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대산문화
 
앞서간 시와 앞서간 악곡
 
근대시와 근대악곡의 운명적 만남
  육당, 춘원, 횡보에 이어, 이 나라 근대문학의 길을 열어간 문인의 탄생 백주년 기념 행사가 사회적 관심 아래 해를 더해가며 빛을 발하고 있어 정겹다. 이 정겨움은 조부(祖父) 또는 부(父)의 기일을 맞아 제주를 올리며 넙죽 절을 하는 그런 손주의 심사와 흡사하다. 이 말은, 그러니까 이 날만은 조부 또는 부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그런 종류의 분위기에 젖게 마련임을 뜻한다. 이를 두고 제의적(祭儀的) 성격이라 부르면 어떠할까. 거기에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글자를 넘어서 온 것이기에 저 플라톤처럼 목소리가 먼저라고 우길 필요가 없다. 목소리가 글자와 더불어 있었기에 둘이 한 몸으로 어울어진 그러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 제의적 성격이 올해만큼 선연(鮮姸)한 해는 많지 않을 터이다. 백년에 한번 날까말까 한 그런 시인 김소월(1902∼1934)과 정지용(1902∼1950?)이 백년 전 오늘에 태어났기에 그러하며, 그들의 대표작 「산유화」, 「고향」이 최고 수준의 목소리로 되어 들려오기에 그러하며, 목소리가 글자를 일깨우며 글자가 목소리를 부추기기에 그러하며, 가곡으로 몸을 바꾸었기에 그러하다.

  「산유화」의 기적이 불러온 악곡

  가곡이란 대체 무엇이뇨. 시와 음악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악의 한 형식이라 사전엔 적혀 있다. 이때 시란 근대시를 가리킴이 아닐 수 없는데, 왜냐면 여기서 말하는 음악이 근대(서양)음악을 뜻하기 때문이다. 반음(半音)을 두개나 포함한 근대 7음계는 5음계인 전통음악과는 크게 구별된다. 가곡 작곡에 있어 선율보다 시가 먼저 만들어져야 함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시상을 바탕으로 하여 악상(樂想)을 더듬어 가는 것이기에 좋은 시를 만나야 명가곡이 만들어지는 법. 「산유화」처럼 시가 먼저 '저만치' 있고, 그 다음에 악곡이 뒤따른다. 이 나라 가곡사가 시문학사보다 10년쯤 늦은 것은 이를 새삼 말해준다.

  한국가곡사에서 제일 많이 작곡된 시는 소월 시이다. 가곡 전체의 15%를 차지한다고 지적되어 있을 정도로 절대적이다(민경찬, 「김동환 작사 가곡 연구」, 2001).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던가. 이 물음은 문학사적이자 정신사적이기도 하다.

  평북 구성(龜城)에서 낳고 자란 소월의 시 활동은 근대 문학 초창기의 『창조』(5호, 1920)에서부터이다. 소월의 시 「낭인의 봄」 등이 발표된 『창조』(1919∼21) 동인들은 독립운동에 버금가는 예술운동을 한다고 공언했다. 그 굉장한 운동에 참여한 소월 시는 어떠했던가. 서양 근대의 양식과 내용이 동시에 그를 절망케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절망과의 싸움이었는데, 그것은 기묘하게도 출구 없는 몸부림이었다. 여기에다 대고 그는 '민요시'라고 가까스로 혼자 중얼거렸다. 몸을 기댈 수 있고 또 있어야 될 터전이 없다는 이 상실감이야말로 소월 시의 핵심을 이루게 된 것이다. 지금은 없는, 그러나 꼭 있어야 할 것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의 발현은 그로서는 '울림'으로밖에 포착할 수 없었다. 저승조차 울리게 되는 그런 울림이라고나 할까. 이 울림이 사무칠수록 『창조』가 지향하고자 한 근대는 절벽이 되어 그의 울림을 메아리로 받아칠 뿐이었다. 이 출구 없는 몸부림의 울림에서, 한 기적이 나타났다면 어떠할까. 「산유화」가 그것이다. 소월 시 80여 편이 모조리 '미완성품'이고 '시험작'이라 갈파한 것은 김동리였다. 오직 예외적인 한 편이 「산유화」라 갈파한 것도 김동리였다. 그리움의 대상이 시인 개인의 이런저런 정황을 초월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하나요, 율격이 시인 개인의 이런저런 한숨을 초월하여 일반성에로 나아갈 수 있었음이 그 둘째요, 그리고 이 둘이 기적적 완벽성으로 결합되었음이 그 셋째이다(율격에 대한 소월의 민감성은 유별났다. 구인모, 「소월시로 본 근대시 율격이론의 문제」, 2002). 「무녀도」라는 그림 한 장으로 저 거대하고 오만한 근대와 맞서고자 덤빈 김동리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소월의 저러한 기적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산유화」에서 그는 필시 자기 얼굴을 보고 있었을 터이다.

  근대와 맞서기에서 절망해 본 사람이 음악계에서도 분명 있었을 터이다. 홍난파, 박태준, 안기영, 현제명, 채동선, 김세형, 이흥렬, 김성태, 조두남, 김동진, 김순남 등이 모두 그러하지 않았을까. 내용을 담을 음악적 틀을 서양의 그것으로 한다 해도 막연했기에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고, 내용인 한국의 근대시 역시 아직 미정 상태라 이 또한 난점이 아닐 수 없었을 터이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기는 근대시의 경우와 마찬가지였을 터이다. 그러한 먹구름 속에서 몇 알의 붉은 열매가 맺혔을 터이다. 그 첫 번째 열매가 홍난파(1897∼1941)의 「봉선화」(1920)이다. 그가 쓴 단편 「처녀혼」의 서두에 「애수」라는 기악곡을 발표했을 때 이에 가사를 붙인 것이 김형준이었다. 「봉선화」의 탄생은 이처럼 앞뒤가 바뀐 희유한 사례인데,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총칼에 짓밟힌 한민족의 염원이 울림의 기적을 낳았던 까닭이다. 이러한 울림은 알게 모르게 또 많건 적건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걸쳤다고 볼 것이다. 민족적·민요적인 서정성, 곧 애상적·비감적인 것이거나, 김동환의 「봄이 오면」같은 밝고 건강한 삶의 노래이거나 간에 음악 쪽도 시가 쪽도 막연한 민족적 이데올로기의 안개를 먹이로 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우리의 어법으로 된 예술적 가곡의 출현은 4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산유화」이다. 「산유화」 자체가 지닌 시로서의 기적적 완벽성이 작곡가로 하여금 기적적인 가곡을 낳게 만든 분명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예술적이라 했거니와, 그것은 애상적·비감적인 것도, 또 건강한 낙천성이나 생활정서도 넘어서야 하지만, 민족적이거나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도 넘어서야 하는 법. 「산유화」만큼 이 사실을 증명해 보인 경우는 실로 드물다. 김소월이 「산유화」를 거의 악보의 형태로 제시했기에 김성태(1910∼)는 이 '준(準)악보'를 오선지라는 서양식 음악 기호로 바꿀 수조차 있지 않았을까. 최고의 정신은 정상의 양식을 부르는 법. 정신과 형식은 그러기에 분리 불가능한 법이니까.

  정지용의 「고향」과 채동선의 「고향」

  산에 피는 꽃을 모조리 노래함으로써 자연과 인간, 영원과 순간을 기적적으로 포착하여 이를 초월하고자 한 장사가 김소월이라면 바다의 알몸뚱이를 엿보고자 덤빈 역사(力士)가 정지용이었다. 바다를 멀리서 또 가까이에서 바라본 시인은 지천이었다. 항해에 지친 뱃군들도 무수했다. 기묘하게도 바다의 알몸뚱이를 보고자 덤빈 시인이 정지용이었다.

    미억냎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레꽃빛 조개가 해ㅅ살 쪼이고,

    청제비 제날개에 미끄러져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속속 드리 보이오.

    청대ㅅ닢 처럼 푸른

    바다

    봄

      (「바다1」, 『정지용 시집』, pp.2∼3)

  사람이 바다의 알몸뚱이를 엿보고자 하면 응당 그는 바다 속 깊이 들어가야 하는 법. 두 가지 장치가 필수적인 바, 잠수경을 갖춘 잠수복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수압에 견딜 수 있는 체력이 그것. 잠수경, 잠수복을 일러 모더니즘이라 부를 터이다. 서양식 과학기구의 명칭인 이 모더니즘을 체득케 한 것이 근대 교육이었다. 이 과학 기구를 체질적으로 즐겨 갖추고 또 이를 잘 사용한 사례의 하나가 정지용 시학이었다. 체질적이라 했거니와, 이는 곧 그의 잠수 능력을 가리키는 체력 그것이기도 했다. 유리를 통해서만, 혹은 그 변종인 안경을 통해서만 별도 하늘도 바다도 또렷이 보이는 것이니까(졸저,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 1999).

  육안으로 보던 별, 하늘, 바다, 비로봉, 구룡폭포 따위란 이 특수 유리기구로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현미경, 망원경으로 본 풍경이 거기 있지 않았던가. 사람들로 하여금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빌미가 그 기구 속에 있지 않았던가. 누가 감히 투명한 광학(光學)을 19세기 가곡으로 바꿀 수 있었으랴. 음열(音列) 작법에서 12음 작법으로 전환한 스트라빈스키나 꼬리 잘린 도마뱀 같이 통통 튀는 재즈라면 혹 몰라도, 슈베르트식 예술 가곡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 작곡가들이 정지용 시학에다 악곡을 붙이고자 쉽사리 덤빌 엄두를 낼 수 없었음은 이 때문이 아니었던가. 채동선(1901∼1953)이 「고향」에 악곡을 붙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고향」엔 광학이 없다. 시인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아비와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그 고향에다 근대 과학적 기구를 갖다 댈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면 그 순간 그러한 기구를 갖다 대면 고향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니까. 외지에선 색안경을 쓰고 뻐기는 자도 고향에 오면 안경을 벗는 법. 「향수」와 「고향」이 정반대인 것은 이 방법론이 가져온 필연이 아닐 수 없었다. 「고향」은 그러니까 모더니스트 정지용에 있어선 실로 예외적인 작품이다. 채동선의 악곡이 스스로 독립되어 한동안 불려졌던 것도 단지 이데올로기적 제약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서구식 안경을 벗고, 잠시 무장 해제한 상태서 나온 작품이기에 그만큼 그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리라. 맨눈으로 본 것이었으니까, 이를 정지용적이라 할 수 있을까. 「비로봉」, 「옥류동」 등이 가곡화되어 보급되기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시간이 요망될지 모를 일이다.

  이들 두 천재들의 탄생 백주년을 맞아 또다른 두 천재 작곡가의 악곡을 음미함이란 이 땅에 태어난 후대인에겐 고적 위에 내리는 축복이 아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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