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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언어로, 어디든, 더 멀리
작성자 이소윤
날짜 18.09.03 조회 5114

나의 언어로, 어디든, 더 멀리 
 
 
우리가 모두 여자라는 사실은 (좋든 나쁘든) 어딜 가도 주목받았다. 한국에서도 아일랜드에서도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는 우리(대산대학문학상을 비롯한 각종 문학상수상자)가 여자라는 사실을 두고 “거센 여풍” 때문에 “선 굵은 서사를 구사하는 남성작가”가 줄어들고 있음을 걱정 하는듯한 기사도 나왔다. 그런데, 동시에 작년부터 시작된 ‘문단 내 성폭력’ 미투(#Me_Too)운동을 알리는 기사들도 꾸준히 보도되고 있다. 한마디로, “거센 여풍” 운운하며 남성작가들의 입지가 좁아질까 봐 걱정하기엔, 현실에 존재하는 문단 내 남성중심성이 너무나 공고하고 체계적인 것이다. 문학계 또한 그동안 한국사회 전체에 만연한 ‘강간문화’에 공모해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강간문화’란, 리베카 솔닛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에서 사용한 개념으로 “강간이 만연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미디어나 대중문화에서 용인되거나 정상으로 간주되는 환경을 뜻한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책을 쓰는 사람들이 강간문화의 공모자들이라는 사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는 페미니스트에게 분노와 슬픔을 가져다준다. 정희진 말대로 ‘아파서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읽고 싶은 책이 점점 없어지는 건 심각한 문제다. 책을 통해 아픔을 해소하고 고통을 위로받는 사람은 이제 뭘 읽고 위로받을 수 있냐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에서 방문했던 도서관과 서점들은 한국을 잠시 잊게 해주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나는 한국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할 때 종종 그런 상상을 한다. 영화  <아가씨>에서 숙희가 히데코와 함께 백작의 서재를 부수고 책을 찢는 것처럼 성폭력과 강간문화에 공모해온 작가들의 책을 부수는 그런 상상.  그런데 유럽에서는 한 번도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없다. 더블린의 작가박물관, 롱룸, 하지스 피기스, 율리시스 서점, 파리의 셰익스피어서점, 런던의 던트북스까지 방문하는 곳마다 읽고 싶고 보고 싶은 책들로 가득했다. 서점의 특색을 살려서 제작한 에코백과 동화책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만으로도 발길을 멈추기 충분했다. 
 
물론 유럽문학이라고 해서 성차별과 강간문화로부터 온전히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 때문에 기록되지 못한 목소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책이 생각난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라는 책인데, 아마 이 책의 작가도 아파서 책을 읽은 사람 같다. 작가는 자살시도에 실패하고 나서 유럽으로 떠난 사람이다. 죽은 사람들, 특히 죽은 여성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삶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죽은 여자들이 남긴 글을 읽고 여행기를 썼다. 예를 들어, 작가는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의 국민작가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아내 ‘노라 바너클’의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뮤즈가 되기엔 너무 주체적’이었던, 영국출신의 아일랜드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모드 곤’의 복잡한 인생사와 내면을 이해하려 애쓴다. 
 
실제로, 우리가 방문했던 영국과 파리랑 다르게 아일랜드는 유일하게 피식민국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였다. 그래서인지 거리 곳곳마다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그러나 여성독립운동가의 동상은 없었다), 언어와 주체성에 관한 고민도 느낄 수 있었다. 예컨대 더블린에서 만난 작가 존 밴빌과의 인터뷰에서 ‘게일어가 아닌 영어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존 밴빌은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영미문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아일랜드가 게일어를 잃은 것은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국 역시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피식민국의 역사를 갖고 있기에 언어의 상실이 주체성의 상실과 어떻게 직결되는지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러한 상실의 역사를 갖고 있는 언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었다. 파리 한국어문화원에서 공부하는 수강생분들은 한국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계신 분들이다. 사실 수강생분들과의 만남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것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 자체보단 경청과 기다림이라는 태도 때문이었다. 나는 언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듣기/읽기/말하기/쓰기 중에 ‘말하기’가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새로운 언어로 처음 소리 내어 말하는 건 매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용기를 가능하게 하는 건 ‘잘 들어주는 사람’의 존재다. 한국문화원에서 만난 수강생분들은 정말 ‘잘 들어주는 사람’들이었다. 한국어로 각자 자기소개 하는 시간에 아무리 더디고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수강생분들이 서로를 기다리고 경청하는 태도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누구도 서투름을 재촉하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강생 분들은 우리가 프랑스어와 영어로 더듬거리며 자기소개 하는 것까지 경청해주셨다. 이후의 대화는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한유미 선생님께서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셨기 때문에 두 배로 시간이 걸렸음에도 그걸 다 기다려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고 좋은 질문들을 던져주셨다. 기억에 남는 질문으로는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오프라인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수상자가 모두 여성이라서 (여성들의) 파워가 느껴지는데 한국의 여성운동에 변화가 있다고 생각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여성으로서 글을 쓰는 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 하냐’는 질문도 굉장히 기억에 남는데 당시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여성의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쓰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에 대표성이 부여되고 나의 실수나 한계가 여성 모두의 실수로 비춰질까봐 조마조마하고 두렵기도 하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 나에게 치유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책임감이 요구되는 일이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투쟁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언젠가 수상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 사회가 될 때, 비로소 성평등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말해서 나이 많은-고학력-남성-등단자 기성 문인들이 다 해먹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젊은-대학생-여성-신인 작가들이 등장하니까 신기해하고 견제하고 놀라워하는 게 더 이상하다. 
 
파리까지 가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공감 받을 수 있을 거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우연히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우연히 살아남아서 정말 멀리까지 왔구나. 잘했다. 살아남길 잘했어. 멀리까지 오길 잘했어. 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진짜로 다 잘 살았으면 좋겠다. 보란 듯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디든 갔으면 좋겠다. 이번엔 파리까지 왔지만 다음엔 더 멀리. 
 
“원하는 것에 접근을 허가받지 못한 사람은 고무줄을 뒤로 길게 잡아당긴 새총과 비슷하다. 물론 실망해서 목표를 때려치우고 긴장을 깨버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따르지만. 좌절하고 무시당하고 부정당하고 단념하는 긴 세월은 돌멩이를 뒤로 잡아당기고 목표를 조준하는 시간일 뿐이다. 새총이 발사되는 순간이 끝내 오지 않을까봐 팽팽한 긴장에 몸이 갈기갈기 찢길까봐, 추진력이 모자랄까봐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 마침내 손을 놓았을 때, 그녀는 대서양 너머까지 날아갔다(죽은숙녀들의사회, 167p.).” 
 
 
PS. 
   기행 내내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나한테 돈쓰는 것도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어색한데 내 돈도 안내고 맛있는 밥 먹고 좋은 숙소에서 생활하니까 더 그랬던 것 같다. 최대한 즐기려고 했음에도 즐거움보다 감사함과 어색함이 앞섰던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라도 더 좋은걸 나누려고 고생하신 담당자께 정말 감사하다. 
   파리는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기 최적화된 곳이었으며, 런던은 덕질 하기 위해 최적화된 곳이었다. 그렇지만 계속 살기에는 더블린이 최고다. 트램 타고 가다가 어디에 내려도 기네스 맥주를 파는 곳이 더블린이다. 무엇보다 더블린의 아담하고 소박한 거리와 강이 아름답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제일 좋았던 건 사람들이다. 밤에 맥주나 와인을 마시면서 같이 나누었던 이야기들 덕분에 내가 덜 외롭고 더 행복할 수 있구나-라는 걸 알았으니까. 같은 포인트에서 분노하고 같은 포인트에서 웃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기 때문이다. 
 

1) "문학평론가 심상협씨는 "최근 문학계에 불고 있는 여풍은 독서시장의 주축이 20~30대 여성이라는 통계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며 "젊은 여성작가들이 문단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는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선 굵은 서사를 구사하는 남성작가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거센 여풍.. 대산대학문학상 전부문을..> http://munhaknews.com/?p=12121
 
2)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는 나만의 이유가 아니다.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받는다. 기분이 전환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픈 상황에서 딴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덜 아프게 된다. 좋은 책은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 생명, 세로토닌(행복감을 생산하는 뇌의 화학물질)이다. 위로는 깨달음에서 온다. 이 위로가 몸에 습관이 되어 독서의 즐거움에 중독되면 다른 일에는 흥미가 떨어진다.(정희진처럼 읽기,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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