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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학기행 B그룹]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띄우는
작성자 이인실
날짜 12.03.07 조회 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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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새벽 4시에 대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탔습니다. 설연휴 끝이라 다른 표를 구할 수 없어 남들보다 이른 출발을 해야만 하는 저에게 날아 온 조심해서 잘 다녀 오고 힘내라는 문자 메시지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 걸까요. 아마 저는 이번 여행이 나를 많이 힘들게 하리란 것을 예감 했었나 봅니다. 그렇게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고 힘겹게 서울역을 지나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지만 모임 시간까지는 아직 세시간이나 남은 상태였고 저는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처음 와보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마냥 그렇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어김없이 정직하게 지나가 주어 사람들이 약속 장소에 하나 둘씩 도착했습니다.
  우리들은 요란한 수속을 밟기 시작했고 출국장 안으로 들어 갔습니다. 비행기는 육중한 제 몸을 잃으키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스튜어디스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하며 사람들을 챙기는 내내 저는 여행이 주는 설레임과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끼며 비행기가 어서 출발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기만을 바랐습니다. 기장이 코맹맹이 소리로 이륙을 알리고 잠시 후 비행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습니다. 우습게도 그 때 저는 마치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불안함을 누르며 소설을 읽는 사이에 어느덧 일본이었습니다. 숙소에 돌아온 저는 두려움을 잊은채 일행들과 유쾌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공항, 기내. 여행을 시작하고 이틀이 지났지만 내가 본 것은 비행기의 내부와 스튜어디스, 공항, 숙소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낯선 사람들 틈에 내가 끼어 있다는 생각이 저를 달뜨게 했습니다. 영국으로 가는 12시간, 밥 먹을 때를 빼면 거의 잠을 자던 하연이와 수시로 “비어”를 찾으며 스튜어디스를 부르는 상욱이 사이에 끼여서 덩달아 “비어”를 외치며 십자수를 놓았습니다. 다소 불편한 감은 없지 않았지만 은주의 말처럼 우리들은 정말 이코노미 체질이었던지 잘 견뎌 냈지요. 기내의 건조하고 삭막한 시간을 잘 참아준 우리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히드로 공항은 청량한 공기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공항을 빠져 나와 보니 이미 해가지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오는데 한시간, 숙소는 피카디리서커스 부근이었고 시내 한 중간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분 일초를 아까워하며 서둘러 짐을 풀고 밖으로 나왔지요. 어둠이 깔린 런던의 거리를 웃고 장난치며 돌아 다녔습니다. 그날은 재미난 뭔가를 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한없이 즐거웠습니다. 아마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설레임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저는 소중한 사람들이 한없이 그리웠습니다.
  시차 때문이었는지 모두들 새벽에 잠이 깨버렸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런던의 새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이 불고 간혹 떨어지는 빗방울이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기는 했지만 참 차분하고 가라 앉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곳곳에 성당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있었지요. 마치 그림 엽서 나올 법한 그런 건물들이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어 그 곳에 어울리지 않는 제 자신이 더 작아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여행하는 내내 그런 사원이나 교회들을 보면서 얼마나 인간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으면 저렇게 큰 건물을 지어서라도 신의 발치 아래 평안하게 잠이 들기를 바랐는지 안쓰러운 생각에 건물이 커질 수록, 화려하고 아름다워질수록 더욱 가슴을 쥐어 짜야만 했습니다.
  아침을 먹을 만한 곳을 찾다가 1666년 영국 대화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웅장한 기념비를 봤습니다. 콩과 베이컨 계란후라이가 나오는 느끼한 전통 영국식 아침을 먹는 내내 대구 지하철 참사를 생각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300년도 전에 일어난 화재를 기억하기 위해 도시 한 복판에 커다란 비석을 세워 두고 있었습니다. 그 비석은 마치 가슴에 꽂아둔 거대한 대못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년 전에 일어난 화재도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매서운 바람을 뚫고 런던 타워로 향했습니다. 타워로 가던 우리를 반긴 익숙한 글씨하나가 보였습니다. “여보세요-YABO SAYO(야보사요)" 한국식 식당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파는 것은 벤토, 돈부리, 기무치였습니다. 나라에 힘이 없음이 안타까운 순간이었습니다. 반대로 런던 타워에는 거대한 대포, 칼, 갑옷, 총, 안장 등의 제국주의의 힘을 나타내는 많은 전시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른채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너무나 옹졸한 생각이지만 갑자기 영국 사람들이 싫어졌습니다. 그것은 대영 박물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한국관이 아주 조그마한 것에 오히려 감사를 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 가지 않았다는 일차원적인 안도감이었지요. 커다란 건물 아래서 잠자고 있는 유물들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말입니다. 저는 참 이렇게 유치합니다.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런던브리지 위에서 바라 본 영국은 익숙한 말 그대로 우울했습니다. 바람은 싸늘하고 습했으며 하루 종일 흐리게 안개가 끼어있었지요. 템스강을 사이로 최신식 건물들과 낡은 건물들이 뒤섞여 있고 그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는 빨간 이층 버스가 묘한 조화를 이루어 화려하진 않아도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날이 저물고 그렇게 고대하던 오페라를 보았습니다. 배우들의 입냄새를 맞을 만큼 가까이서 보느라 목이 좀 아프긴 했지만 소름이 끼치도록 감동적이었습니다. 영어 대사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감동에는 별 무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시내 곳곳에 자리 잡은 연극과 뮤지컬 공연장을 보면서 저는 다시 한번 유치해져서 영국 사람들을 많이 부러워 했습니다. 너무 친절하다 못해 경직되고 딱딱해 보이던 영국 사람들을 미워했다, 부러워했다 하며 그렇게 영국을 떠났습니다.
  파리의 첫인상은 레스토랑 “파노라마” 때문에 너무 좋아졌습니다. 남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빙을 하던 레스토랑 파노라마의 웨이터 아져씨는 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한국의 웨이터들은 근엄하고 엄숙해야만 최고급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항상 딱딱하게만 굽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서빙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유쾌하고 흥겹게 서빙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일에 강한 자부심이 없다면 그럴 수 없겠지요. 저는 그런 그들의 사고 방식이 부러웠습니다.
  또 건물들은 너무 화려하게 조각되어무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그 결과 더 이상 아무런 감흥이 일질 않았습니다. 제가 예술에 너무 문외한인 탓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펀던과 파리에 있던 중고 책방은 제 마음에 불을 지폈습니다. 한국에서는 향후 10년간 절대 발간되지 못할 파격적이고, 기괴하고, 엽기적인 내용을 답은 화보집들. 그 곳은 발길에 채이는 사람은 거의 다 한국인이던,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차 이곳이 한국의 테마 파크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하는 루브르 박물관보다 더 저를 매혹시켰습니다. 우리 세명은 그 곳에서 세 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속에 파묻혀 보냈습니다. 솔직히 대영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찾고, 루브르에서 파라오의 데드마스크를 큰 소리로 찾아 다니던 한국인들은 너무 부끄러워서 일본인인척을 한적도 있고 보니 더 이상 박물관에 있기도 싫었습니다. 너무 속이 좁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을 관광하며 가장 많이 본 것은 아마 개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파리도 마찬가지여서 피해 다니느라 무척 애를 써야했지요. 고풍스런 거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불쾌한 냄새들과 치운것 같지 않은 더러운 거리, 템스 강과 마찬가지로 누런 흙탕물인 센느강. 부러운 것도 많았지만 점점 더 제가 그려오던 그런 유럽의 모습에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저의 생각을 한꺼번에 날려 버린 곳이 잇습니다.
  몽생미셸.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름답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지금도 머물고 있다는 그 곳은 화려한 멋은 없었지만 조용하고 한적하며 아기자기했습니다. 작은 오솔길 사이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끼고 늘어선 작은 상점과 식당들, 사방에서 지져귀다 그것도 모자라 식당조차 제 집처럼 드나 들던 멧새들, 너무 선명하고 파래서 눈이 아프던 하늘, 끝없이 넓게 펼쳐지던 갯벌, 지금도 그 풍경들을 그리면 왠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밀물 때는 섬이되고, 썰물 때는 육지가 되는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대한항공의 광고 카피처럼 꼭 소중한 사람과 다시 한번 이곳을 오고 싶습니다. 이번 유럽 여행 중에 제가 가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이곳을 두고 저는 로마로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만남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일행들은 또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덜컹거리는 좁은 침대 기차, 쿠셋에서 3일밤을 보내야 했으니까요. 아래 층에서 잠을 자면 지면에 가까운 탓인지 심하게 울렁거렸고, 윗층에서 잠을 자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불편했지만 혹시나 떨어지지나 않을가하는 생각에 잠을 설쳐야만 했습니다. 물론 씻는 것도 문제가 많아 우리는 거의 3일동안 서로의 떡진 머리와 꾀죄죄한 얼굴을 보며 지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몰골로 우리는 리오또 교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어찌나 창피하던지 어디로 숨고 싶었습니다.
  리오또 교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한국분이셨던 부인은 우리를 위해 너무 과도한 음식을 준비하시는 바람에 우리는 세시간 동안이나 식사를 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꾸역꾸역 먹었던지 나중에는 목구멍까지 올라올 지경이었는데도 사모님은 더 먹으라고 권하셨습니다. 정말 난감했지만 너무 감동적이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파리의 클로드 무샤르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리오토 교수님은 우리를 한 사람의 예술가로 대우해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큰일을 해야 될 사람들이니 나이가 어리다고 절대 기 죽지말라는 말씀도 해주셨지요. 그 날 밤은 얼큰하게 오른 술기운과 오랜 여행으로 쌓인 피로로도 쉽게 잠들지 못할 만큼 황홀한 경험이 되어 제 가슴에 남았습니다.
  또한 “차오”와 “본조르노”의 차이는 저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번 여행에서 제가 얻어온 값진 것들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나와 친한 사람에게는 반말인 차오를,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존대말인 본조르노를 쓰는데 여러번 만난 사이에서도 계속 존대말을 한다면 나는 당신과 상종하고 싶지 않소의 표현이 된다는 사실. 우리는 존대가 상대방을 위한 매너이자 존중의 의미를 가지는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그 반대라는 사실이 너무 놀라워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달까요.
  어디를 프레임에 넣어도 그림이 되던 시칠리아의 한적한 해변은 동양인인 나를 신기해하며 아버지에게 저 사람은 눈이 왜 저렇게 생겼냐고 묻던 5살 꼬마 여자 아이의 눈 처럼 순수하고 깨끗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곳에서의 한 나절이 그만 너무 쓸쓸해져 버려 온갖 폼을 잡으며 해변을 걸어 다녔지요. 그 시간 나즈막히 코를 골며 곤히 잠들어 있을,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옆에 없음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다시 로마로 돌아온 우리들은 반나절의 짧은 시내관광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지루한 12시간이 지나 일본을 거쳐 우리들은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절대 운동 부족자인 나에게는 너무도 피곤하고 무리였던 여행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에 저는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이 짧은 글에 일일이 다 쓸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내 생활이 더욱 활기차고 풍요로워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여행을 마치고나서 너무 많이 아팠습니다. 피곤 때문에 일어난 단순한 몸살이 아니라 뭔가를 잃어버리고 온 것 같아서 아픈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여행할 때 가지고 갔던 짐 조차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해결책도 없이 그저 시름시름 앓기만할 뿐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린 채 혹독하게 앓고 나면 더욱 성숙해 지라라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그냥 이렇게 견뎌 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값진 여행을 하고 돌아와 이렇게 폐인아닌 폐인이 된 유일한 내 변명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홍역을 앓을 기회를 준 대산문화재단과 불평불만 많은 우리를 끌고 다니느라 고생이 많았던 박현준 쌤, 끝까지 기행문을 제출하지 않아 속을 태운 전성우쌤에게도, 여행내내 함께해준 하연이와 상욱이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내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한 앞날을 기도하며 두서없는 기행문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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