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을 기획하며｜2016 우리 문화의 아젠다 혹은 쟁점들 ①국가라는 신체, 애국이라는 증상 ②‘젊은 문예지’ 등장, 소프트하고 비주얼하고 감성 친화적인 ③미술계의 위작·대작 사건 톺아보기 ④기계적 친절이 싫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첫 번째｜내설악 겨울나기 두 번째｜대한민국에서 경차 타기 세 번째｜한국 모더니즘 문학을 넘어 네 번째｜이렇게 길을 달리다 보면
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한국문학의 푸른빛을 보다 소설 부문｜분단문학을 넘어선 연대기적 가족서사 시 부문｜주체 없는 어떤 영원성 평론 부문｜흔들릴수록 더욱 뚜렷이 보이는 희망의 불빛 번역 부문｜유려하고 성취도 높은 스페인어 문장의 진경
이 계절이 몰고 온 문학계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
이 계절이 몰고 온 문학계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
글 정서린 ㅣ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80년생
3년 전 노벨문학상 시즌 때다. 러시아 대문호들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출장을 떠난 참이었다. 모스크 바에서의 3일 뒤. 일행들은 모두 들뜬 얼굴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데 나홀로 침울한 얼굴로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있는데 문학 담당이 어찌 자리를 비우느냐”는 데스크의 엄 명 때문이었다. 출근 날은 노벨문학상 발표 날이었 다. 그날 밤 상의 주인은 처음 이름을 들어본 캐나 다 작가 앨리스 먼로였다.
궁금하지도 않은 개인사를 뭐하러 길게 늘어놓느 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이 문 학 담당에게 신춘문예 못지않게 연간 가장 중대한 농사라는 ‘밑밥’을 깔 필요가 있어서이다. 당시의 기 억이 올해의 노벨문학상만큼 문학 담당이 한가(?) 했던 적이 있었나를 새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13일 저녁 8시였다. 처음엔 아무리 영 어를 놓았기로서니, 영어 듣기 능력이 이다지도 쇠 퇴했나 했다. 고개를 갸웃할 무렵, 문화부 기자들 전체를 ‘멘붕’(당혹스러울 때를 가리키는 신조어, 멘 탈 붕괴의 줄임말)으로 빠뜨린 그 이름이 들렸다. 밥 딜런. ‘설마, 설마, 아닐 거야’를 부질없이 되뇌는 순간 다시 그의 이름이 호출됐다. 도박 사이트 래 드브록스에서 유력 후보로 꼽았던 일본의 무라카 미 하루키며 케냐 출신 소설가 응구기 와 시옹오, 시리아 시인 아도니스 등 얼기설기 써놓았던 ‘노벨문학상 단골’들이 모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문학 담당이 ‘조력자’로 빠지고 ‘조력자’로 남아 있 던 대중음악 담당 기자가 불꽃 집필에 들어간 순간이기도 했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세계 문학계와 음악계가 동시에 놀라고 여느 해보다 환호와 비 난이 격하게 엇갈린 ‘사건’이었다. 1953년에는 영국 정치가 윈스턴 처칠의 웅변술에, 지난해에 는 논픽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에게 상을 안겼다지만 대중 음악가에게 노벨문학상이 가리라는 예상은 도박사들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순문학이 유독 굳건히 성채를 쌓아올리고 있는 우리 문단만 비춰 봐도 올해 한림원의 선택은 ‘파격과 반전의 드라마’였다.
“문학의 경계를 넓혔다는 데서 긍정적”(응구기 와 시옹오), “밥 딜런은 음유시인 전통의 뛰어 난 후계자”(살만 루시디)라는 화답도 있었지만, “이건 나도 그래미상을 탈 수 있단 말이지?”(미 국 소설가 조디 피코)란 야유와 뜨악함도 교차했다. 밥 딜런의 수상은 노벨문학상도 문학을 보 는 여러 시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권위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도 새삼 안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노벨문학상에 오매불망 목을 맬 것이고, 문학 기자들은 해마다 그맘때면 또 푸닥거리를 하겠지만.
올해 노벨문학상이 문단에 ‘충격과 공포’였다면 그 직후 우리 문단에서 터져 나온 폭로는 ‘충 격과 분노’라고 해야 맞겠다.
10월 중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_내_성폭력’이란 해시태그를 앞세운 연쇄 폭로 로 들끓었다. 문단 내 성폭력뿐 아니라 미술계, 영화계 등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친 추악한 성 추문들이 민낯을 드러냈다. 가장 진통이 깊고 컸던 건 문학계였다. 다수의 시인들과 소설가들 로부터 성희롱과 추행·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해자로 지목된 일부 문인들은 사과와 함께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등도 입장을 발표했 지만 ‘자유로운 영혼’ 운운하며 저질러온 폭력의 본질을 도려내는 의지라기보단 당장의 비난을 벗어보려는 미봉책이란 인상이 짙다.
지난해 신경숙 작가 표절 사태의 배경으로 지목된 ‘문단권력’도 다시 소환됐다. 가해자로 지 목된 문인 다수가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으로 시집이 출간된 시인들이거나 문지문화원 사이의 강사 등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송승언 시인과 피해자 지지 모임인 고양예고 문예창작과
지난해 표절 논란으로 침묵에 들었다 지난 5월 한강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수상 당시 한껏 기쁨에 도취됐던 한국문학은 다시 참담함에 빠져 있다.
한 문인은 “문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력하고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들불처럼 번진 전국의 촛불시위처럼, 비루하고 추악한 폭력의 현실을 끊어내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있는 한 현재는 ‘기회’이고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라 믿고 싶다.
졸업생 연대 ‘탈선’ 등은 출판사와 문단의 책임 있는 대처를 요구하기도 했다.
성폭력 사건인 만큼 선정적인 보도와 연이은 실명 공개로 비난 여론은 한껏 집중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그 이외 모든 뉴스가 가려지고 일부 문인들이 명예훼손 등 법적 대응을 시도하면서 사건은 ‘용두사미’로 잦아드는 듯 했다. 용기를 낸 피해자들만 2차 가해, 신분 노출 등에 대한 두려움에 떨게 됐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논쟁과 연대는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도 번지며 다시 세를 넓히고 있다. 문단에서는 “문학출판계의 성폭력·위계 폭력의 뿌리를 뽑겠다”며 피해자들을 품고 지원하는 작가모임 ‘페미라이터’를 결성했다. 페미라이터가 지난 11월 15일부터 작가들을 대상으로 받은 문단내 성폭력 방지 서약에는 일주일 만에 6백여 명(11월 22일 기준)의 문인들이 응원을 보냈다. 페미라이터는 문단 내 성폭력 사례 기록, 피해자와 전문기관 연계, 피해자 제보 수렴, 관련 이슈에 대한 잡지 출간 및 세미나·포럼 개최 등 다양한 활동으로 피해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지난해 표절 논란으로 침묵에 들었다 지난 5월 한강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수상 당시 한껏 기쁨에 도취됐던 한국문학은 다시 참담함에 빠져 있다. 한 문인은 “문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력하고 부끄럽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들불처럼 번진 전국의 촛불 시위처럼, 비루하고 추악한 폭력의 현실을 끊어내고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있는 한 현재는 ‘기회’이고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라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