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문

어떤 느낌
글쓴이 : 박서혜 날짜 : 16.10.13|조회 : 7627


어떤 느낌
글_박서혜 인하대학교 경제학과 1학년. 제14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자
14회 친구들을 처음 만난 날 저는 제가 제일 어릴 것이라 생각했기에, 제가 제일 늙어 있는 것이 꽤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각 외로 젊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 여러 동생 분들과 즐겁게 이탈리아를 다녀왔다고 생각합니다.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겠지요.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니까요.
사실 저는 문예창작과나 극작과가 아니라서 (한 때는 참 가고 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만,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지요) 주변에 글을 쓰는 친구들이 없습니다. 때문에 대산 대학 문학상을 통해 글 쓰는 동지, 동료, 잉여..... 아무튼 네 명의 친구들이 생겨서 이탈리아에서도, 돌아온 한국에서의 2016년도 든든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 꿈을 꾸는 것 같다’는 표현을 꽤 많이 썼습니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면, 꿈같은 기억들이 정말 소멸되어 버릴 것만 같아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느낌’은 일종의 무의식으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 믿어 보겠습니다.
2016년 2월 6일과 7일.
인천 공항 집합 약 18시간 전, 2월에 하고 있던 공연이 끝났습니다. 약 22시간 후면 출국을 해야 하는 저는 공연 스트라이크를 하고 있었고, 제 손에는 여권과 금요일에 급히 환전한 약간의 유로.....????? 짐을 싸야 하는데. 음??? 수건과 속옷 한 벌과 양말 한 짝과 충전기와 수첩과 볼펜을 배낭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친구 연아가 빌려준 옷을 입고, 끝. 뭐, 겨울이니까요. 씻고는 다녔습니다. 정말입니다.
사실 캐리어를 가지고 갈까도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격상 어딘가에 버리거나 분명 고장 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가 공연 기간 중에 한 3일 정도를 캐리어를 끌고 극장을 다녀봤는데 이것은 도저히 저라는 사람이 가지고 다닐 물건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여권은 잘 챙겼습니다. 잃어버리지도 않았지요.
이것저것 챙기다보니 새벽이 다 된 시각. 쪽잠을 자고 출발하려는데 목이 시큰거렸습니다. 여행 내내 꽤 아팠기에, 많은 걱정을 끼쳐드렸어서 죄송함이.... 빡빡했던 준비와 한국을 떠나본 것이 처음이라 긴장을 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출발 일에 성호와 면세점에서 쇼핑을 하고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는데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을 먹으니 더 안 좋아졌습니다. 알리탈리아 항공의 승무원 아저씨들은 잘 생기셨고 친절하시며 몸도 좋으시지만 음... 파스타는.... (특히 귀국 때 먹었던 라자냐... 라자냐를 왜 기내식으로 낼 생각을 했을까요? 그 뿔면 답 없는.... 네모난 면을)
비행 내내 항공 경로를 보고 있었는데 러시아? 부근을 지날 때 밖에 기온이 영하 팔십 도까지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하 팔십 도는 처음 봐서 신기했는데 창가라서 추웠습니다. 옆자리의 소희는 정말 잘 잤습니다.
잠들어 있는 소희 곁에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비행기에서 어느 순간 해가 지기 시작했는데 계속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해가 지기 시작하고 주구장창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해가 지기 시작하고 해가 지기 시작하고 몇 시간동안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서편의 별을 향해 가는 여정에선 오늘은 계속 정지해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feat, 안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느낀 것이지요. 다이어리에 적은 것을 확인해보니 여섯 시간 동안 해가 졌네요.
긴 비행을 마치고 이탈리아에 도착하니 밤이었습니다. 낯섦이 가득한 곳에서 장근명 대리님은 길을 잘 찾으셨습니다. 세상에, 인간 네비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피렌체에서는 길을 잃으셨죠) 물론 며칠 후에는 조금은 익숙해지긴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는 것이겠지요. 가령 로마 공항은 간판만 읽을 수 없는 김포 공항 같았고, 공항에서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트는 이마트 같았습니다.
어쨌든 로마에 도착한 첫 날, 숙소에 짐을 풀고 윤정이와 한 방을 쓰게 되었습니다. 미안해 윤정아 내가 잠버릇이 좀 심했지.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서 야경을 보고 근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이선균 성대모사를 썩 잘하는 성호는 피클을 받으러 가서 초록색 올리브를 많이 받아왔습니다. 아주 많이. 이탈리아에서는 피클을 먹지 않는 다고 합니다. 이선균이 나오는 드라마 <파스타>를 봤으면 알았을 텐데...
2월 8일.
아침, 약간의 가이드와 통역을 맡아 주신 메를리니님과 함께 어떤 카페에 갔습니다. 그런데 카페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습니다. 하....... 문화 충격.
메를리니와 함께 콜로세움으로 향했습니다. 엄청 큽니다. 정말 거대합니다. 이 말 말고는 형언할 만한 말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서양 문명을 처음 만난 근대 지식인 선배님들이 된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저는 한국의 역사 유산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렇게까지 많이 부럽진 않았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2X년을 한국에서 살았으면, 많이 살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오래된 것에 대한 경이로움을 오랜만에 느껴 본 것이 사실이었고, 대부분의 거리에 잘 보존되어 있는 옛날 건물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스페인 광장에 도착해 이탈리아에서의 첫 젤라또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괴테가 자주 갔다던 카페에 가서 에리데 루카 작가님을 만나기 전의 회의를 했지요. 대학에서 오랜만에 조별 과제를 하는 것 같아 재밌었습니다. 그리고 작가님을 만나러 갔는데 언어적인 소통이 원활하지는 않았어서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도 눈빛만 봐도 통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특히 작가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 아직도 기억에 납니다. 리조또가 정말 맛이 없었습니다.
2월 9일.
9일의 오전 일정은 바티칸 박물관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지적 허영으로 인해 <아테네 학당>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왜냐면 아테네 학당을 보면 엄청난 지식과 교양을 얻을 수 있었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바티칸을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알고 보니 아테네 학당이 벽화였더군요. 저는 그 그림을 보겠다고 그 드넓은 바티칸을 무식하게 경보로 경보로 경보로..... 몇 번을 지나쳤던 길에서 간신히 <아테네 학당>을 발견하고 반성과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IS가 한창 이슈였기에 바티칸에 안 갈 뻔 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으나 바티칸이 박물관인지는 몰랐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이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에 조금 선한 삶을 지향해보겠다고 학교 근처 성당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를 받기 일주일 전,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말을 잊을 수가 없어 그만두고 말았는데 왠지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알현하면 없던 선함과 종교적 신념도 몽글몽글 생겨날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짐 보따리에 먼지가 앉아가던 묵주도 챙겼건만, 바티칸이 그렇게 클지는 몰랐습니다. 바티칸에 들어갈 때 대리님께서 저에게 동생들을 챙기라고 하나뿐인 소중한 지도를 쥐어주셨는데... 그게 참... 그곳이 얼마나 넓던지 10분 만에 모두가 흩어졌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니 알아서 잘 나오겠지요. 하하하.
길을 찾아 나오니 동생들이 기념품을 사고 있습니다. 성호와 유진이는 반짝이 가루가 들어 있는 피라미드를 샀습니다. 성호의 피라미드는 고양이가 이미 파괴시켰습니다. 유진이 것은 무사하길 바랍니다.
바티칸을 끝으로 로마 여정을 마치고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이동했습니다. 피렌체에 도착해서는 두오모 앞에서 똑똑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커피를 한잔씩 했습니다. 조금 추웠습니다. 숙소를 찾고 오시겠다는 대리님이 안 오십니다. 상술했듯 길을 잃으셔서.. 그런데 알고 보니 숙소가 그 근처였던... 대리님이 안 오시는 사이 성호와 유진이는 라이터를 샀습니다. 성호는 그 라이터를 올해 내내 잘 쓰는 모양이던데, 유진이는 드릴 분께 잘 선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숙소로 이동 후 저녁을 먹으러 나왔는데 대리님이 저희에게 광장에 있던 회전목마에 탑승하게 하셨습니다. 커헉. 동심이 사라진 지 오래라 타기가 남사스러웠지만, 지나고나니 다시 한 번 타고 싶습니다. 피렌체의 밤과 중식당의 메뉴는 아름다웠습니다.
2월 10일.
아침부터 우리는 피렌체 두오모를 등반했습니다. 근데 계단이 우왁, 계단이, 바람이, 우왁, 바람이, 우왁, 계단이... 옛날 사람들은 참 체력이 좋았을 겁니다. 두오모에서 내려와 단테박물관과 우리가 그토록 가고 싶다고 강조해온 가죽시장에 갔습니다. 가죽시장에 계신 상인 분들은 저보다 한국말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한식당에 .....!!!! 오후에는 미켈란젤로 언덕을 올랐습니다. 그 곳에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바람을 만났습니다.
저녁은 저희끼리 먹었는데, 식당에서 나오니 대리님께서 거리의 악사님께 동전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대리님은 생각보다 낭만을 즐기시는 분입니다.
2월 11일.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이동하기 전 오후 정도까지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피렌체 두오모에서 진행하는 아침 미사에 가 보았습니다. 이탈리아어를 ‘그라지에’와 ‘차오스’ 외엔 몰라서 뭔 말이진 모르겠지만, 외국 미사를 구경하는 것은 나름 괜찮았던 경험이었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약국에 갔습니다. 테르미니역에서 산 약을 들어 보이며 ‘이건 영 별로니 나에게 쎈 약을 지금 당장 달라’를 콩글리쉬와 손으로.... 생존을 위해서는 어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들 각자의 아침 일정을 마치고 모였는데, 윤정이가 폭신폭신한 뇌 모형을 들고 왔습니다. 데카르트가 떠올랐습니다.
베네치아로 향했는데, 모두 약간 지쳐 졸다가 도착한 베네치아 역 앞은 신기했습니다. 바다가, 바다가, 바다가, 역 앞에 바다가! 어둠이 내린 밤에 도착해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베네치아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실사판으로 찍는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택시를 탔는데, 택시가, 택시가, 바다로 다닙니다. 버스도......! 근데, 이게 처음에만 신기하지... 이게 배다 보니까 나중에는 가만히 땅에 있어도 천지가 바다처럼 요동치곤 합니다. 심지어 한국에 와서까지.... 누워 있는데 며칠 간 침대가 꿀렁꿀렁 거렸다는 증언들이 있었습니다. 이날 저녁 일정에 갔던 베네치아의 작고 아늑한 레스토랑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그 때 마담은 와인을 너무 비싸게 팔았습니다.
2월 12일.
베네치아 대학교의 학생들과 빈첸자 두르소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고 나섰습니다. 베네치아 대학교의 한국학과에서 각자의 작업을 이야기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한국학과 친구들이 흥미롭게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 뿌듯했습니다. 그때 한국학과 친구들에게 작업 얘기를 하면서 언제 하게 될지도 몰랐던 <대안 가정 생태 보고서> 공연을 자랑했는데 어느덧 그게 진짜 얼마 남지 않았네요. 베네치아 대학교 2학년 프란치스코 학생이 보러와 주길 바랍니다.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거리다 개다 그랬는데, 빈첸자 두르소 선생님과 함께한 저녁시간부터 비가 주구장창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와 바다를 좋아하는 저도 살짝 추웠는데, 다들 오들오들 떨며 버스 정류장(선착장)에서 버스(배)를 기다리던 까만 밤이 기억납니다. 위도 아래도 옆도 모두 다 물이었던 기억은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2월 13일과 14일. 그리고 지금.
무라노 섬 방문 이후 우리는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썩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피렌체에서부터 한 가지 재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방향감각입니다. 베네치아 숙소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 잠깐 시간을 내서 홀로 거리에 나갔습니다. 그 때 절대 가방은 구했지만 시간을 멈출 수 있는 모래시계는 찾지 못했습니다.
파스타는 원래 대량으로 하면 맛이 없는데 맛있게 드셔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더 맛있게 해 드릴게요. 마피아 게임도 한 번 더 하고 싶습니다.
약간의 비가 왔고, 대리님이 주관하시는 아침 베네치아 산책은 취소되었으며 서둘러 이런 저런 정리를 해서 베네치아 공항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에서 막내 유진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사히 함께 돌아왔지만 그때 얼마나 아찔했던지.
그리고 다시 비행기. 옆자리의 소희와 함께 긴 비행시간을 막막해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에 들었습니다. 잠이 들기 전 또 언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태어나서 처음으로 외국에 왔으니 글로 쓸 소재를 찾겠다고 노력했는데 결국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유진이처럼 유리에서 영감을 얻진 못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참 선명한 꿈을 꾸었습니다. 진홍빛이 가득 들어 찬 덜컹거리는 열차 안이었는데, 참 찬란했습니다. 우리의 여정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편서풍은 정말 좋은 녀석이라는 겁니다.
지난겨울, 이탈리아에서 참 좋았습니다. 스페인 감기와 함께 한 여행이었음에도 날도 좋았고, 봄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바람도 좋았고. 함께 했던 사람들도 좋았습니다.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고 그립습니다.
다시없을 좋은 기회를 주신 대산 문화 재단, 여행 내내 가장 먼저 움직이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던 대리님, 그리고 여전히 함께 하고 있는 소희 윤정 성호 유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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