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

대산문화 표지

진달래꽃

호놀룰루로 쓰는 편지

‘김수영문학관’을 지키는 명예관장 김수명 선생과의 대화

온몸의 존재 : 바람과 양극의 긴장

기획의 말 ①사야(買) 살(住) 수 있는 집 ②2013년과 2021년, 그들도 다른 그들처럼 ③집을 쫓는 모험 ④잠시 중지된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역사하는’ 작은 역사가들

코로나 시대의 희망

저항은 살아가는 일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 것

미신(未神)

맹인 김씨 아저씨와 국어선생과 아, 이성복 시인

그 날의 초상(肖像)

팔레트, 늪, 사랑 - 지구 반대편에서

그림 속에 펼쳐진 창덕궁과 창경궁의 장대한 경관

①의심을 품자, ②명품 위에 쓴 시,우리가 웅덩이를 안다 해도 갈 데가 없다

①제천 1907 ②무급휴가

체험 학습

①강물을 읽다 ②누가 길 위에서 우는데 ③이게 내가 하는 일이에요

①매혹과 응답 ②새로운 풍경과 감각으로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열다

역병의 시대, 한국소설을 호출하다

영웅은 그대 품 안에

아궁이샘물 시인과 《작가세계》 탄생

내 생애를 지시하는 나침반

풍경이 있는 단 하나의 길

눈물을 연기하는 눈물 없는 신파극

비극은 누가 만드는가?

첫 역주본 한국한문소설

한국판 ‘백년의 고독’에 함께 울다

초학자와 어린이를 위한 당송시(唐宋詩) 입문서

대산창작기금 등

2021 대산창작기금 및 한국문학 번역·연구·출판지원 공모 등

기획특집

①사야(買) 살(住) 수 있는 집

- 집을 얻고 산다는 것

김광현
건축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1953년생
저서 『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 『건축강의』(전10권)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 『건축 뒤에 숨은 사회』 『성당, 빛의 성작-전례와 공간-』 등

살아보지도 않은 저 먼 옛날에 집 짓고 살던 사람들을 상상하며 집이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할 때가 많다. 100만 년 전부터 지구 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지만 집을 지을 줄 몰랐다. 그들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땅에서 움푹 파인 지형, 나무 밑, 동굴과 같은 곳을 찾아 비바람을 피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집을 대신했다. 집은 지을 줄 몰랐지만 집이라는 관념은 지니고 태어났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했다고 오늘날의 집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건축은 집을 짓는 일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집은 건축과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건축이라는 말은 지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을 가리킨다면, 집은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가 살기 위하여 지은 구조물이라는 따뜻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집을 왜 짓는가? 이것은 결코 철학적인 질문이 아니다. 답은 아주 쉽다. 집은 매일의 생활을 반복할 수 있는 곳이어서 안심이 되고 휴식과 기쁨을 주는 곳이다. 집을 얻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집을 왜 짓는가”라는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아주 쉽고 당연한 말을 했다. “집은 인간에게 쉼과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집은 어딘가 멀리 떠나 있어도 늘 돌아가야 할 거점이자 원점인 곳이다. 심지어 칼, 벼루 등도 뺏다가 다시 끼거나 담아 둘 수 있게 만든 것도 집이라 하지 않는가? 저 먼 옛날 남정네들이 며칠 동안 돌아다니며 사냥한 먹잇감을 메고 돌아오며 저 멀리 언덕에서 흐뭇한 마음으로 그들의 집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무리의 가족들에게 내려놓으며 나누어준다. 이때의 감정은 어떠했을까? 월급날 뿌듯한 마음으로 귀가하여 “월급이야”하며 봉투를 툭 내밀 때의 기분과 똑같지 않았을까? 인간 최대의 행복은 집 속에 있다.
“객지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집이 그리워진다.” 이때 그리운 집은 가정을 이루고 생활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를 두고 ‘집안’이라 하는데, 집에서 함께 살림을 꾸려 나가는 가족, 공동체, 가까운 일가를 뜻한다. 집에 에워싸이고 집의 안에 안겨 있는 사람들이 ‘집안’이고 공동체다. 그러니 집이라는 공간 없이는 공동체를 말할 수 없다.
기계도 건축물처럼 정해진 기능과 특정한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기계에는 바깥 세계가 없다. 그러나 건축에는 늘 바깥 세계가 있다. 반드시 환경 안에 놓이고 환경을 형성하며, 환경과 대화한다. 빛도 만나고 벽돌도 만나며 창밖의 다른 구조물이나 자연을 늘 만나게 되어 있다. 사람의 몸이 밖에서 오는 여러 자극을 안으로 전달하듯이, 집을 통해 비로소 바깥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집은 비바람과 맹수를 피하려고 지은 피난처였건만, 지금은 주택이 코로나19를 피해 도망가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혼자 따로 떨어진 공간에서 익명적으로 사는 ‘혼공’의 도시 생활이 정말로 물리적으로 격리된 ‘혼공’이 되고 말았다. ‘혼밥’, ‘혼술’도 ‘얼로너’인 내 의지로 타자와 거리를 두었지만, 이제는 거리에서 스치는 타인과도 거리를 두고 걸어야 할 정도로 사람과의 결속이 끊겨 버렸다. 처음에는 비대면 강의가 이상하다더니 이제는 정상화되어도 앞으로 대학에는 비대면 강의가 꽤 많아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집의 의미를 다시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집의 본질조차 잃고 있는 중이다. 집이란 밖에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인간의 원점인데, 나갈 곳이 없으니 다시 돌아오는 기쁨도 아예 사라졌다. 많이 모이고 이동하던 활기찬 시설은 이제는 될 수 있으면 가지 말아야 할 기피 장소가 돼 버렸다. 집의 근본적 의미는 바깥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해야 하는 것인데,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교류의 단절을 지금 경험하고 있으니, 이러다가 결국에는 집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다.
한편 미국의 남서부 지역에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 족이 있는데, 그들은 전통에 따라 어른이 되려면 반드시 호간이라는 집을 지어야 했다. 호간이 있어야 행복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호간이 없으면 너는 계획을 짤 수 없다. 밖에 나갈 수도 없고 미래를 위해 다른 것을 계획할 수 없다. 먼저 호간을 지어야 한다. 호간 안에서 앉게 되고 계획이 시작된다.” 집은 그 자체가 행복이요 희망이며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곳이라는 지혜가 이 말 속에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집을 둘러싸고 아주 우울하다. 실수요자들인 3040 세대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도 집을 짓기는커녕 집을 살 기회를 잃어 가고 있다. 전문직 고소득 맞벌이 부부는 아이가 없더라도 월급을 착실히 모으고 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갚으면 집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바로 이들이 무주택자를 벗어날 수 있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오늘의 호간인 내 집 마련을 할 수 없어서 밖에 나갈 수도 없고 미래를 위한 무언가를 계획할 수 없게 되었다. 집은 인간에게 쉼과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데, 그 집이 넘지 못할 사다리요 미래의 단절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 집의 본질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집에 대한 지혜가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우리나라에서 주택은 삶의 질을 보장해 주는 보편적 재화가 아니다. 먼 옛날에는 사는(住) 집이었지만, 지금은 팔고 사는(買) 집이다. 집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부동산 상품이고 소비재다. 집이 사는(住) 집이라면 ‘주택 매물’이라는 말이 생겨날 리 없고, 실거래가, 매매, 유형, 평형, 가격, 세대수, 입주연차, 용적률, 건폐율, 전세가율, 갭 가격, 임대 사업률, 월세 수익률과 같은 거래정보로 주택을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요사이 부쩍 집은 ‘사는(買) 것’ 아니라 ‘사는(住) 곳’이라며 주택을 부동산으로만 여기지 말라고 말을 많이 듣는다. 여기에 작품 하시는 저명한 건축가도 가세하여 건축은 무릇 ‘더러운’ 부동산이 아니라고 고매하게 가르친다. 그렇다면 주택이 동산이란 말인가? ‘사는(住) 집’은 윤리적으로 선한 집이고, ‘사는(買) 집’은 투기의 대상으로 집을 보는 사람들의 집인가? 그러나 어디 그런가? 집에 들어가 살아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깨끗한 부동산, 더러운 부동산 같은 개념 따위가 어디에 있는가? 15년 전쯤에 들은 광고 문구였는데, 이제는 집에 관한 생활 윤리의 표어가 되고 있다. 부동산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주택을 사야(買) 들어가 살(住) 것이 아닌가?

 

20세기 이전에는 유럽에서 주택이란 부모로부터 이어받거나 임대로 빌려 사는 것이었다. 질리 쿠퍼가 영국의 계급사회를 풍자적으로 쓴 『계급(Class)』(1999)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다. “저 사람은 산 집에서 살고 있어’라는 말은 노동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면 대단히 칭찬하는 기분에서 하는 말이지만, 상류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한 말이라면 별것 아니라는 경멸의 기분을 나타낸다. 상류계급은 몇 세대나 걸쳐서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구나 은그릇을 유산으로 이어받듯이 집도 이어받는 것이다.”
이럴 정도로 주택은 계급을 나타냈다. 그런데 집을 사서 가족과 함께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노후의 인생을 보장해 주는 집을 사서 소유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꿈이었고 20세기부터 시작된 새로운 욕망이었다. 그러므로 이 꿈은 허황된 것이 아니다. 매일의 생활이 반복되어 안심이 되고, 휴식과 기쁨을 주며, 나갔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원점을 갖겠다는 욕망은 “집이란 인간에게 쉼과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어디 사세요?” 우리 사회에서 이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이 되고 말았다. 이 질문은 ‘당신의 신분이 무엇이냐’, ‘어디에 살고, 어떻게 사는가’를 물으며, 상대방의 사회·경제적 능력과 신분을 가늠해 보겠다는 물음이다. “어디 사세요?”라는 뻔한 질문은 지금 사는 곳과 주택 형식, 단지 이름으로 나뉜 보이지 않는 주거 계급을 자극한다.
한때 아파트의 광고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고 했는데, 그만 그 광고문이 지금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본래 공간은 평등하지 않으며 계급적 성격이 강하다. 음악이나 미술, 패션은 중요한 문화이지만 건축은 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비싸다. 주택은 모두 제각기 갖고 싶어 하고 일생에 거의 한 번 살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도로 자기 재산 중 가장 비싼 것이다. 그래서 주택이라는 재산은 특히 소비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을 가장 크게 상징한다. 더군다나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고 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이 평등하게 생산될 리 없다. 따라서 주택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상품이다.
편안한 자리에서는 집은 ‘사는(買) 것’이 아닌 ‘사는(住) 곳’이라고 말하던 국토교통부 장관도 정작 국회에 나와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는 “집은 그런 것이야”라고 멋있게 말할 때나 하는 것이며, 정작 문제는 ‘사는(買) 것’에 있다는 것을 자기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회에 나와서는 역시 ‘시장’, ‘갭투자’, ‘물건’, ‘매물’이는 말로만 집을 설명한다. 하기야 집이란 “인간에게 쉼과 행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근거하여 주택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한 정치가나 국회의원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기에 주택의 공공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심지어 “주택은 공공재”라고까지 규정한다. 급기야는 국회에서 “주택은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주거의 공간이며 삶의 보금자리인 공공재”라는 발언까지 등장했다. 주택이 주거의 공간이고 삶의 보금자리인 것은 사실이고 투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주택이 왜 공공재라는 말인가? 공공재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함께 소비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이고, 대부분의 공공재는 국가가 제공하는 것이다. “주택은 주거의 공간이고 삶의 보금자리”라는 집의 근본적 가치는 주택이 공공재여야 하는 공허한 주장의 그럴듯한 배경이었을 뿐이다.
이제까지 주택 생산은 민간에게 떠넘겨 왔다. 민간이 주택을 생산하니 주택은 상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는(買) 집’은 개인이 알아서 샀고, ‘사는(住) 집’의 주거도 개인이 알아서 해결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주택정책은 주택매매정책이었다. 정작 우리나라에는 주택의 수량, 위치, 가격을 열심히 따지는 ‘주택정책’만 있었지, 주택은 사는 공간이며 삶의 보금자리여야 하는 것을 주택정책의 목적으로 삼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말로는 집이란 ‘사는(住) 곳’이지 ‘사는(買) 것’이 아니라면서 온통 ‘사는(買) 것’만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그렇게 집은 ‘사는(住) 곳’이지 ‘사는(買) 것’이 아니라면, ‘사는(買) 집’을 ‘사는(住) 집’으로 만드는 구체적인 방식은 왜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사는(住) 곳’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된 관심은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집 한가운데를 받치는 저 기둥 하나가 알 수 없는 불안한 세계 속에 자기를 위치시키는 것임을 인간은 근원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그런가,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법을 뜻하는 그리스어 노모스(nomos)는 ‘배분하다’, ‘소유하다’, ‘배분된 것을 소유하다’, ‘살다(住)’를 의미하는 네메인(nemein)에서 나왔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도시국가의 법(法)이란 문자 그대로 벽(壁)에 관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주택과 관련된 수량에만 국한된 모든 제도와 행정과 정책을 버리고 배분하고 소유하며 사는 건축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에서 출발하라는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현실이 다름 아닌 집에 얽혀 있다. 그러나 집을 ‘사는(買) 것’으로만 문제 삼고 있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집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와 가치의 근본적인 의미를 잘 알고, 집의 소유가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계획하는 제대로 된 ‘사는(住) 곳’임을 인식해야 지금의 집 문제를 해결해 갈 수 있다. 이 사실을 건성으로 알아듣고 수량과 객관적 지표에만 몰두하는 이상, 우리는 집도, 집안도, 삶의 거점도, 공동체도, 바깥 세계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얻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