기 전, 내가 알던 문예지는 《문 학동네》, 《창작과비평》 정도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나오는 계간지다 보니, 두께가 제 법 두껍다. 읽을거리가 많아서 좋을 수도 있지만, 빽빽한 글씨에 밀도 높은 내용들만 가득해서 어 쩐지 선뜻 읽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문학을 공부 하는 사람이나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만 읽는, 그들만의 세상처럼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마치 높고 견고한 성벽처럼.
그래서 《악스트》의 탄생이 반가웠다. 《악스트》는 문학인과 일반 독자의 가교 역할을 하려고 작 심한 듯 문턱을 낮췄다. 우선 산뜻한 디자인에 가 독성을 높였다. 그리고 가격이 착해도 너무 착했 다(2900원). (중략)
여기에 민음사에서 나오는 《릿터》가 가세했다. Literature(문학)의 Lit-과 -tor(~하는 사람)가 합 쳐진 감각적인 제목이다. (중략) 굳이 대중성을 따 지자면 《릿터》에 손을 들어주겠다. 한국문학에 익 숙지 않은 이들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도 좀 더 자유롭다. 문 학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중략) 문학잡지를 다양하게 즐기는 유행이 생겨, 문학 잡지의 춘추전국시대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1)
이 같은 인식은 《악스트》와 《릿터》를 구매하고 글을 올린 독자에게 일반적이다. 문학 대중의 눈 에 그동안의 계간지 문학은 ‘높고 견고한 성’을 쌓 아 놓고 ‘그들만의 언어’로 파티를 즐기는 귀족적 연회처럼 비춰진다. ‘젊은 문예지’에 대한 찬사에 는 ‘산뜻한 디자인’과 함께 ‘가독성’이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이 가독성이 단지 글자가 커지 고 행간이 적절하며, 판형에 맞추어 비주얼한 사 진이나 그림이 많이 들어간 것만을 뜻하지는 않 는다. 문학 대중이 호기심을 품고 읽을 수 있는, 아니 읽고 싶어 하는 여러 가지 ‘꺼리’가 실려 있 다는 말이다. 쇄말로까지 느껴지는 감각적 인터 뷰, 가벼운 스타일의 (인문) 에세이, 작품의 전면 배치 등 세세한 편집 장치가 함께 가동되었기 때 문이다. 대중은 문학을 전혀 떠나지 않았고 취향 을 새롭게 맞추어 준다면, 문학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들 문예지는 지면의 혁신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그 결과, 문예지를 ‘좋은 문학’을 위한 미적 교 육의 진지로 생각하고, 이를 옹위하는 묵직한 담 론을 곳곳에 부려두어 “그들만의 세상”을 이루 는 데 기여해 온 비평(이론)의 전면적 후퇴가 함 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 파장은 아주 단순해 보이 지만, 점차 심각해질 것이다. 이론의 소멸은 문학 출판을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지탱해 온 등단 제 도, 문학상, 창작지원금 등과 같은 계몽적, 엘리 트적 시스템의 혁신을 또 하나의 필연으로 요구 하는 중이다. 등단제도에 대한 지속적 항의, 문 학상에 대한 독자 참여 시도, 문학 단행본 출간 을 둘러싼 제도적 정비, 한국문학 전문 편집자의 소셜 포지션 재조정 등 기존 문학 생산 구조에 대한 사회적 노이즈가 최근에 늘어나는 것도 이 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여 두고 싶다. 문학의 혁신 없이 문학적 소통의 혁신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문예지의 혁 신은 항상 새로운 문학의 등장과 맞물려 왔다. 내용 없는 형식은 결국 공허의 거대한 도래를 부 추길 가망성이 높다. 배치의 감각적 실현만으로 ‘젊은’을 유지하고 이룩하기란 불가능하다. 새로운 작가의 꾸준한 발굴이 없다면, 이번에는 ‘시의 여 신’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②‘젊은 문예지’ 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글 장은수 ㅣ 평론가,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1968년생
저서 『출판의 미래』 등
'젊은 문예지'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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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독성이 단지 글자가 커지고 행간이 적절하며, 판형에 |
문학의 한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문학의 위기’를 빌미삼아 문학 생산의 중요한 토대를 이루는 문예지의 변신이 시도되어, 확산하면서 기존 문예지의 변신도 압박하는 중이다. 산뜻한 문예지 《악스트》 열풍, 《세계의문학》 폐간과 《릿터》 창간, 《문학과사회》 혁신 등이 이어지고, 창비의 ‘젊은 잡지’ 발행이 조만간 예고되어 있다. 《더 멀리》, 《16시》, 《조립형 텍 스트》, 《애널리얼리즘》, 《읻다》 등 독립잡지 형태를 빌려서 발행하는 동인문예지가 던지는 소소한 문학적 파문 또한 아주 흥미롭다. 움직임이 균열로 이어지고 지진을 일으키며 단 층을 이룩해 문학의 지형을 바꿀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 있었던 자잘한 여러 시도와 마 찬가지로 약간의 산울림에 그친 후 사그라질 것인가. 문학 출판의 이러한 움직임에서 우 리는 무엇을 주목하고 어떤 것을 증진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말은 대개 대중들이 문학 작품을 대량으로, 또는 골고루 읽어 주지 않아서 문학 출판의 지속가능성이 파괴되고 있 다는 뜻으로 쓰인다. 문학이 주로 출판의 도움을 받아 책이라는 소수미디어의 형태로 실현되고, 작가나 시인이 책의 판매를 통해 적으 나마 생계를 해결하는 만큼, 문학 출판의 위기 는 잠재적으로 문학의 위기와 겹치는 것도 사실 이다. 그러나 문학이 반드시 책의 형태로만 실현 될 이유가 없고, 또 만인과 만인이 연결되어 있는 초연결시대의 미디어 환경에서 문학의 실존적 한 주체인 작가나 시인이 다른 주체인 독자를 만나 려면 가능한 경로가 거의 무한에 가까우므로, 문 학이 반드시 종이책 출판과 운명을 같이할 까닭 도 없다.
작품의 질적 수준을 일단 논외로 하자면, 오 늘날 문학 읽기는 스마트폰 혁명에 힘입어 오히 려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른바 ‘웹소설’ 시 장은 해마다 큰 폭으로 독자를 늘려가는 중이다. 저작권 문제가 숨은 쟁점이기는 하나 블로그, 카 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시나 소설(의 구절)을 공유하면서 감상하는 경우 역시 폭발적 으로 늘어났다. 중국에서 만난 온라인서점 아마 존의 관계자는 독자의 읽기를 도와주는 기술, 즉 리딩 테크놀로지(Reading Technology)의 비약 적 발전이 오늘날 쓰기와 읽기를 둘러싼 낡은 지 형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고 말했다. 문학 작품을 생산하는 기술은 비교적 정체된 반면에 문학을 수용하는 기술은 계속 혁신되는 중이므로, 그 벌 어진 간극 속으로 떨어져 사라지는 무엇이 기존 문학 제도의 장에서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그 중 하나가 계간 문예지일 수 있다). 인쇄 테크놀 로지 혁명이 음유시인을 문학의 변방으로 쫓아내 고, 소설가를 시대의 총아로 불러들였듯이 말이 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오늘날 자주 고지되곤 하는 ‘문학의 위기’는 문학 생산이나 향 유의 양적 위기를 가리키는 말은 분명히 아닐 것 이다. ‘문학의 위기’는 사실상 인쇄 기술을 이용하 는 문학의 위기이고, 인쇄 기술과 밀착해 있는 특 정한 문학의 위기이며, 이는 결국 출판산업의 가 치 사슬에 누적된 내적 모순(생산과 소비의 불일 치)의 지양을 통해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밖에 없 다. 오늘날 문예지의 다양한 시도를 일으키는 근 본적인 동력은 일차적으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중이 문학을 읽고 쓰는 시대의 도래는 ‘문학 의 민주화’라는 차원에서 아주 찬양할 일이다. 초기 계몽주의자에게 독서의 폭발적 확산은 스 스로 사고하는 자율적 주체의 탄생으로 이어지 는 인간 해방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실제 로 독서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나자 똑같은 희 망의 기호가 곧바로 절망의 신호가 되었다. 오늘 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대중의 읽기는 스스로 를 미적으로 교육해서 내면적 고귀함을 이룩하는 실천적 행위가 아니라, 통속적 대중소설에 대한 지독한 탐닉과 중독으로 떨어져 우아함으로 천박 함을 위장하는 속물적 과시 행위의 일종이 되었 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슐레겔은 대중 독자 를 “생각도 하지 않고 행동도 하지 않는 가장 끔 찍한 수동성”이라고 불렀다. 읽기를 경험의 확장 을 통해 정신적 성숙에 이르는 힘찬 경로로 쓰지 못하고, 반복되는 말초적 자극에 빠져 오히려 현 실을 망실하는 아편으로 사용하는 처참한 현실 을 폭로한 말이다. 문학 읽기가 대중 속으로 널리 퍼져갈수록 문학의 좌절이 함께 깊어지는 아이러 니의 탄생. 그래서 서사적 몰입을 통해 대중의 미 적 교육을 이룩하려 했던 계몽의 기획은 파산하 고, 새로운 스타일의 문학적 기획이 시도된다. 이른바 ‘좋은 문학’은 독자의 맹목적 몰입을 방해하 는 온갖 서술적 책략을 구사함으로써 대중을 미 적으로 각성하는 역할을 부러 떠맡는다. 문학과 대중의 적절한 이격은 그 자체로 이른바 ‘좋은 문 학’ 생산의 중요한 필요조건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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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하자면 문학 출판과 문학 대중 사이의 거리가 지속적으로 멀어지면서, 상업의 여신의 질투를 받은 끝에 문예지 자체의 존재감마저 아주 희미해지자 주로 형식의 파격과 탈피를 통해 이를 만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도 있다. 새로 나온 문예지를 살펴보면, 어디가 ‘젊은’이고, 무엇이 ‘혁신’인지, 대략 짐작이 간다. 문학의 혁신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소통의 혁신이고, 청년세대의 감각을 문학의 중점으로 삼으려는 젊은 목소리의 도발이라기보다는 젊은 세대가 좋아할 만한 소프트하고 비주얼하며 감성 친화적인 편집의 세련된 제안에 가깝다.
통속적 대중소설을 출간하지 않고 좋은/고급/ 본격/순 문학을 출간하려는 출판사들은 태생부 터 이미 문학과 대중의 이격을 부추기면서 동시 에 해소해야 하는 불가능한 기획을 떠안고 시작 했다. 문학의 창공에 걸린 한 가닥 줄 위에서 비 틀거리며 한없이 재주를 넘는 곡예사 신세를 자 처할 수밖에 없다. 괴테의 표현을 빌리면, ‘시의 여신’을 순정하게 섬기면서 ‘상업의 여신’의 질투 를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그 위태로운 행위를 통 해, 한 시대의 문학을 형성하는 임무를 수행 중 이다. 상업의 여신이 질투함으로써 ‘문학의 위기’ 가 찾아올 때마다, 아득한 심연으로 떨어져 장 엄히 스러지는 베르터가 되거나, 또 다른 곡예술 을 선보이며 신세계를 개척하는 빌헬름이 돼야 하는. 이럴 때 모두가 집중할 중요한 선포는 하 나뿐. “아메리카가 따로 없다. 바로 여기다.” 문학 출판이 본래 발 디딘 자리는 단단한 대지가 아니 라 공중에 걸려 요동치는 줄이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문학 출판이 아름다운 곡예술을 선보일 때 마다 모두 마음껏 응원을 보내는 것이다.
《악스트》에서 시작한 이른바 ‘젊은 문예지’ 또 는 ‘문예지의 혁신’은, 대중과 이격해야 하지만 동 시에 포괄해야 하는 문학 출판의 태생적 모순이 생성하는, 새로운 레퍼토리의 공연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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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여러 매체를 옮겨 다니면서 자신이 즐 길 콘텐츠를 조각조각 선택해서 소비할 수 있는 다매체 시대를 맞이하여, 고압적이고 계몽적인 그동안의 문학적 소통방식(그 결과는 독자의 파 멸적 외면이다)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음을 반성 하고, 태도를 한껏 낮춘 상태에서 문학과 독자 사이의 다리를 새로 놓는 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학 출판사에서 꾸준히 좋은 작품 을 생산해서 세상으로 내보내도 독자들은 그 작 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 즉 발견성(discoverability) 문제가 문학의, 조금 좁히면 문학 출판의 시대적인 과제로 떠올랐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른바 ‘문학의 위기’란, 문학 생산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적 소통의 잘못에서 비롯한 위기이고, 발견성 문제를 해소하려는 여 러 가지 도전들 속에서 문학 독자의 대대적인 귀 환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바탕에 회칠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말로 하면, 문학 작품을 생 산해도 읽기로 이어지지 않는 ‘문학의 위기’를 명 분 삼아 문학의 주요 초점을 독자 생산에 놓아 보려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릿터》의 창간 기 자회견에서 선명하게 ‘독자’를 언급한 것은 문예지 의 존재방식이 ‘생산만’에서 ‘소통도’로 그 중심점 을 이동했음을 잘 보여준다.
독자의 반응만을 놓고 보면, 이러한 시도는 일 단 성공적으로 생각된다. 《악스트》와 《릿터》의 편 집 및 디자인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선명하다. “[이들은] 독자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 학잡지 Axt & Littor」라는 한 블로거의 글은 계 간지 중심의 문학 생산구조에 대한 독자들 불만 이 무엇이었는지, 《악스트》와 《릿터》에 대한 애호 가 무엇에서 비롯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악스트》가 나오기 전, 내가 알던 문예지는 《문 학동네》, 《창작과비평》 정도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나오는 계간지다 보니, 두께가 제 법 두껍다. 읽을거리가 많아서 좋을 수도 있지만, 빽빽한 글씨에 밀도 높은 내용들만 가득해서 어 쩐지 선뜻 읽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문학을 공부 하는 사람이나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만 읽는, 그들만의 세상처럼 느껴져서 더욱 그랬다. 마치 높고 견고한 성벽처럼.
그래서 《악스트》의 탄생이 반가웠다. 《악스트》는 문학인과 일반 독자의 가교 역할을 하려고 작 심한 듯 문턱을 낮췄다. 우선 산뜻한 디자인에 가 독성을 높였다. 그리고 가격이 착해도 너무 착했 다(2900원). (중략)
여기에 민음사에서 나오는 《릿터》가 가세했다. Literature(문학)의 Lit-과 -tor(~하는 사람)가 합 쳐진 감각적인 제목이다. (중략) 굳이 대중성을 따 지자면 《릿터》에 손을 들어주겠다. 한국문학에 익 숙지 않은 이들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도 좀 더 자유롭다. 문 학인에 국한하지 않는다. (중략) 문학잡지를 다양하게 즐기는 유행이 생겨, 문학 잡지의 춘추전국시대가 오기를 기대해 본다.1)
이 같은 인식은 《악스트》와 《릿터》를 구매하고 글을 올린 독자에게 일반적이다. 문학 대중의 눈 에 그동안의 계간지 문학은 ‘높고 견고한 성’을 쌓 아 놓고 ‘그들만의 언어’로 파티를 즐기는 귀족적 연회처럼 비춰진다. ‘젊은 문예지’에 대한 찬사에 는 ‘산뜻한 디자인’과 함께 ‘가독성’이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띈다. 이 가독성이 단지 글자가 커지 고 행간이 적절하며, 판형에 맞추어 비주얼한 사 진이나 그림이 많이 들어간 것만을 뜻하지는 않 는다. 문학 대중이 호기심을 품고 읽을 수 있는, 아니 읽고 싶어 하는 여러 가지 ‘꺼리’가 실려 있 다는 말이다. 쇄말로까지 느껴지는 감각적 인터 뷰, 가벼운 스타일의 (인문) 에세이, 작품의 전면 배치 등 세세한 편집 장치가 함께 가동되었기 때 문이다. 대중은 문학을 전혀 떠나지 않았고 취향 을 새롭게 맞추어 준다면, 문학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들 문예지는 지면의 혁신을 통해 증명한 것이다.
그 결과, 문예지를 ‘좋은 문학’을 위한 미적 교 육의 진지로 생각하고, 이를 옹위하는 묵직한 담 론을 곳곳에 부려두어 “그들만의 세상”을 이루 는 데 기여해 온 비평(이론)의 전면적 후퇴가 함 께 이루어지고 있다. 그 파장은 아주 단순해 보이 지만, 점차 심각해질 것이다. 이론의 소멸은 문학 출판을 오랫동안 구조적으로 지탱해 온 등단 제 도, 문학상, 창작지원금 등과 같은 계몽적, 엘리 트적 시스템의 혁신을 또 하나의 필연으로 요구 하는 중이다. 등단제도에 대한 지속적 항의, 문 학상에 대한 독자 참여 시도, 문학 단행본 출간 을 둘러싼 제도적 정비, 한국문학 전문 편집자의 소셜 포지션 재조정 등 기존 문학 생산 구조에 대한 사회적 노이즈가 최근에 늘어나는 것도 이 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여 두고 싶다. 문학의 혁신 없이 문학적 소통의 혁신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문예지의 혁 신은 항상 새로운 문학의 등장과 맞물려 왔다. 내용 없는 형식은 결국 공허의 거대한 도래를 부 추길 가망성이 높다. 배치의 감각적 실현만으로 ‘젊은’을 유지하고 이룩하기란 불가능하다. 새로운 작가의 꾸준한 발굴이 없다면, 이번에는 ‘시의 여 신’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1) 「문학잡지 Axt & Littor」, http://blog.naver.com/pchr7/220852946931, 2016년 11월 7일 접속. 필자가 문장부호와 맞춤법을 손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