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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의 문학, 양보의 문학

내가 연극을 처음 접한 것은 희곡을 통해서였다.
  연극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연히 보게 된 한편의 연극에 매료되어 최면에 걸린 듯 연극의 길로 들어섰다고 하는데, 나는 글을 통하여 연극을 만난 셈이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던 시절, 무심코 영문학을 전공한 언니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희곡집을 빼어들고 읽기 시작한 것이 연극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테네시 윌리엄스, 유진 오닐, 에드워드 올비의 희곡집들을 반복해서 읽으며 구체적인 공간과 인물들을 상상하는 일은 또 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 가보는 매력이 있었다. 사건과 심리가 정교하게 짜여진 희곡일수록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되어서, 암울하게 느껴지던 현실을 대신 할 흥미로운 세상이 생겼고, 드디어는 내 인생의 진로마저 바꾸게 되었다.

  대학의 연극과에 진학해서 본격적으로 희곡을 써 보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연극이 존중받지 못하는 예술이라며 가족들은 반대를 했지만, 세상에서 그토록 창조적이며 활력이 느껴지는 예술이 더 이상은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간이 인간 앞에서 말과 행동으로 삶을 재현하며 정서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행위야말로 감동의 극치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고, 또 그 작업의 모태가 되는 것이 희곡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고대하던 희곡작가로서의 첫 기쁨인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는 중에, 나는 희곡의 본질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날의 느낌으로는, 희곡 창작의 뿌듯함보다 공연에 있어서 국외자의 느낌이 앞서는 것이었다. 희곡은 연극의 주인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닐 뿐더러 일종의 단서로 제공되거나 이미지를 그려내는 협력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소외감이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그날의 공연이 그런대로 짜임새 있는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충동의 긴 언덕을 걸어 내려오면서 상실의 느낌에 씁쓸해 했다. 그 연극 속에는 내가 그리려 했던 인물들이 다르게 표현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쓴 희곡이 치밀하지 못했던 점이 원인이었겠지만, 어쩌면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희곡에 대한 짝사랑이 깊었는지 모르고, 또한 여전한 선비 중심 사회의 영향으로 스스로 문자에 대한 주인공 의식이 강한 나머지 희곡이 강하게 지배하는 연극을 바랐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날 이후에도 몇번을 다시, 희곡이 연극에 그림자인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한참을 희곡 쓰는 일을 접어두었다.

  알량하게 공부한 드라마 쓰는 법을 이용하여, 방송에 관계된 일에 몰두하며 살면서 한쪽으로는 늘 희곡에 빚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근 십년만에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 일하게 되면서, 희곡 쓰는 일 보다는 연출 작업을 우선하게 되었다.

  그런데 작업 중에 남이 쓴 작품을 재구성하거나 해부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나는 희곡, 또 희곡작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연극이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좋은 공연을 한다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기에, 희곡의 문학으로서의 가치와 입장은 연극 뒤에 있어야 하고 얼마나 극적인가가 관건이며, 또 얼마나 비문자적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시나 소설을 비롯한 다른 장르의 작가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종의 희생이기도 한 희곡은, 또 그렇게 각기 다른 능력들을 모아 연극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가는데에서 다른 문학에는 없는 힘찬 생명력을 지니기도 한다.

  배우나 연출의 경우도 그렇지만, 희곡을 쓰는 일은 생활을 위한 직업이 되지 못한다. 희곡작가보다 평론가의 숫자가 더 많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것이 우리연극의 현실이고, 또 희곡작가의 위상을 나타내 주는 증거이다.

  요즘 일부 공연에서는, 연극에서 대본이라는 소재 자체를 생략하는 경우까지 있는데, 창작의 흐름이 어떻게 변하고 연극에서의 희곡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던, 좋은 희곡은 연극을 제대로 서게 하는 결정적인 골격이 된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언제나 좋은 희곡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갈망이 커간다.

  희곡이란 겸손한 문학이며, 희곡작가란 연극을 위해 등을 내주고 엎드려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어쩌면 치밀한 계산 아래 능수능란하게 일을 꾸미면서도 그 재능을 유표하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문학이 아닐까한다. 이 독특한 문학이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