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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행문을 쓸 때면 사소한 고민에 빠진다. 사소하면서도 꽤 중대한 그 문제는 바로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에 대한 선택이다. 사실 그 고민은 꽤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여행 중에도 종종 기행문을 어느 시점부터 시작할까를 떠올려보곤 했다. 그렇지만 결국 또 ‘시작’을 찾지 못해 한참을 버둥거린다.
어디서부터가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짐을 꾸리던 시간인지, 아니면 비행기에서 내 좌석을 찾아내던 순간인지, 혹은 첫 목적지에 발을 내딛던 순간인지……. 여행은 뚜렷한 머리가 없이 우글거리는 몸통으로만, 그 양감으로만 남아있다. 아메바처럼.
그래도 굳이 한 기점을 잡아야 한다면, 비행기가 허공으로 붕 떠오른 지 한 시간 후, 이상한 기류가 기체를 흔들던 그 순간으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기내의 불이 모두 꺼지고 좌석이 조금 심하게 흔들리던 그때, 나는 내가 일상이 아닌 허공에 떠있음을, 그것도 삼천 피트나 솟은 상공에 떠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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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만한 창 아래, 내 일상이 가라앉아 있다. 일상을 그대로 두고 나는 위로 부웅 솟아 오른다. 거대한 도시가 지구의 손톱처럼 보일 만큼 높은 상공이다. 비행기가 이렇게 흔들리는 이유에 대해, 혹은 그 이유를 생략한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낯선 언어 속에서 나는 전혀 엉뚱한 안내방송을 듣는다.
“지금부터 당신의 일상은 없습니다, 당신은 심하게 흔들릴 것이고, 어쩌면 당신의 일부를 잃을 지도 모릅니다, 모든 선택은 당신이 하니, 핑계는 대지 마시길. 각오하십시오…….”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나는 단단히 방의 구조를 확인했다. 방은 귀퉁이가 네 개며, 반듯하게 각이 잡혀 있고, 모든 물건들도 제자리에. 내가 사라진 동안, 이 일상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여행이 끝나면 최대한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지켜볼 요량이다. 방의 한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거나, 구겨진 원고지처럼 꼬깃꼬깃해져 있거나, 건드리면 파삭 부서질 만큼 건조해져 있거나, 형체없는 아메바처럼 느물느물해 있거나……이런 식의 도발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지도 모른다. 일상과의 철저한 분리, 그리고 낯선 곳에서의 일상 찾기,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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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 밖으로 이름 모를 마을들이 하나 둘 지나간다. 허허로운 들판을, 조금씩 눈이 녹는 산을, 옹기종기 모인 집들을 뒤로하며 기차는 북으로, 북으로 달린다. 런던을 출발해 에든버러에 닿기까지 소요된 반나절, 거대한 도시 런던이 멀어질수록 시계 초침 혹은 내 맥박이 느려지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었을까, 기차가 종착역으로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말이 없어진다.
에든버러 웨버린 역, 도시는 이미 잠들어 있다. 아주 느리고 느린, 그래서 마치 모든 것이 꼼짝않고 정지한 듯 느껴지는 공기다. 건물이며 길이며 나무며 도시가 온통 회색빛이다. 이 도시가 밤이 되면 회색으로 잠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아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 낮과 밤의 색감이 다른 도시, 그곳이 에든버러다.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아담한 에든버러를 걷는 동안, 내 정수리 바로 위에 하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느낀다. 에든버러의 하늘은 바라보고 있으면 푹 꺼질 것처럼 낮아서 조금만 고개를 뒤로 젖히면 그 모서리에 부딪힐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머리 위에 닿을락 말락한 하늘을 두고, 구시가지의 울퉁불퉁한 돌길을 걷는다. 도식화하자면 다소 우스워지는 이야기지만, 일상을 떠나온 나는 이 낯선 도시에서 최대한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려 노력한다. 에든버러성에 올라 이미 죽어버린 대포와 왕의 초상화 사이를 내 오랜 일상인 양 걷고, 양의 내장으로 요리한 스코틀랜드 전통요리를 먹으며, 펍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공간이 달라졌을 뿐인데, 낯선 도시가 주는 새로움은 평범한 일상까지 모험처럼 만든다. 낯선 가게에서 음료수를 집어들고, 낯선 돈을 지불하고, 낯선 인사를 듣는 일에서 흥분하며 보낸 하루. 나는 분명 촌스러운 이방인이다.
다음날 아침, 동이 트기 전에 숙소를 나선다. 밤이 되면 모두가 다 회색으로 잠드는 이상한 도시를 뒤에 두고 기차에 오른다. 동이 트고 도시가 밝아지는 풍경이 궁금하지만, 어쩐지 일종의 금기처럼 여겨진다. “동트기 전에 떠나라” 는 금기. 에든버러 성 위에 정지해있던 동상들은 금기를 어긴 욕망들의 고루한 결말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금기를 어긴 죄로 돌이 되어버린 인물들, 땅에 발붙이지 못할 만큼 높은 곳에서 외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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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런던. 이미 어둑해진 런던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진눈깨비로 흩날리던 눈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 런던 시내를 하얗게 덮는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 위에서 빨간 공중전화와 이층버스가 경고의 몸짓처럼 붉게 빛난다. 이미 그들은 멸종해가는 현대판 천연기념물이다.
런던을 걷는 동안, 나는 시간이 불연속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앨런 라이트맨의 소설 <아인슈타인의 꿈>에 따르면 어떤 세계에서는 시간이 불연속적이다. 이 세계에서 시간이란 신경섬유가 늘어선 것과 같아서, 멀리서보면 시간과 시간이 계속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섬유와 섬유 사이에 현미경으로나 보일 정도로 작디작은 틈이 벌어져 있다.
시간의 공백이란 아주 작아서, 일 초라는 시간을 일천 조각으로 나누고 다시 그 조각을 일천 조각으로 나누어야만 끊어진 한 군데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끊어진 공백은 아주 작기 때문에 시간과 시간 사이는 ‘끊김' 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아주 미세한 틈이 생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아주 미약한 낌새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시간의 공백이 저 런던 거리에는 수없이 자주 찾아오는 것이다. 거리에는 걷는 사람보다 마네킹처럼 정지해있는 사람이 더 많다. 카메라는 그들의 정지를 아주 쉽게 돕는다. 카메라가 찰칵, 플래시를 터뜨리는 순간 그 앞에 찍힌 것은 이미 풍경이 아니다. 공백이다. 시계 초침이 뿌리내리지 못할 만큼 미세한 틈. 여행이 일상보다 특별해지는 이유는 시간이 잠시 끊기는 그 공백에 좀 더 쉽게 노출된다는 점이다. 나 역시 시간의 신경섬유를 군데군데, 동강동강 잘라먹는다. 시간의 공백은 아주 작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 돌아보면 남는 것은 온전히 흘러갔던 시간보다는 잠깐씩 벌어졌던 미세한 틈이다.
거리에서 시간의 균열을 경험한다면, 박물관에서는 온전히 그 균열들이 박제된 순간을 본다. 우리네 삶에서 꽤 고상한 축에 드는 공간, 그러나 숨막힐 듯 거대한 박제 공간도 어떤 코드를 생략하면 충분히 경망스러워질 수 있고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다. 고대의 귀중한 검은 순식간에 바싹 탄 갈치로 돌변하고, 고대의 건축 양식은 크래커의 문양이 된다. 알 수 없는 고대 문자 역시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해석 가능하다. 고고학자들에 대한 불신, 어쩌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진귀한 것으로 둔갑시켰을지 모른다는 생각, 따라서 그들은 몇 대에 걸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탑처럼 쌓아온 ‘꾼’ 이라는 결론, 혹은 추측. 한 올 한 올 풀려 산발되는 괴상한 상상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그렇게 런던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간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내셔널갤러리 동관을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이다. 비록 몇 초, 몇 분에 그치는 짧은 시간이지만, 잠시나마 내 인생에서 어느 부분이 반 고흐와 윌리엄 터너의 그림 앞에서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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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버해협을 건넌다. 바다를 통과하는 동안 한 시간의 시차가 발생하고, 그 한 시간의 시차만큼 이질적인 프랑스의 공기를 느낀다. 프랑스의 심장부로 깊이 들어갈수록 기차 안은 시끌벅적하고 번잡해진다. 사람들은 말이 많고 표정도 많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에 짐을 풀고 거리로 나선다. 베르사이유에서 하루를, 오를레앙에서 시인 클로드무샤르를 만나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남은 이틀, 나는 이 거리가 닳도록 파리를 걷는다.
파리를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같은 방법으로 새겨놓은 것을 발견한다. 흘러가는 센느강을 잡을 수는 없지만, 그 다리 위에서 머물렀던 시간을 기록할 수는 있다. 베르사이유 돌벽에도, 거대한 정원을 가졌던 왕의 흉상 밑에도 기억은 새겨진다. 노틀담성당을 밝히던 촛불,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쓰인 문장, 철제 다리 위에 새겨진 이름,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 시간의 정지를 불러오는 카메라 셔터……. 그 모든 순간은 시간을 향해 겨누는 몸짓이다.
파리의 지하철은 격정적이다. 이마에 동그란 파리와 그 도시를 흐르는 센느강을 로고로 그려넣은 이 네모난 고철 덩어리에는 늘 음악이 끊이지 않는다. 덜컹, 힘있게 고리를 비틀어야만 문이 열리는 이 흥분의 도가니, 이렇게 들뜬 피가 땅 밑을 관통하는데 도시의 거리가 정갈하거나 조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낯선 이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빽빽하게 들어선 지하철, 그 안에서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면서 나는 언젠가 백과사전에서 읽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기억해낸다. 파리 지하철의 주고객인 귀뚜라미 이야기다.
약 1900년 무렵부터 귀뚜라미들이 파리 지하철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지하철역은 그들에게 준비된 약속의 땅이었다. 열차바퀴와 레일 사이의 마찰로 인해 열대 지방과 다름없는 온도가 유지되고 자갈에 널려있는 빵 부스러기와 담배꽁초, 휴지 등은 주린 배를 채워준다. 열차 하나가 지나가고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의 짬 동안 수컷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노래를 한다. 수컷들의 노래 자랑이 끝나고 가장 멋진 목소리를 인정받은 수컷과 암컷은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열차가 도착하면 그들은 로맨틱한 유희를 벌이기 위해 열차들의 가변 저항기 아래 자리를 잡는다. 열차가 지나가는 동안 그들은 뜨거운 공기 아래서 열렬한 사랑을 나눈다. 이 낙원에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단 두 가지. 하나는 귀뚜라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아롱가죽거미, 다른 하나는 레일을 차갑게 만드는 지하철 파업.
오늘도 지하철은 몇 번이나 이 도시를 통과하고, 덕분에 레일은 뜨겁게 달구어져 있다. 달리는 열차, 이 차가운 쇠가 내뿜는 퀘퀘한 공기 아래서 벌어지고 있을 열렬한 사랑을 상상한다. 어쩐지, 발 밑이 들썩들썩하다.
번역가 한유미 씨를 만나 오후 한 나절을 퐁피두센터 앞에서 보낸다. 굴뚝부터 배기관까지 고스란히 드러낸, 저 자개증의 건물 앞에서 사람들은 표현하지 못해 안달한다. 불을 뿜는 아저씨, 커다란 붓을 쓱쓱 놀리는 화가의 몸짓, 자유로운 기타의 리듬감, 육중한 몸을 유연하게 흔들어대는 노년의 무용가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다. 분수대 위에서는 도발적인 붉은 입술이 물을 뿜으며 뱅글뱅글 돌아가고, 가게마다 음식 접시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이동한다. 모든 것이 노래고 춤이며 실험인 거리, 벌써 봄이 찾아온 듯 생기가 넘치는 거리, 이 거리가 마음에 든다.
해가 지면 낮 동안 괴상한 철물 구조물에 불과했던 에펠탑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 쉴새없이 레이더를 보내며 파리의 밤을 훑어보는 거대한 탑 밑에서 사람들은 눈덩이 만한 솜사탕을 팔고, 울긋불긋한 회전목마를 돌린다. 파리의 밤이 시작되고 있다.
센느강을 좀 더 쉽게 따라가기 위해 유람선에 오른다. 물살을 가르며 배는 천천히 움직이고, 도시도 이 배를 중심으로 말아올린 한 장의 풍경화처럼 흘러간다. 간간이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바람 부는 대로, 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나는 이 도시를 흘렀을 독을 상상한다. 인간의 힘으로 잡을 수 없었던 괴질, 금세 전염되어 온 도시를 휩쓸었던 전염병들. 페스트와 천연두, 콜레라와 나병, 광우병 같은 것, 한 도시를 휩쓸었던 거대한 광풍을 더듬는 동안도 강물은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흘러간다.
이 물 밑에 가라앉은 것들, 가라앉은 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것들, 붕붕 떠서 바다까지 표류해간 것들, 강을 흘러간 그 모든 익명의 사물 속에 내 감정 하나를 추가한다. 얼마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괴질 사스는 아직 이 도시로 침투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사스보다 더한 독에 걸려 있었다.
간간이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강물이 멈추거나 도시의 불이 꺼지거나 하는 일도 없다. 다만, 멈춘 것은 나 하나다. 유람선이 다시 도시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점점 작아져 풍경 속에 하나의 점으로 숨어버렸을지 모른다.
그 밤, 몽마르트 언덕 아래에 선다. 파리의 한 구석을 하얗게 비추던 사크레쾨르 성당과 그 앞에 총총 별처럼 박힌 가로등이 아름답다. 관광객들을 위한 하루가 마감된 지 오래라는 듯 울타리가 성당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안내문에 표기된 ‘secret’ 란 단어는 담을 뛰어넘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다. 그 금기를 어기면 어떤 결과가 오는 걸까, 스코틀랜드 작은 도시에서 만났던 동상들처럼 돌이 되기라도 하는 걸까. 낯선 문장들 앞에서 섣부른 대범함은 금방 사그러든다. 숙소로 돌아와 불을 켠 순간 파삭하는 소리가 나며 정전이 된다. 이상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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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늦게서야 루체른에 도착한 기차. 호텔 주인이 퇴근을 한 바람에, 우리는 먼저 간 일행이 어느 방에 머물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짐을 든 채로 망설이고 있자 로비에 있던 미국인 여행객들이 서로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근처의 빈 호텔을 찾아봐 주겠다고 책을 뒤적거리는가 하면, 우리가 찾고 있는 일행의 인상착의를 들은 후 그들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며 설명하기도 한다.
옆에 있던 일행에게 “그럼 방마다 똑똑거려야 되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니, 순간 미국인들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기 시작한다. “Oh, 똑똑” 아마 ‘똑똑’ 이라는 의성어가 생소하고, 그래서 재미있게 들리는 모양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졸지에 “똑똑”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방마다 “똑똑” 하고 실례를 한 덕에 몇몇 한국인 여행자들과 안면을 익힌다. 나와 같은 나이의 여자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당차 보인다. 말 그대로 ‘어느날 훌쩍’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배낭을 짊어진 그녀는 50일의 긴 여행을 계획했다. 그녀의 50일 여행은 반 정도 진행되었고, 곧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갈 예정이다. 홀로 다니고 있지만 조금도 외롭지 않아 보인다. 남으로, 남으로, 그렇게 적도를 향해 가까이 가는 그녀의 여행이 건강하기를 바란다.
스위스의 루체른은 그림 같은 도시고, 루체른에서 보낸 이틀은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기억된다. 건물마다 지붕 꼭대기, 혹은 간판 아래 시계를 내걸고 있는 이상한 동네. 그 작은 거리를 걸으며, 나는 골목에서 같은 간격으로 같은 소리를 내며 째깍거리는 시계의 초침들을 모두 제각각으로 흐트러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건물마다, 사람마다, 저마다 제각각 다른 시간을 보고 살아가는 동네, 하루쯤은 그런 동네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충동.
루체른에는 커다란 호수가 빠져 있고, 그 호수 안에는 누군가 떨어뜨린 것이 분명한 우산이 빠져 있다. 활짝 펼쳐진 채로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우산은 손잡이며 대, 우산살에 동글동글한 기포가 붙은 채로 잠들어 있다. 화석 같다. 유영하는 백조와 청둥오리들, 그리고 그들의 파드득거리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호수는 전혀 동적이지 않다. 화석 같은 우산 때문이다. 매끄러울 정도로 청아하고 맑은 호수, 그러나 물 속에 발을 디딘 순간 수면 위의 매끄러움은 사라지고 시간이 정지하는 마법.
호수를 따라 걷는다. 말뚝에 묶인 배, 불 꺼진 유람선, 셔터를 내린 가게들……. 하루를 마감하고 잠든, 고요한 도시. 내 발자국 소리와 포로록포로록 물을 뿜어대는 백조들의 몸짓만이 들린다. 처음 실처럼 가는 허리로 휘어져있던 달은 벌써 보름으로 차오르고, 저 멀리 만년설로 빛나는 알프스에도 이미 봄은 와 있다. 거세게 배낭을 쫓던 바람도 숨 돌리듯 잠잠해진 시간,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수많은 거리의 시계들을 본다. 시간을 알리는 열두 개의 큼직한 숫자, 그 사이를 가늠하며 쉴새없이 돌아다니는 날카로운 초침, 단단히 감긴 태엽, 한 시간마다 뻐꾹 울어대는 새의 머리, 그러나 어디에도 지금 이 시간은 없다. 골목 어귀에서 이 도시를 흘렀던 전설 속 빌헬름텔을 본다.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올리고 활시위를 당기던 그 팽팽한 긴장감, 피하고 싶은 두려움, 시계 위에 없던 내 시간이 바로 그 활시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잠이 들기 전 수첩을 보니 오늘의 날짜 위에 입춘이라고 적혀있다.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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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각형의 내 방.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지켜봐도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방은 귀퉁이가 네 개며, 반듯하게 각이 잡혀 있고, 모든 물건들도 제자리에.
사각 방의 중심에 앉아 배낭을 연다. 물건 몇 개가 빠지고 새롭게 추가된 것 외에는 이 역시 십오일 전과 다름이 없다. 달라진 것은 어디에도 없다. 보름은 변화를 부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일까. 다만,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나는 마음에 구멍이 하나 뚫린 것만 같다. 허공에서 비행기를 흔들던 이상한 기류가 이 방까지 따라온 것은 아닐까.
처음, 시작을 몰랐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행의 끝이 어디였는지도 나는 잘 가늠할 수가 없다. 분명 여행은 일상과 다른 호흡으로 남아있지만, 그 시작과 끝에 가서는 늘 모호하게 숨어버린다.
어쨌거나 낯선 지명의 끝은 도쿄다. 나리타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 좌석을 찾아 앉자, 옆자리에서 우연히 버스에서 몇 마디 말을 나눴던 일본인 하기와라 씨가 인사를 한다. 우리는 천만 분의 일 확률이라며 반가움을 나눈다.
겨우 두 번 본 사람에게서 낯익은 익숙함을 발견한다. 여행은 낯설음 속에서 익숙함을 찾아내는 과정이고, 그렇게 얻어진 익숙함은 때로 오래 전부터 내 일상 속에 존재하던 뿌리들을 휘감아 흔들 만큼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일순간의 착각이든 일시적인 감상이든 간에.
울퉁불퉁한 대륙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기체는 다시 한번 흔들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리는 비행기. 담요를 끌어올리고 고개 방향을 바꿔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한참을 뒤척인 후에야, 흔들리는 건 비행기가 아니라 나라는 것을, 흔드는 것도 바람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김선우 <얼레지>부분).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라고, 시인이 말해준다. 꼭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온전히 제 몸 하나로 바람이 난다. 그것은 수동적인 흔들림이 아니다. 제 스스로 제 줄기를 흔들고 뿌리를 흔드는 살아있는 몸짓이다. 나는 자꾸 설명하고 싶다.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다시, 사각형의 내 방. 어딘가 조금 기울어진 듯도 하고 비대칭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상한 방. 낯설어지는 위험한 방. 나는 방에 있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음을 알았다. 저기 바다 건너에 두고 온 나를 찾는 과정은 조금 뒤로, 조금 더 뒤로 미루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까맣게 잊어도 좋을 것이다. 얼레지는 약하지만, 제 몸을 흔들 바람은 제 스스로 키워낸다. 두고 온 나에 대한 안부는 그렇게 뒤로 미룬다.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