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라스트 레터
글쓴이 : 김여름 날짜 : 23.06.14|조회 : 841

라스트 레터

( )에게
 

나는 틈틈이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어째서 편지의 형식이었나, 라고 물으면 언제나 이 도시와 이와이 슌지의 영화를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너는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고, 가상의 인물이 아닐 수도 있지만. ( )는 나일 수도 있고, 너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삿포로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사 년 전과 같이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향하면서, 눈이 덮인 산 위나 도시 위를 날면서. 비행기의 소음. 저마다의 목적지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앉아 창가를 내다보는 일. 착륙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이 편지와 함께 나아가고 있다.


2023. 2. 8.

 


( )에게

 

지나치는 풍경들. 나는 지금 저녁의 열차 안이고, 함께하는 이들과 오타루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오타루에는 우리가 묵는 도심보다도 많은 눈이 내렸어. 조각된 얼음들이 늘어진 도시. 걸을 때마다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도시. 영화「러브레터」의 도시. 

우리는 우리만의 흔적을 남기며 걸었다. 그렇게 걸으며 겨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뷰파인더로 서로를 바라보며 자주 웃었어. 오르골당과 과자 상점에는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면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 되지. 오르골의 피아노 소리와 닮은, 유리의 표면 같은 마음. 

우리는 얼어있는 운하와 작은 가게들을 지나 유리 공방에도 들렀어. 너와 나는 유리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그곳에는 유리로 제작된 색색의 컵과 그릇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어쩌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어. 깨지기 쉬운 것이 내는 투명한 빛. 나는 그 빛에 대해, 얼음과 유리의 차이에 대해 생각했다. 

참, 사실 오늘은 기행을 위해 새로 구입한 털 부츠를 신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나는 얼어붙은 눈 위에서 미끄러져 몇 번이나 넘어졌고, 종내에는 옆 사람에게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었거든. 털 부츠의 밑창이 평평한 탓이었다. 평평한 것은 쉽게 미끄러지니까. 

내가 자꾸만 넘어지자 주연, 나경, 가현이 내 팔을 자신들의 팔에 단단히 붙들었어. 그리고 내가 휘청일 때마다 힘을 주어 나를 붙잡아 주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어느덧 우리 넷은 함께 팔짱을 끼며 걷고 있었고, 그렇게 열차를 타러 가던 길에 누군가 물었다. 이러다 다 같이 넘어지면 어떡하지? 그러자 주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어지면 웃으면 돼, 하고 말했고 나는 이상하게 그 말이 좋았다.
 

2023. 2. 9.

 

 

 

 

( )에게 

 

나는 이제 도쿄에 있다. 너는 아직 도쿄에 와 본 적이 없다고 했었나.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도쿄는 삿포로와 달리 완전한 봄처럼 느껴진다. 생동하는 식물들과 햇빛이 있고, 운동화와 얇은 겉옷을 착용할 수 있다. 테라스에 앉아 대화하는 사람들과 지하철 안에서 문고판 책을 읽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음에도 자꾸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페이지를 훔쳐봤어. 그저 해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시부야에 위치한 츠타야 서점에 들른 날이기도 하다. 나는 주연과 일본 시집을 구입하기 위해 직원분께 어렵사리 물어 시 코너를 찾았어. 너도 알다시피 난 일본의 소설보다 시를 더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사이하테 타히와 고이케 마사요의 시를 인상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거든. 츠타야 서점의 시 코너는 하나의 단출한 책장이 전부였고, 한국에 비해 작고 비좁았다. 나는 좁은 책장에서 사이하테 타히의 시집을 발견했고, 반가운 마음에 두 권의 시집을 손에 들었다. 집어든 시집을 펼치자 아래로 떨어지는 단어들이 보였다. 낙하하는 단어들. 나는 수직으로 쓰인 단어를 따라 자꾸만 밑을 보면서 내가 영영 알 수 없을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2023. 2. 11.

 

( )에게

어제는 일찍 잠에 들어서 편지를 쓰지 못했어. 우리는 비가 오던 날에 국립신미술관에서 에곤 실레 전시를 감상했고, 빛이 들던 날에는 다자이 오사무의 묘에 갔다. 나는 그 앞에서 삶 또는 삶 너머의 것에 대해 생각했어. 선과 문장. 그리는 것과 쓰는 것. 빛과 그림자를 묘사하기. 우리 역시 우리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시간을 붙잡고 있고. 너 또한 그렇겠지. 

그러니 나는 나의 방식으로 시간을 붙잡으며 너에게 이 편지를 쓴다. 늦은 밤 방에 모여 사랑과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던 순간들, 암호 같은 노래를 지어 부르거나 따뜻한 카페에 앉아 푸딩과 케이크를 한 스푼씩 나눠 먹던 장면들이 재생되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나도 모르는 방향으로 재생되고 있었어. 함께 여행하는 이들과 함께. 내가 지금 쓰는 이 문장들처럼. 주춤거리면서도, 앞으로. 

오늘은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야. 그러니 이제 편지를 마무리하려 한다. 편지는 기억을 지닌 채 미래에서 읽히고, 나는 어쩌면 그 사실이 좋아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어. 이 편지를 읽고 있을 미래의 너를 상상한다. 나의 지난 시간을 읽어내고 있을 너를. 이와이 슌지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편지에 쓰인 추억은 이제 전부 네 것이야. 그러니 이 기억과 함께 할 짧은 추신을 덧붙일게.

 

우리는 다시 미래에서 만나.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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