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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불모지에 씨를 뿌리다

9월 29일부터 10월 10일까지 미국 서부지역 5개 대학을 순회하며 열린 작품낭독회는 대산문화재단이 미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문학 소개 프로그램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경제력과 군사력에 있어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데다 '국제공용어' 영어의 후광까지 확보하고 있는 미국에서 그 동안 이런 성격의 행사가 없었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행사가 끝난 지 1주일쯤 뒤에 방한한 하버드대 한국학과 데이비드 맥캔 교수의 지적마따나 한국문학의 미국 진출은 유럽에 비해서도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라도 재단이 이런 행사를 마련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내년에는 미국 문학과 출판의 중심지라 할 동부에서도 같은 성격의 행사를 펼칠 계획이라니 더욱 기대가 크다. 맥캔 교수 역시 "한국 작가들이 미국(동부)에 와서 정기적인 낭독회를 진행한다면 미국 내의 한국문학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소설가 황석영씨와 시인 강은교·김승희씨, 그리고 평론가 김성곤씨가 참여한 낭독회는 하와이주립대, 애리조나주립대, 캘리포니아주립대(버클리), 남가주대, 캘리포니아주립대(엘에이) 등 5곳에서 열렸다(김성곤씨는 신병 때문에 하와이 행사만 마치고 먼저 귀국했다). 재단은 미국 서부지역 대학들 중 한국학과 또는 한국학연구소가 설치된 대학을 대상으로 삼았으며, 현지 대학 및 연구소가 최소한의 재정부담을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또, 교민이나 유학생이 아닌, 미국인 교수와 학생, 독자를 우선적인 대상으로 삼는다는 목표도 세웠다. 청중의 동원과 성격에 있어 재단의 이런 목표에 가장 부합한 것은 애리조나주립대와 하와이주립대였다. 두 대학은 한국학 교수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인접 학과 교수·학생들도 낭독회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청중의 숫자도 많고 참여 열기 또한 높은 편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와이대의 김영희 교수와 애리조나주립대의 최혜월 교수 등 현지 담당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클리와 UCLA, 남가주대 등은 워낙 한국 교민들이 밀집된 지역이어서인지 거의 모든 청중이 한국인이어서 아쉬움을 남겼다.

  낭독회에서 황석영씨는 단편 「이웃사람」과 「가객」의 일부를 읽었고, 강은교씨는 「우리가 물이 되어」「자전 1」 등의 시를, 김승희씨는 「평화 일기 2」「달걀 속의 생 5」 등을 낭독했다. 특히 강은교씨는 자신의 시에 스스로 곡을 붙여 흥얼거리는 식의 노래를 불러 낭독회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낭독회는 한국 작가들이 먼저 한국어로 자신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을 미국쪽 낭독자가 영어로 번역된 작품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낭독이 끝난 다음에는 청중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작가들의 답변이 이어졌다.

  특히 미국인 청중이 많이 모인 행사에서는 한국 문인들에게 어떤 외국 문인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질문이 주로 던져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로서는 생소하기만 한 한국 작가와 한국문학을, 그들에게 익숙한 문학적 코드를 통해 이해해 보고자 하는 태도로 보였다.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좋아하는 영어권 시인·작가로 황석영씨는 윌리엄 포크너와 어네스트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등을 들었고, 강은교씨는 T. S. 엘리어트와 에밀리 디킨슨을, 김승희씨는 실비아 플라스와 에드리언 리치 등을 언급했는데, 미국 청중들은 그를 통해 세 사람의 문학적 지향을 최소한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낭독회에 모인 청중의 상당수가 한국 교민들이었던 만큼, 이른바 동포문학이 한국문학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승희씨는 이에 대해 "동포 문인들이 정체성의 위기와 문화간 갈등 같은 자신들의 경험을 깊이있게 천착한다면 한국문학의 중요한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성곤씨는 "영어로 쓰는 한국계 미국 작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들이 미국 독자들을 한국어로 된 한국문학으로 이끄는 가교 구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황석영씨에게는 북한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는데, 문학과 큰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이런 유의 질문을 황석영씨는 여유 있게 받아넘기는 한편 특유의 유머감각으로 좌중을 즐겁게 해주기까지 했다.

  미국 독자들을 겨냥한 재단의 이번 행사는 처음이었던 만큼 성과와 함께 숙제도 남겼다. 한국학이 활성화한 학교에서 행사를 하게 되면 행사의 전체 규모는 커지는 반면 한국인에 치중된 행사가 된다는 점은 문제였다. 낭독회와 더불어, 한국계를 포함한 미국 작가들과 우리 작가들이 만나는 프로그램이 병행된다면 행사의 의미도 살고 미국 독자들의 관심도 더 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