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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학기행 A그룹] 유럽문학기행문
작성자 김성현
날짜 12.03.07 조회 9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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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하지만 앞으로 나가기 위해 물을 건너야 한다는 것이 우리네 아이들의 슬픔이다. 나의 여행은 섬에서 시작된다. 스무 해 동안을 힘들게 끌고 다닌 지쳐버린 섬. 그 누구에게도 내밀한 마음의 샘을 허용하지 않았던 고독한 무인도다. 사람이 만든 새가 그 섬을 태우고 사람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섬을 뜬다. 영종도냐고? 천만의 말씀. 삼면이 바다로 한 면이 철책으로 막힌 바로 그 섬이다. 나의 목숨을 맡긴 새는 무사히 자기가 둥지를 튼 섬에 나를 내려다 주고 또 다시 뜨기 위해 바쁜 채비를 하네. 가깝고도 멀다는 상투어는 상투를 튼 영감님의 말씀처럼 지당하고, 나막신의 후손들의 언어처럼 막막하다. 단 한 끼의 기내식을 품은 배가 채 꺼지기도 전에 디딘 발은 가까웠고, 단 한 채널의 익살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는 귀는 멀었다. 출입국 기록 카드에 잘못 쓴 부분을 친절하게 짚어주던 그녀의 미소도, 또 다른 잘못을 매섭게 추궁하던 그의 인상도, 성급한 일반화의 유혹이었을 뿐, 그 어떤 역사와도 무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행은 그 날 밤을 갈아타기 위한 밤이 아닌 하나의 역사로 만들기 위해 모국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토론 공화국의 국민성이 어디로 간들 사라지랴. 구체적인 내용을 물으신다면, 그 무엇인가의 축소판이었다는 단 세 마디로 얼버무리고 싶다.
네 번째로 도달한 섬은 멀고도 가까운 섬일까. 두 끼의 기내식으로도 성이 차지 않은 배가 지루함 앞에 굴복하고도 한참 후에 디딘 발은 멀었으나, 단 두 마디의 음성에도 본능적으로 쫑긋거리는 귀는 가까웠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학자가 있었으니, 영어를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이중인격(?)에 다가서게 되는 것일까. ‘익스큐즈미(Excuse me)’를 남발하며 쾌감을 느끼는 나의 인격은 어젯밤 그가 지적했던 ‘자기 부정’일까. 백인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이 든 가방을 절대 반지 목걸이처럼 품에 안고, 들끓는 욕망을 온통 쏟아버릴 들끓는 화산이 이 유럽 대륙의 어디에 숨어 있을는지 자문해 본다. 스쳐지나간 베커 스트리트 지하철역의 벽마다 타오르는 홈즈의 파이프 연기를 맡아가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피카디리 서커스에 당도했다. 템스 강이 흐르는 런던의 밤거리를 걸을 때 어느 교육적인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듯도 하였으나, 차가운 기운이 생생한 볼을 꼬집어 볼 필요도 없이 생시였다. 지지 않는다던 해가 거짓말처럼 떨어졌으니 지치지 않겠다던 섬도 군말 없이 곯아떨어진다.
 『Myths and Legends from Korea 한국의 신화와 전설』.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영국 셰필드 대학의 제임스 그레이슨 교수님이 집필하셨다. 석학을 대한다는 기쁨으로 저서를 읽어낸 혈기가 셰필드로 향하고, 이 글의 주인은 어떤 분일까 하는 궁금증은 모자 쓴 노신사로 향한다. 한국과 오랜 인연을 맺으신 선생님께서 우리를 위해 ‘외국어’로 말씀하시는 동안, 철강 공업과 풀 몬티의 추억을 간직한 경사로를 셰필드의 전차가 기어오른다.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나 되는 대학에 한국학이 이렇게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니. 도서관에 가득한 모국의 책들은 하나하나마다 사연을 간직한 듯하다. 셰필드 대학의 별미(그릇 모양의 빵 위에 고기를 얹은 것)와 백미(유서 깊은 건물 속 커다란 방에서 학생들이 한꺼번에 시험을 치르는 장면)를 융숭히 대접받은 나는 석학을 향해 거침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버텨 본다. 메이저 종교들이 이야기하는 기적이든지, 주몽 신화, 수로 신화 등의 내용이든지 간에 비과학적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후자만을 원시적이고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해야 하는지-일종의 종교 회의론-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만약 종교가 거짓된 것이라면 무가치할 것이지만,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어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시는 말씀이 가슴깊이 와 닿았다.
 더 뜨거워진 혈기와 더 달아오른 궁금증은 섬의 북단-스코틀랜드-까지 치고 올라갔지만 너무나도 고단하여 하룻밤을 양보했다. 신비스럽게 떠져서 에딘버러 성으로 향하는 눈은 백파이프 소리의 사주를 받았으리. 요새처럼 튼튼하지만 낭만적이지는 못한 스코틀랜드의 남한산성은 특유의 짙은 회색 톤으로 바다를 낀 도시 전체를 휘감고, 안에는 블러드 메리(Bloody Mary, 메리 여왕)가 인형으로 되살아나 약간의 음산함마저 풍기고 있다. 그 다음으로 헐떡이며 오른 사화산(死火山)은 바람을 불러내어 여객의 머릿결을 씻겨 주었을 뿐, 절대 반지를 삼켜 버리기엔 이미 늦어 버린 지 오래였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음식점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 ‘하기스(haggis)’를 선택하지 못할 만큼 닫혀 있던 나의 마음도 시내 한 복판 동상의 주인공인 월터 스콧의 시 앞에서는 답답한 가슴을 열어젖힌다. 곳곳에 드러누운 벤치마다 기억할 만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스코틀랜드 국립 갤러리 앞의, 어느 전사(戰士)들을 기리기 위한 비석처럼 인생의 분투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경의는 단단하다.
 스코틀랜드에서 유명한 근대 화가가 누구냐고 물으니 람세이(Ramsay)와 래번(Raeburn)이란다. 특히 래번의 스케이트 타는 사람 그림은 갤러리의 간판스타라는데, 한 쪽 다리를 들고 빙판을 가르는 신사의 자세에서 속도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것은 빙판을 딛고 있는 다리와 들고 있는 다리, 그리고 몸통 사이의 각도가 매우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색적인 작품을 감상한 것에 기쁨을 느끼며 갤러리를 나서려는데, 안내원은 자꾸 모네, 고흐 등의 이름을 들먹이신다. 처음에는 잘 못 알아들어서 람세이와 래번이 그들 못지않다는 뜻인 줄 알았으나, ‘2층’이라는 말에 집중하니, 위에 올라가면 그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다는 놀라운 충고임을 눈치 챘다. 뜻밖의 장소에서 보게 되는 대가들의 세계. 고흐의 구불구불하면서도 풍경의 정곡을 찌르는 붓 터치는 세계 어디를 가든지 생생하게 살아있구나. 모네, 세잔, 쿠르베, 코로 등등. 지식이 부족하여 사설은 짧지만 난생처음 뜻밖의 곳에서 직접 접하는 대가들의 손길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보지 말라는 직원의 호들갑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로 반갑다.
 다음날은 바다로, 대서양으로. 지구의 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지만, 섬들을 가둔 물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곤 하니, 둥근 지구를 한 눈에 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이곳은 브리튼(Britain)의 브라이튼(Brighton). 귓가에 느껴지는 바람에는 곧 사그라져 버릴 것을 아쉬워하는 파도 내음이 짙게 배여 있어 대양에 임박했음을 속삭여준다. 발이 숙숙 빠질 때마다 차그락 차그락 부대끼는 자갈밭을 힘겹게 갈아나간다. 나의 수확은 비로소 맞이하는 서늘한 해풍. 태평양으로 돌아가기 전에 대서양의 짠내를 단 두 벌 중의 한 벌인 바지에 한껏 적셔 주자.
 맘마미아(Mamma Mia). 본토에 와서 굿판을 본다. 쿵쾅거리는 경쾌한 리듬일진데, 울음이 느껴지는 것은 웬일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의 심장 박동 소리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댄싱 퀸, 영 앤 스위트, 온리 세븐틴(dancing queen, young and sweet only seventeen).' 쿵쾅 쿵쾅. 발랄한 노래 소리가 심장과 호흡을 맞추고 홀 안에 가득한 경쾌한 울음소리는 세븐틴(seventeen)이 왕년의 회상임을 추측케 한다. 하긴 나도 이미 세븐틴은 지났으니. 결혼할 상대를 확보한 여인은 엉뚱하게도 1/3의 잡힐 듯한 아버지 당첨의 확률에 목숨을 걸고 유전자가 아닌 사랑을 시험하려든다. 부모의 운명을 통해 자기 사랑의 미래를 가늠하려 하는가. 떠나가는 것은 항상 남자요, 기다리는 것은 항상 여자라고 하니, 웨딩드레스를 놓고 어머니가 딸에게 부르는 그 노래-과연 어떤 제목일까-는 대를 이어 반복되는 여성의 한을 집약해 놓아 압권이고, 연이어 그 어머니가 옛 애인을 향해 부르짖는 ‘더 위너 테익스 잇 얼(the winner takes it all)’은 인류의 애정사를 압축해 놓아 버금이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일대일대응이어야 하는가. 과연 그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잘은 모르지만 저 젊은 한 쌍만큼은 그들을 비추는 저 달 속의 토끼들이 빚어내는 찰떡처럼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길 바란다. 소품하나 옮기는 동작도 춤처럼 유연하고, 영어 딸리는 이들에게는 뇌가 아닌 심장부터 내놓게 만드는 아바(ABBA)의 심폐소생술은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날은 여왕의 버킹엄. 이곳이 예전에 온갖 권력이 집결했다던 유니언 잭의 본산이구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고, 한때 런던으로 통했고. 지금은 워싱턴으로 통한다고들 하는데. 내 길은 오늘 단지 런던으로 통해, 과거의 영화로움을 복원하려 한다. 여왕은 못 볼지라도 총리라도 보려고 다우닝가의 경비가 삼엄한(?), 그러나 어떤 기와집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 삼엄한 저택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 봐도 감감 무소식. 아쉬운 발길을 트라팔가 광장과 빅 벤을 거쳐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 갖다 대었지만 고귀한 이들만의 추도 예배를 위해 관광객은 출입을 금해달란다. 백작스러워, 공작스러워 보이는, 어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과시하려는 듯한 남녀들이 모여든다. 내가 낄 곳이 아니어서 발길을 돌려 타워 브릿지로. 배를 통과시키기 위해 위로 꺾여서 열린다는 다리. 사람이 다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확 들어 올려져 꺾여 버리면 어쩌나 하는 엽기적인 상상도 했다. 초등학생일 때 어느 날 갑자기 TV에서 본 바로 그 장면에서 받은 충격인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의 황금 어장에서 마구잡이로 건져 올린 포획물들이 싱싱한 비늘을 반짝거리며 널려있는 대영 박물관. 동서고금의 월척들을 한 상에 차려 놓은 투박함을 향해 다채로운 문명들의 화려함이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유혈 사태는 없어야 할 것이니, 입장료는 무료, 누구든 한 입에 지구를 맛볼 수 있다.
 매니아의 한을 풀기 위해 뮤지컬 ‘위 윌 락 유(We Will Rock You)’를 보러 간다. 퀸(Queen)의 대단한 팬이 한국에서 행차하셨으니 멋있게 한 판을 벌여 달라. 알아듣기 힘든 영어에 웃음을 터뜨리는 관객들, 머쓱한 나. 하지만 미래에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자 문명의 비정함을, 프로그램화되어 가는 음악에 대한 반발을 통해 이겨낸다는 핵심적인 발상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시종일관 무대를 받쳐주는 스크린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신나고 유쾌한 분위기에 걸맞게 슈퍼스타 퀸의 음악에 맞춰 어깨를 흔드는 관객들은 주로 젊은층이다. 퀸의 노래들을 패러디한 다양한 유머들. 이들에게 대중음악은 이미 생활의 일부이며, 철학이며, 함께 만들어 가는 훌륭한 문화다. 비록 영혼을 뒤흔드는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목소리는 없지만, 관객들에게 꿩의 맛을 느끼게 해 주려고 열정을 쏟아 닭요리를 만드는 그들의 노력에 감사한다.
 어제는 문학 기행을 통틀어 최고의 밤, 오늘은 가장 아쉬운 아침. 런던의 거리는 한결 같이 질서 있고 깨끗하구나. 나는 그 질서와 청결을 사랑하게 되었다.
 
 파리의 지하철. 바이올린을 만지작거리는 악사를 무심코 지나친다. 그런데 곧 이어 울려 퍼지는, 여객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음악소리. 예술과 자유, 파리의 숨결은 땅 속까지 파고들어 나의 심금까지 노리는데, 곧 차가 도착하여 가까스로 도망쳤다. 허나, 차 안에 또 다시 울려 퍼지는 음악이 지하철공사의 호의인 듯 싶었지만, 알고 보니 저기 문 앞에서 아코디언을 꼭 붙잡고 있는 악사의 생계였다. 이번에는 심금과 주머니를 동시에 노리고 있구나. 숙소에 짐을 풀고 향한 곳은 베르사이유. 드넓은 광장 끝에 멋진 궁전이 버티고 있다고 이것이 끝이구나 하고 되돌아가면 큰일이란다. 궁전 뒤에 펼쳐진 거대한 정원과 호수야말로 궁전의 주인. 절대 왕정이 머물던 곳에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을 듯싶지만, 거대한 나무들의 행렬이 동서남북으로 회랑을 이루고 있다. 나는 순간, 이 광대하고도 오밀조밀한 정원 어느 곳에 태양왕의 눈길을 고대하는 한 그루 나무처럼 숨어버리고 싶은 위험한 망상에 휩싸였다. 하지만 십자가 모양으로 판 호수에는 소탈한 태양이 떠 있을 뿐이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 라는 것은 동서양이 따로 없구나. 짐이 곧 국가라고 하였던가. 옷가지와 컵라면 몇 개로 가득 찬 무거운 배낭.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나에게는 그 짐이 곧 국가일 뿐이니라.
 나의 뇌리 속에 조그만 젓가락처럼 서 있었던 에펠탑. 실물을 대하니 그 젓가락들을 수억 개를 이어 붙여도 부족할 듯싶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끝까지 오르니 거센 바람에 숙소에 두고 온 두꺼운 점퍼가 무척이나 그리워져 목도리를 질끈 매고 빨리 돌아갈 까 싶었지만, 파리의 야경을 수놓는 수 만 개의 화려한 불빛들이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버린 추위를 한껏 녹여주어, 저 밑에 어느 궁전 속의 두터운 장작이 불타오르는 왕의 침실보다도 따뜻해졌다. 개선문, 노틀담, 신개선문 등등. 하나도 놓치지 말고 카메라에 담아 두어야지. 이 밤, 나는 이 거대한 도시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나는 이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파리에서 살게 되는 순간, 내가 갈망했던, 에펠탑이 보여주던 파리는 오히려 더욱 멀어질지도 모르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이 밤에 내가 원하는 파리를 다 가진 듯 하여, 여한 없이 내려올 수 있었다.
 다음날은 오를레앙의 시인 클로드 무샤르 선생님 댁으로. 직접 만드신 파이와, 귀한 손님이 올 때만 창고에서 꺼내 오시는 것이 틀림없는 와인을 들며, 유럽 여행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시에서의 이미지를 비롯하여, 글쓰기를 위한 발상을 얻어내는 동기에 대한 논의는 뜨거웠다. 선생님께서는 시어의 시각적 배열과 퍼포먼스를 적극 활용해 가며 창작과 발표를 하는 어느 일본 시인에 대해 소개해 주셨는데, 그것은 쇼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시각화와 퍼포먼스를 통해 더 실감나고 진솔하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설명에 그대로 고개가 끄덕여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하나가 가진 뜻이고, 단어의 소리나, 글자로 표시되는 기호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다양한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소리의 음악성은 물론 표기의 시각성에까지도 중점을 둔 작품들이 눈에 띄니, 이들을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격이라고 무작정 배척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 옛날 원맨쇼를 하던 고대의 음유시인들이 현대에 되살아나려고 꿈틀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틀담에서 다시 파리의 아침을 맞는다.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를 거행하는 장면을 본다. 장중한 오르간 소리는 천 겹의 무게로 꼽추의 한이 벽이나 천장, 혹은 바닥에서 새어 나오지 못하게 짓누르고, 사제가 끈 달린 향로를 흔들 때마다 퍼지는 향 내음에 관광객의 속물근성도 씻은 듯이 사라진다. 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것도 빅토르 위고가 이야기했던 ‘운명’일까. 지금 이 조그만 팔다리의 몸부림도 어떤 거대한 바람이 규정지어주는 갈대의 흔들림에 불과한 것일까. 애욕으로 가득 찬 좁은 속내도 굽어버린 허리보다 더 비뚤어진 ‘옵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바람의 장단에 맞추어 굽으면 굽은 대로 갈대처럼 살아가자. 그 갈대가 바람에 꺾여 루브르로 날아간다. 착륙한 곳은 비너스의 발 밑. 단정한 머리와 고상한 표정이 지하철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를 닮았구나. 더 이상 묻지 말라. 우글거리는 사람들의 플래시가 나의 모나리자를 훔쳐가 버릴까 봐 두렵다.
 건물의 단면도를 보는 듯한 건물인 퐁피두 센터 앞에서 희곡을 번역하시는 한유미 선생님을 만나 뵈었다. 번역의 단위에는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단어? 문장? 문단? 작품 전체? 완벽한 번역을 위해서 어순까지 원어를 따르려고 하는 번역가들도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놀랐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그런 지엽적인 특징보다는 작품 전체의 모양을 온전하게 옮겨 내는 것에 중점을 둔다고 한다. 어차피 100% 완벽한 단어와 문장의 전환이 불가능하다면 전체적이고 핵심적인 의미를 정확하게 옮기는 것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듯싶다. 한편으로는 어느 작가의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그의 언어를 배울 필요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대신 감내해 주시는 분들께 우선적으로 감사 드려야만 한다.
 파리의 마지막 밤, 샹젤리제 거리 위에 곧 사라져 버릴 미미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간다. 이 거리를 밝히는 수 만 개의 불빛 중에 단 한 개도 가져가지 못하는 아쉬움. 그러나 가져가지는 못할지라도, 바로 이 밤에 이 곳에서 아예 움켜줄 수는 있다는 것을 에펠탑이 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친구여, 그런 미미한 플래시는 터뜨리지 말게. 그 소리에 놀라 내 머리 속에 깃든 불빛들이 달아나 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대신 루브르의 비너스를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면 고맙겠네. 그 비너스보다 아름다운 파리의 여인, 그 여인보다 아름다운 샹젤리제를 나는 사랑하고 싶었다.
 
 ‘황태자 콤플렉스’로 규정지은 온갖 감상을 이겨내기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향한다. 도시 곳곳에 퍼져 있는 대학의 건물들과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성은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주점’은 어디에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튼튼하면서도 여유와 낭만을 갖춘 성은 황태자와 하녀의 사랑을 갈라놓는 무심한 강줄기를 조망한다. 하지만 훌륭하다 강이여, 하찮은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말고 장난 같은 사랑이 아닌 진실하고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로 나를 이끌어 달라. 반나절 만에 황태자의 추억을 깨끗이 정리하고 대도시 프랑크푸르트로 미련 없이 향했다. 도심 한 복판 괴테의 동상은 문인의 위상이 이순신 장군과도 같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괴테도 일종의 ‘구국의 성웅’일 수 있을까. 하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을 감상에 젖게 만든 베르테르의 위험성은 철저한 반역이었을지도 모르리라. 그 위태로운 시기를 겪어내는 것은 성웅 괴테가 아닌 보통 젊은이들의 몫이다. 거리 저 편에서 들려오는 분노의 고성(高聲). 오늘도 청춘의 대첩은 끝날 줄을 모르니, 고층 빌딩이 즐비한 최첨단 프랑크푸르트에도 구식 질풍노도의 물결은 그칠 날이 없다.
 문학의 성웅이 괴테라면, 통독의 성웅은 누구일까? 통일의 경사에 수도의 자리를 내준 옛 수도, 본을 찾는다. 본 대학에 계시는 성상환 선생님을 만났고, 그 누구보다 본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김인겸 선생님께서 VIP만이 받을 수 있는 안내를 해 주신다. 옛 시청 건물이 들어서 있는 광장 한 복판의 베토벤 동상. 대중음악에서 나의 우상이 퀸이라면, 클래식 음악에서는 베토벤이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잠시 할까. 나는 시선(詩仙) 이태백보다는 시성(詩聖) 두보를 더 존경한다. 천재적인 예술가의 감각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인생의 고난을 몸소 겪어 보고는 다른 이들의 아픔까지도 어루만져 주려고 애쓰는 진솔한 노력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의 천재 모차르트보다 악성(樂聖) 베토벤을 높이 사려고 한다. 성인의 동상도 비둘기들에게는 놀이터일 뿐. 거인의 머리 위에 잠시 앉았던 친구가 관악 밴드의 경기병 서곡에 놀라 달아나듯, 나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광장 한 편의 뮌스터 성당으로 향한다. 김인겸 선생님께서 이곳에 얽히고설킨 역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도 기둥마다 비친 스테인드글라스의 광채는 한결 같았을 것이다. 조금 더 걸어 도착한 베토벤의 생가. 죽은 다음에야 태어난 곳이 의미를 갖게 된다는 아이러니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본 대학에서 시 한 구절도 없이 단지 이름만이 새겨져 있는 하이네의 기념비를 만난다. 하이네가 노래했던 로렐라이. 모든 예술 행위는 선량한 뱃사람을 홀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노래처럼 착란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을 늘 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이란 그 환상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흡인 본능을 타고난 로렐라이의 처녀들인 것이다. 그 유혹에 젖은 사람들은 때때로 정상적인 현실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지장을 느끼기까지 한다. 따라서 그들 뱃사람들이 목숨을 잃기 전에 구출해 주는 것도 평론가의 임무 중의 하나이리라. 본 대학에서 알베르트 후베 선생님을 만났고 한국학을 공부하는 독일의 친구들에게 난생 처음으로 나의 문학 세계(?)에 대해 피력하는 기회를 가졌다. 베토벤이 태어난 고장에서 초연(初演)을 하는 영광을 맛본 것이다.
 쾰른에서 엄청나게 큰 성당을 잠시 보고 스위스로. 또 다시 하루를 넘겼다. 케이블카를 세 번씩이나 타고 오른 알프스. 유명하다는 스위스 초콜릿을 입에 물고 생각해 보니, 들끓는 화산이 아닌 차가운 이 티틀리스 봉우리야말로 내가 찾아 헤매던 모르도르였다. 온갖 애욕과 어리석음과 절대 반지를 티 없는 얼음 속에 몽땅 꽁꽁 얼려 버렸다. 강 위를 떠다니는 루체른의 백조처럼 나의 펜이 종이 위를 떠다니길.
 프랑크푸르트를 떠나며, 나는 묻는 것에, 아니 묻지 않아도 늘 상냥하게 안내를 해 주는 독일인의 친절함에 대해 생각했다. 역사는 강이되 흐르는 강이다. 어찌 흘러가 버린 물을 막기 위해 둑을 쌓는단 말인가. 그 물에 휩쓸렸던 섬들까지도 이제는 그들의 친절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일구어낸 라인 강의 기적을 사랑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다시금 돌아온 곳은 아직도 고립된 섬. 보름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구나. 그러나 보름 안에 다른 세상과 만날 수는 있었으니, 머나먼 대륙의 저편에서도 나의 무인도는 결코 혼자일 수만은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의 모든 고독한 섬들을 사랑하려고 한다. 국적(國籍)을 환기시키는 지면(紙面)의 여의도까지도. 나는 한강의 기적을 사랑한다. 보름 전에도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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