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한지수_고려대학교 경영학과 4학년. 제12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수상자
현관에 들어섰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장은 이런저런 뻔한 질문에 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했다. 여행 중에 걸린 감기와 장시간의 비행 탓에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캐리어를 방 한구석에 대충 던져놓고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짐정리고 뭐고 우선 쉬고 싶었다. 옷을 훌훌 벗고, 아이폰으로 음악을 랜덤플레이한 뒤, 뜨거운 물을 가득 받은 욕조에 천천히 몸을 담갔다. 몸이 조금씩 풀리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문학기행 중에도 나는 지금처럼 여유로운 반신욕을 즐긴 적이 있다. 스페인의 작은 도시 론다를 여행할 때였다. 숙소는 조금 허름한 편이었는데, 놀랍게도 화장실에 욕조가 있었다(여행하며 묵었던 숙소 중 욕조가 있는 곳은 론다가 유일했다). 가난한 여행객이 쉬이 누릴 수 없는 호사였다. 물론 론다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기억의 대부분은 다른 곳에 있다. 론다는 무엇보다 거대한 절벽과 벼랑이 이루어내는 풍경이 압도적인 곳이었다. 인간의 힘이 개입하지 않은, 오로지 긴 시간과 우연의 조화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절경을 마주할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다. 그날 나는 누에보 다리와 절벽 아래를 오르내리며, 헤밍웨이와 릴케가 사랑한 도시였다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몇 번이나 주억거렸다.
세비야는 이러한 론다와 정반대의 매력을 느꼈던 곳이다. 플라멩고 때문이었다. 기타 연주와 노래, 그리고 손뼉 치기, 발 구르기, 춤 등의 조화로 진행되는 플라멩고 공연은 론다와 반대로 인간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특히 매우 빠른 속도로, 그러나 서로 다른 박자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면서도 끝까지 서로의 합을 맞추어 내는 것은 결코 한 눈을 팔 수 없는 진기한 광경이었다.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것 같다.
세상이 끝나려고 해. 누구의 무슨 잘못인지. 욕조에 누워, 플라멩고를 공연하던 이들이 짓던 환한 웃음을 떠올리고 있는 와중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자연스레 여행의 시간대가 조금 이동했다.
세비야에서의 산책은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세비야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은 온전한 자유 시간이었는데, 하필 비가 참 많이 내렸다. 그렇다고 숙소에 가만히 있기는 아쉬워 혼자 우산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잡다한 생각을 하며 조금 걷다보니, 눈앞에 강이 있었다. 강 주변은 흩날리는 비와 짙은 안개로 인해 아스라했는데, 그것이 묘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는 이끌리듯 그쪽으로 갔다.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강가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이어폰에서는 이이언의 '세상이 끝나려고 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당시의 풍경과 분위기에 절묘할 만큼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나는 계속 걸었다. 괜히 감상에 젖어 평소에 싫어하는 사진(특히, 풍경사진)을 여러 번 찍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았기에, 혹은 기대하지 않았기에 감동이 배가 될 때가 있다. 세비야에서의 산책이 전자였다면, 그라나다의 한 골목에서 마주했던 전경은 후자였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어디로 향하는지 모른 채, 또 별다른 관심도 없이 나머지 일행을 따라 그라나다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조금씩 발이 아파 올 즈음, 일행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살펴보다가, 이내 숨이 턱 막혔다. 느닷없이 그라나다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던 것이다. 이미 전날 알함브라 궁전과 알카자바에서 실컷 봤던 전경이었는데도, 전혀 새로웠다. 부끄러운 비유이지만, 도서관에 가서 제목조차 확인하지 않고 아무 책이나 골라 꺼내 읽었는데, 의심의 여지없는 걸작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이와 같지 않을까. 그때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욕조에 얼마나 있었던 걸까. 물속으로 비치는 내 살들이 조금 낯설었다. 손으로 살짝 문지르자 하얗게 불은 때들이 이만큼 밀려져 나왔다. 나는 괜히 배가 고파졌다.
개인적으로 스페인의 전통 생햄, 하몽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오죽하면 스페인이 문학기행지로 정해졌을 때, 하몽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부터 하며 환호성을 질렀을까. 특유의 짭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인 하몽은, 이번 여행에서도 내게 커다란 기쁨을 주곤 했다. 하몽 외에도 빠에야부터 시작해 스페인 식 오징어 튀김과 문어 요리 및 각종 육류 요리 그리고 맥주와 샹그리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스페인을 여행하며 이것저것 참 먹기도 많이 먹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언제나 행복했는데, 사실 이는 음식의 맛 보다 동행한 이들 덕분이었다. 우리들은 (적어도 내가 느낀 바로는) 대화가 참 잘 통했다. (문학에 관한 진지한 토론은커녕) 시시껄렁하고 시답잖으며 질펀한 농담들이 함께 했던 우리의 식사는 늘 유쾌했고, 그랬기에 오랫동안 지속됐다. 지친 체력을 회복한다는 이유로, 많은 볼거리를 내버려두고, 식당 한 구석에 앉아 맥주나 샹그리아를 홀짝거리며 대화의 소재가 떨어질 때까지 수다를 떠는 것은, 여행을 하며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 중에 하나가 아닐까. 적어도 한국의 일상에서는 별로 경험해 본 적이 없는 나른한 즐거움이었다.
그런 영화가 있다. 인물들은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 겪을 법한 어떤 일들로 인해 웃고, 기뻐하고, 사랑하거나 때로는 다투고, 슬퍼한다. 특별히 어떤 커다란 사건도 없이, 우리의 일상을 찬찬히 그려낼 뿐이다. 잔잔하고 소소하며 조금은 지루한 그런 영화. 허나 이상하게도, 영화가 끝이 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음악이 흐르면, 가슴 한 구석이 참 아리다. 전혀 슬플 것이 없는 영화인데, 어떤 까닭인지 묵직한 비애감이 서서히 마음을 가득 채운다.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쓰러져 있는 캐리어를 바라봤을 때의 내 기분이 그러했다. 분명 즐거운 여행이었다. 지금도 좋은 기억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유쾌한 사람들을 만났고, 떠나기 전에 했던 생각과는 달리 (적어도 내가 느낀 바로는) 꽤나 친해질 수 있었다. 좋은 풍경과 훌륭한 작품들을 보았으며, 맛있는 음식들을 먹었다. 특별히 화나거나 슬픈 순간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정체모를 이 서글픔은 무엇인가.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감정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싫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졌고 어쩐지 다행이기까지 했다. 마치 좋은 여행의 끝에는 늘 그런 감정이 함께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준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책이나 영화, 혹은 음악 때문이 아닌, 실제의 삶을 통해 이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건 꽤 커다란 행운인 것 같다.
끝으로 조금 낯간지럽지만, 함께 여행했던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글을 마치고 싶다. 온전히 그들 덕분에 지난 10일간 참 행복할 수 있었다. 많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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