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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적 진실에 다가서기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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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은 상연을 전제로 쓰여진 글이다. 따라서, 문학과 연극의 경계에 위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장르적 특성은 ‘희곡 번역’을 겹겹의 함정을 피하고 건너가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케 한다. 번역의 본질이 시대와 문화를 달리하는 독자/관객들에게 원작의 묘미를 적절하게 전달해 주는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희곡에서는 설명을 보태거나 각주를 달아낼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연극은 시청각에 호소하는 예술이다. 모든 대사는 배우가 이를 발화(發話)하는 순간 곧바로 관객들의 마음을 울려야 한다. 그렇지 않은 번역은 죽은 번역이다. 적어도, 훌륭하지 못한 번역이다. 이런 까닭에, 희곡 번역은 다른 문학 장르를 번역하는 일에 비해 상당히 불리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하는 난코스 마라톤에 다름 아니다.
서양 연극계에는, 연극사적으로 큰 공적을 남긴 예술가들을 따로 통칭하는 학술 용어가 있다. 실천가 혹은 실험가로 번역할 수 있는 ‘practitioner’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이 호칭을 부여받은 예술가들로는 스타니스라브스키, 메이어홀드, 브레히트, 아르토, 그로토스키 등이 있다. 이들 이외에도, 극작(劇作)과 연출을 함께 하는 예술가(Playwright/Director)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학자들은, 평생을 두고 무수한 실험과 도전을 반복한 끝에 자신만의 연극적 방법론을 창조해 냈다는 점에서 연극 실천가들을 다른 예술가들과 구분한다. ‘실천가’라는 호칭은, 말하자면, 이들의 실험과 도전에 바치는 학자, 평론가, 관객들의 헌사(獻辭)인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 연극사에서 ‘실천가’라고 부를 수 있는 예술가는 누구인가. 오태석(吳泰錫)이라면 실천가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다양한 연극적 방법론을 한국적 공연 원리라는 틀 속에 넣고 용해시킨 끝에, 오태석이라는 예술가가 완전히 새로운 연극적 문법을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아정과 로버트 그레이브스(Robert B. Graves)가 오태석의 다섯 작품을 골라 번역 출간한 시도는 그 자체로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그러나, ‘오태석의 희곡은 난해하다’라는 세간의 평가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극복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오태석의 희곡이 난해하게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난해함의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까닭이 복류(伏流)하고 있다. 첫째, 작가가 연출가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작가들의 경우에는 문자로 표현될 사항들조차도, 그의 작품에서는 생략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다시 말하면, 상당한 분량의 연극적 아이디어가 문자화(文字化)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의 머리 속에서 배우들의 몸 속으로 곧바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그의 희곡은, 따라서 연출을 위한 최소한의 설계도면으로서만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오태석의 연극에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연극적 원리와 방법론들이 일견 문화적 착종(錯綜)으로 보일 만큼 다양하게 뒤섞여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토록 다양한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혼합하면서도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독창적인 예술적 질서를 구축했는가를 탐색하는 일이지만, 그의 방법론에 녹아있는 숱한 연극적 원형(原形)들과 오태석식 변종(變種)들은, 때로는 연구자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미로(迷路)요 해자(垓字)로 기능하기도 한다. 그 미로를 탐색하면서, 김아정은 ‘문화적 충실성(cultural fidelity)’와 ‘극적 실용성(dramatic practicality)’라는 두 가늠자를 가지고 작업에 임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이러한 의도는 상당히 빼어난 수준의 번역을 이룩하였다. 특히 「부자유친 Intimacy between Father and Son」의 경우, 번역자가 역사적 사실이나 제 정파간의 권력투쟁이라는 측면을 가급적 배제하고, 부자간의 갈등, 다시 말하면 인간의 원초적인 대결구도 쪽으로 번역의 초점을 정돈한 점이 눈길을 끈다. 어느 문화권에서 상연되더라도 관객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도록 섬세하게 배려하였다는 뜻이다. 다만 오태석 희곡에 등장하는 방언(사투리)들을 정교하게 복원해 내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오태석은 언어의 보물창고로서 사투리가 갖는 문화적 의미 외에, 관객들에게 ‘여유와 틈새’를 마련해 주는 기능적 도구로서 ‘사투리를 의도적으로 자주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자전거 Bicycle」는 시골의 밤 이야기이다. 시골의 밤이고 사투리가 주 언어로 사용되기에 ‘과학적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연극적 진실’들이 무리 없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정확한 것, 혹은 표준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표준말로는 그 이면의 정서를 온전히 쓸어담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김아정과 그레이브스의 번역은 완전무결한 최상품이 아니다. 그러나, 미묘한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평서문과는 다른 어순을 사용하고, 조선왕조라는 시대적 배경(「태」와 「부자유친」)을 재현하고자 몇몇 고어(古語)를 동원한 번역자의 노력에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이 번역을 토대로 빠른 시일 내에 영어 공연이 이루어지기를. 역자들의 건승과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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