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①알지 못했던 세계에서 ②레트로토피아, 혹은 세트장으로서의 ‘과거’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④시인 소호씨의 일일(一日)1)
『칼라 명작 - 소년소녀 세계문학』을 읽는 매혹의 시간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
①『논어』 읽고 듣기 ②아바나 항구에서 ③양파를 까는 마음
①새롭고 대담한 질문을 향하여 ②바이러스 갱단의 유쾌한 언어 사전
기획특집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주인공 길 펜더는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앓는 인물이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영화 작가로 나름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불만이 많다. 그는 할리우드 작가가 아니라 더 나은 무엇이 되고 싶은데, 그 무엇이란 1920년대 파리에 모여 있던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같은 과거의 소설가들이다.
영화는 현대인들의 복고 취향에 대한, 우디 앨런 식 유머로 잘 재현된 통찰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삶 자체가 복고적인데, 1920년대의 소설가가 되고 싶은 21세기의 그는 현재의 약혼자가 아니라 1920년대 피카소의 모델이었던 아드리아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그의 약혼자가 하고 있는 가게는 <노스탤지어 숍>이고 그가 쓰고 있는 소설에 등장하는 가게의 이름은 <과거로부터>다. 이 가게에서는 “추억을 팔고 있다.”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먼 과거로 돌아가려는 길 펜더의 집념을 우디 앨런은 “황금시대 사고(The Golden Age Thinking)”라고 설명한다. 즉 현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겐 늘 지나간 시절이 황금시대로 보이고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가 아닌 과거의 곳으로 회귀하려고 한다. 21세기의 상업주의에 신물이 난 예술가는 1920년대 파리의 망명 예술가들에게 향수를 느끼고, 1920년대 파리의 가난에 지친 예술가들은 1900년대 파리의 황금기 벨 에포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1세기, 1920년대, 1900년대의 모든 예술가들은 17세기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과거’, ‘회귀’, ‘향수’, ‘노스탤지어’, ‘복고’, ‘황금시대 사고’를 아우르는 단어가 몇 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우리나라에서 유행을 하고 있다. ‘레트로’가 그것인데,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모양, 정치, 사상, 제도, 풍습 따위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아 하려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네이버 국어사전)이다.
‘레트로’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의 하나가 대중음악이다. 며칠 전에는 1990년대에 생산이 중단되고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던 LP(바이닐 음반)가 “33년 만에 CD(의 판매량을) 넘었다”(동아일보, 2020년 1월 15일 기사)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LP 시대가 저물고 CD 시대가 열린 지 30여 년 만에 마침내 LP 시대가 회귀한 것이다.
CD 시대 이후 컴퓨터 파일로 음악을 듣던 시기까지만 해도, LP로든 CD로든 파일로든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으려면 음원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엔 그 시기마저 지나가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고 있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음악을 굳이 소유할 필요 없이, 그저 흘러가는 음원들의 목록에서 원하는 곡을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월정액을 내고 곡을 빌려듣는 형식이다.
LP는 음악을 담는 갖가지 매체들 가운데, 4인조 록 밴드나 오케스트라 다음으로 무겁고 크고 다루기 힘든 매체다.
책 한 권 무게에, 크기는 작은 PC 모니터 정도고, 음악을 들으려고 턴테이블에 올려놓을 때마다 전용 천으로 닦아야 한다. 휘거나 표면이 상하지 않도록 보관에도 늘 신경 써야 하는 몹시 손이 많이 가는 매체다. 값도 비싸다. 그래서 CD가 처음 나왔을 때 사용과 보관의 편리함, 싼 가격이 크게 부각되었었다. 다음에 나온 mp3는 더 나아가, 다운받고 마우스로 이리저리 옮기는 수고 외에는 감상하는 데 다른 노력은 필요 없었다. 가격도 곡당 천 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파일은 소유하는 것이었기에, 어딘가에 파일을 보관할 공간은 있어야 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마저도 필요치 않다.
‘겨우’ 삼십여 년 동안 음악 매체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LP에서 CD로, CD에서 컴퓨터 파일로, 컴퓨터 파일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담는 매체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구하기 쉬워지고, 점점 더 싸지고, 점점 더 형태가 없어지고, 점점 더 소유의 개념과 멀어져 갔다.
그런데 LP가 다시 소유되기(팔리기) 시작했다고? 환금성이 없어 한번 사면 되팔기도 어려운 LP가? 언론 기사에 소개된, 레코드 상점에서 많이 팔린 LP들의 목록을 보면 매체는 옛것이라도 음악은 전혀 옛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팔로알토, 공중도둑, 시가렛 애프터 섹스, 빌리 아일리시처럼 대부분은 나 같은 LP 세대(말하자면 20세기에서 음악 취향이 형성된)는 들어본 적도 없는 21세기의 뮤지션들이다.
판매 목록을 보면 LP 시대로 회귀를 하고 있는 것은, 정작 LP 시대에는 LP를 들어본 적도 없는 젊은 소비자들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언론 기사에도 10, 20대에게 인기가 좋다는 말이 나온다. 소수를 빼놓고는 지금 LP를 사는 젊은 소비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LP를 들어본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젊은 친구들에게 LP는 향수를 자극하는 옛 매체가 아니라, 그들 표현을 쓰자면 ‘힙한’ 새 매체에 더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음반 시장에 부는 LP의 인기는 레트로일까, 새로운 소비 패턴의 등장일까.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4년)를 보면 ‘레트로’의 원래 뜻은 “음악, 의상, 디자인 등에서 패스티시와 인용을 통해 의식적·창의적으로 표현된 시대 양식 물신주의”였다. 레트로를 추구하는 이들도 대중이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술 애호가, 감식가, 수집가 등 거의 학문적인 지식과 날카로운 아이러니 감각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패스티시와 숭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품미학에 걸맞게 다시 디자인된 과거라는 의미에서 ‘뉴트로’가 더 어울린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예전에도 르네상스나 고딕 리바이벌처럼 지나간 문물에 집착하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사회는 인류사에 없었다”(15쪽)고 말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은 현재가 싫어 과거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사이먼 레이놀즈나 우디 앨런이나 현재를 보는 시각은, 그들의 문체와 영상에서 느껴지는 유머감각과 활기와는 다르게 어둡기 그지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현대인들은 현재가 싫다면 과거로 갈 수도 있지만 미래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이 실망스러운 현재를 벗어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은 『레트로 마니아』와 <미드나잇 인 파리> 두 작품에서 단 한 줄(아마도)도 단 한 장면도 언급되지 않는다. 두 작품이 현실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수준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두 작품의 현재 부정의 너머에는 과거만 있지 미래는 없다.
‘레트로’는 사실 번뜩이는 재치나 파리의 화사한 정경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맞닥뜨리게 되는 두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현재가 살 만하지 않다는 절망이고, 둘은 그래서 현재를 벗어나 갈 만한 곳이 과거뿐이라는 절망이다. 미래는 어디로 갔을까. 왜 레트로를 좇는 현대인들은 미래로 생각을 열어놓지 못하는 것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어둡기 그지없는, 21세기가 실은 심화된 세기말이라는 점을 일깨우는 『레트로토피아』(정일준 옮김, 아르테, 2018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는 레트로와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을 뜻하는 토머스 모어의 조어 유토피아를, 바우만이 다시 조합한 말이다. 16세기 모어의 『유토피아』는 미래의 유럽 후손들에게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을 꿈꿀 가능성을 남겨주었지만, 21세기의 현대인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
『레트로토피아』에서 바우만은 로웬덜의 말을 빌려 “왜 오늘날 (과거의) 유산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걸까?”(108쪽)하고 묻는다.
답은 우리의 현재 자체다. 현재의 주축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는커녕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한 첫 번째 전후(戰後) 세대”이고, 미래에서 성취나 출세가 아니라 “상실에 대한 위협의 전조”를 보고, “발전과 승진보다 사회적 몰락”(108쪽)을 본다. 문제는 이렇게 느끼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매뉴얼 사에즈에 의하면 미국 가정의) 상위 0.1퍼센트가 22퍼센트의 부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1995년도 비율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오늘날, 이따금 나머지를 위한 공공서비스 감소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더 많은 자원들이 시장점유율을 보장하는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투자되고 있다”(169쪽).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래는, 최상위층을 제외하곤 젊은 세대 모두에게 공포다. 상류층 자제들까지 미래에 자신들이 “상속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에 들어섰을 때 근사한 직장이”(159쪽)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우리 한국도 다르지 않다. 한국도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처럼 ‘가진 자들의 한국’과 ‘못 가진 자들의 한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고 있고, 두 국가에 따로따로 속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한 배에 타고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2019년 조국 전 장관 논란 때, 2016년 박근혜 정부 퇴진 촛불운동에서 진보의 편에 섰던 많은 청년들이 정부 여당에 반감을 드러내고 반대의 편에 섰다. 청년 세대는 불공정과 부당함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미래는 공포고 현재는 싫어 과거로 돌아가려는 ‘레트로토피아’의 가장 큰 이주민이 되어가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은 길의 입을 빌려 레트로가 유행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한 시대엔 시시하고 천박하기까지 했던 것이 단지 세월이 흐르면서 신비롭고 흥미로운 존재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길 펜더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결국 허상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치과치료를 받는 데 필수적인 항생제도 없던 때가 과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느 시대에 살고 싶냐, 고 묻지만 갈 곳은 두려운 미래뿐이다. 현실의 레트로 유행엔 우디 앨런식의 유머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현실은 영화보다 끔찍하고 암울하다.
③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백민석｜소설가, 1971년생
소설집 『혀끝의 남자』 『수림』 『버스킹!』, 장편소설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해피 아포칼립스!』,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 『헤밍웨이』 등
기획특집③ 레트로 뉴트로 1990
어느 시대에 살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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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현대인들의 복고 취향에 대한, 우디 앨런 식 유머로 잘 재현된 통찰을 보여준다. 주인공의 삶 자체가 복고적인데, 1920년대의 소설가가 되고 싶은 21세기의 그는 현재의 약혼자가 아니라 1920년대 피카소의 모델이었던 아드리아나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그의 약혼자가 하고 있는 가게는 <노스탤지어 숍>이고 그가 쓰고 있는 소설에 등장하는 가게의 이름은 <과거로부터>다. 이 가게에서는 “추억을 팔고 있다.”
자신이 살아보지도 않은 먼 과거로 돌아가려는 길 펜더의 집념을 우디 앨런은 “황금시대 사고(The Golden Age Thinking)”라고 설명한다. 즉 현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겐 늘 지나간 시절이 황금시대로 보이고 노스탤지어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여기가 아닌 과거의 곳으로 회귀하려고 한다. 21세기의 상업주의에 신물이 난 예술가는 1920년대 파리의 망명 예술가들에게 향수를 느끼고, 1920년대 파리의 가난에 지친 예술가들은 1900년대 파리의 황금기 벨 에포크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1세기, 1920년대, 1900년대의 모든 예술가들은 17세기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과거’, ‘회귀’, ‘향수’, ‘노스탤지어’, ‘복고’, ‘황금시대 사고’를 아우르는 단어가 몇 년 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우리나라에서 유행을 하고 있다. ‘레트로’가 그것인데, 사전적 정의는 “과거의 모양, 정치, 사상, 제도, 풍습 따위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아 하려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네이버 국어사전)이다.
‘레트로’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분야의 하나가 대중음악이다. 며칠 전에는 1990년대에 생산이 중단되고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졌던 LP(바이닐 음반)가 “33년 만에 CD(의 판매량을) 넘었다”(동아일보, 2020년 1월 15일 기사)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LP 시대가 저물고 CD 시대가 열린 지 30여 년 만에 마침내 LP 시대가 회귀한 것이다.
CD 시대 이후 컴퓨터 파일로 음악을 듣던 시기까지만 해도, LP로든 CD로든 파일로든 소비자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들으려면 음원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엔 그 시기마저 지나가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고 있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음악을 굳이 소유할 필요 없이, 그저 흘러가는 음원들의 목록에서 원하는 곡을 클릭하기만 하면 된다. 월정액을 내고 곡을 빌려듣는 형식이다.
LP는 음악을 담는 갖가지 매체들 가운데, 4인조 록 밴드나 오케스트라 다음으로 무겁고 크고 다루기 힘든 매체다.
책 한 권 무게에, 크기는 작은 PC 모니터 정도고, 음악을 들으려고 턴테이블에 올려놓을 때마다 전용 천으로 닦아야 한다. 휘거나 표면이 상하지 않도록 보관에도 늘 신경 써야 하는 몹시 손이 많이 가는 매체다. 값도 비싸다. 그래서 CD가 처음 나왔을 때 사용과 보관의 편리함, 싼 가격이 크게 부각되었었다. 다음에 나온 mp3는 더 나아가, 다운받고 마우스로 이리저리 옮기는 수고 외에는 감상하는 데 다른 노력은 필요 없었다. 가격도 곡당 천 원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파일은 소유하는 것이었기에, 어딘가에 파일을 보관할 공간은 있어야 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마저도 필요치 않다.
‘겨우’ 삼십여 년 동안 음악 매체는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LP에서 CD로, CD에서 컴퓨터 파일로, 컴퓨터 파일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담는 매체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점점 더 작아지고, 점점 더 구하기 쉬워지고, 점점 더 싸지고, 점점 더 형태가 없어지고, 점점 더 소유의 개념과 멀어져 갔다.
그런데 LP가 다시 소유되기(팔리기) 시작했다고? 환금성이 없어 한번 사면 되팔기도 어려운 LP가? 언론 기사에 소개된, 레코드 상점에서 많이 팔린 LP들의 목록을 보면 매체는 옛것이라도 음악은 전혀 옛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팔로알토, 공중도둑, 시가렛 애프터 섹스, 빌리 아일리시처럼 대부분은 나 같은 LP 세대(말하자면 20세기에서 음악 취향이 형성된)는 들어본 적도 없는 21세기의 뮤지션들이다.
판매 목록을 보면 LP 시대로 회귀를 하고 있는 것은, 정작 LP 시대에는 LP를 들어본 적도 없는 젊은 소비자들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언론 기사에도 10, 20대에게 인기가 좋다는 말이 나온다. 소수를 빼놓고는 지금 LP를 사는 젊은 소비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LP를 들어본 경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젊은 친구들에게 LP는 향수를 자극하는 옛 매체가 아니라, 그들 표현을 쓰자면 ‘힙한’ 새 매체에 더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음반 시장에 부는 LP의 인기는 레트로일까, 새로운 소비 패턴의 등장일까.
사이먼 레이놀즈의 『레트로 마니아』(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4년)를 보면 ‘레트로’의 원래 뜻은 “음악, 의상, 디자인 등에서 패스티시와 인용을 통해 의식적·창의적으로 표현된 시대 양식 물신주의”였다. 레트로를 추구하는 이들도 대중이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술 애호가, 감식가, 수집가 등 거의 학문적인 지식과 날카로운 아이러니 감각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지금의 레트로는 과거에 대한 패스티시와 숭배가 아니라, 21세기의 상품미학에 걸맞게 다시 디자인된 과거라는 의미에서 ‘뉴트로’가 더 어울린다.
사이먼 레이놀즈는 예전에도 르네상스나 고딕 리바이벌처럼 지나간 문물에 집착하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사회는 인류사에 없었다”(15쪽)고 말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은 현재가 싫어 과거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다. 사이먼 레이놀즈나 우디 앨런이나 현재를 보는 시각은, 그들의 문체와 영상에서 느껴지는 유머감각과 활기와는 다르게 어둡기 그지없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 현대인들은 현재가 싫다면 과거로 갈 수도 있지만 미래로도 갈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이 실망스러운 현재를 벗어나 미래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은 『레트로 마니아』와 <미드나잇 인 파리> 두 작품에서 단 한 줄(아마도)도 단 한 장면도 언급되지 않는다. 두 작품이 현실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입체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수준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두 작품의 현재 부정의 너머에는 과거만 있지 미래는 없다.
‘레트로’는 사실 번뜩이는 재치나 파리의 화사한 정경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맞닥뜨리게 되는 두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현재가 살 만하지 않다는 절망이고, 둘은 그래서 현재를 벗어나 갈 만한 곳이 과거뿐이라는 절망이다. 미래는 어디로 갔을까. 왜 레트로를 좇는 현대인들은 미래로 생각을 열어놓지 못하는 것일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어둡기 그지없는, 21세기가 실은 심화된 세기말이라는 점을 일깨우는 『레트로토피아』(정일준 옮김, 아르테, 2018년)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는 레트로와 어디에도 없는 이상향을 뜻하는 토머스 모어의 조어 유토피아를, 바우만이 다시 조합한 말이다. 16세기 모어의 『유토피아』는 미래의 유럽 후손들에게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을 꿈꿀 가능성을 남겨주었지만, 21세기의 현대인들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가능성을 찾고 있다.
『레트로토피아』에서 바우만은 로웬덜의 말을 빌려 “왜 오늘날 (과거의) 유산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걸까?”(108쪽)하고 묻는다.
답은 우리의 현재 자체다. 현재의 주축 세대인 밀레니얼 세대는 “부모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는커녕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표현한 첫 번째 전후(戰後) 세대”이고, 미래에서 성취나 출세가 아니라 “상실에 대한 위협의 전조”를 보고, “발전과 승진보다 사회적 몰락”(108쪽)을 본다. 문제는 이렇게 느끼는 밀레니얼 세대들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매뉴얼 사에즈에 의하면 미국 가정의) 상위 0.1퍼센트가 22퍼센트의 부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1995년도 비율의 거의 두 배에 달한다. …오늘날, 이따금 나머지를 위한 공공서비스 감소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더 많은 자원들이 시장점유율을 보장하는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 투자되고 있다”(169쪽).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래는, 최상위층을 제외하곤 젊은 세대 모두에게 공포다. 상류층 자제들까지 미래에 자신들이 “상속한 특권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에 들어섰을 때 근사한 직장이”(159쪽)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우리 한국도 다르지 않다. 한국도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미국처럼 ‘가진 자들의 한국’과 ‘못 가진 자들의 한국’이라는 두 개의 국가로 분열되고 있고, 두 국가에 따로따로 속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한 배에 타고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못한다. 2019년 조국 전 장관 논란 때, 2016년 박근혜 정부 퇴진 촛불운동에서 진보의 편에 섰던 많은 청년들이 정부 여당에 반감을 드러내고 반대의 편에 섰다. 청년 세대는 불공정과 부당함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미래는 공포고 현재는 싫어 과거로 돌아가려는 ‘레트로토피아’의 가장 큰 이주민이 되어가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은 길의 입을 빌려 레트로가 유행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한 시대엔 시시하고 천박하기까지 했던 것이 단지 세월이 흐르면서 신비롭고 흥미로운 존재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길 펜더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결국 허상임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치과치료를 받는 데 필수적인 항생제도 없던 때가 과거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어느 시대에 살고 싶냐, 고 묻지만 갈 곳은 두려운 미래뿐이다. 현실의 레트로 유행엔 우디 앨런식의 유머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현실은 영화보다 끔찍하고 암울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