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 16년(757)부터 밀양은 제 고장 이름의 본뜻을 잃어버렸다. 경덕왕은 전국을 9주로 나워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여기를 밀성군(密城郡)이라 하고 5개의 속현을 두었다. 고려에 들어 밀성이 밀양으로 바뀌어 불렸거니와, 어느쪽이건 밀(密)은 용을 뜻하는 우리말 ‘미르’에서 음차(音借)한 것이다. 한자를 이렇게 붙이다 보니 밀양이 무슨 비밀스러운 동네인 것처럼 바뀌고 말았지만, 사실은 용이 춤추는 현란무비한 곳이었다. 얼마 전부터 밀양을 표상하는 브랜드로 ‘미르피아’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은 처음 뜻을 찾았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밀양에서 어떤 용이 놀았다는 말일까. 이는 아무래도 이 지역의 만어산 이야기와 관련될 듯하다. 이 산과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대산문화> 2008년 봄호에 소개한 적이 있다.
옛날 수로왕 때였다. 나라 안에 옥지(玉池)가 있는데 거기에 나쁜 용이 살았다.
만어산에 있는 다섯 나찰녀와 서로 오갔기 때문에 그때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렸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온갖 곡식이 열매를 맺지 못했다. 왕은 주문을 외워 막아보려 했지만 어쩌지 못했다. 부처에게 머리를 조아려 부탁을 드린 다음에야 용과 나찰녀가 오계(五戒)를 받게 되었고, 그 후로는 피해가 없었다. 동해의 고기와 용이 변해서 골짜기 가득 돌이 되었다. 그 돌을 두드리면 신기하게도 종이 우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밀양에는 만어산 말고도 얼음골과 호박소가 외지에 널리 알려져 있다.
여름에 얼음이 언다 해서 붙인 이름이 얼음골이다. 천황산 북쪽 중턱 해발 600m 지점에 있는 골짜기 돌밭은 한더위에 얼음이 얼고 처서가 지날 무렵부터 녹는 이상기온 지대이다. 그런가하면 수십 미터 높이의 폭포수가 백옥 같은 화강암에 떨어져 커다란 소(沼)를 이루는데, 그 모양이 마치 절구[臼]의 호박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인 곳이 호박소이다.
어디건 여름에 찾아가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여름을 지나 이 일대의 사과밭에서 나는 밀양 얼음사과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명품.
밀양역에 내리면 철길 가에 학문과 충의의 고향이라는 비석이 보인다. 학문이라면 김종직(金宗直)이고, 충의라면 사명대사(四溟大師)이다. 조선시대 사림의 대표였던 김종직을 모신 사당은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도연재(道淵齋)라는 이름으로 있고, 사명대사라면 바로 표충사(表忠寺)가 떠오른다. 삼국유사와 함께 걷는 이번 호에 찾아가는 곳이다.
아침 일찍 기차에서 내려 밀양강의 아침 물결을 바라보며 표충사로 간다. 표충사라면 사명대사 비석에 흐르는 땀으로 유명하다. 조선 영조 때인 1742년, 사명대사 5대 법손이 당대의 명문과 명필을 얻어 경주산의 검은 대리석에 사명의 한 평생 행적과 구국의 충절을 찬양한 내용이 새겨진 비석이다. 그런데 이 비석에서 국가의 큰 사건이 있을 때면 땀방울이 맺혀 구슬땀처럼 흐른다. 사람들은 죽은 뒤에도 나라를 근심하는 사명의 영험이라 여긴다. 그래서 일명 ‘땀 흘리는 비석’으로 불린다.
그런데 표충사 하면 또 한 분의 스님이 생각난다. 한국 근대의 선지식으로서 의연(毅然)한 효봉(曉峰)이다.
출가하기 전의 이름은 이찬형(李燦亨), 효봉은그의 법명이다. 평양 출신인 이찬형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가 된 바로 그이이다. 그런데 1923년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일 수 있는가’라는 깊은 회의에 빠진 것이다. 이찬형은 법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출가했다.
승려 효봉의 본격적인 출발이다.
밤낮으로 수행을 거듭하는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해서 별명이 ‘절구통 수좌(首座)’. 1931년 도를 깨닫고 1932년 유점사에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가 한 철씩 보내는 등 정진을 거듭하였다.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만공은 근대 한국불교의 정점인 경허(鏡虛)의 제자이다. 그러니까 효봉은 경허의 법맥을 이었다 할 수 있다.
1962년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오른 효봉은 당대 불교의 큰 어른이었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데는 자신만이 아니라 제자에게도 엄격하였다. 그런 효봉이 세상을 뜬 곳이 바로 이 표충사이다.
표충사에서 찾은 일연의 발자취 사명과 효봉으로 기억되는 표충사는 과연 어떤 절인가. 신라 무열왕 원년(654) 원효대사가 지금의 극락암 자리에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어느 날, 재약산 쪽을 바라보니 대밭 속에서 오색서운(五色瑞雲)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 가람을 지었다. 대나무 숲에 지은절이라 해서 처음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였다. 그 후 흥덕왕 4년(829)에는 인도스님 황면선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3개를 모시고 와서 봉안하였고, 신라 진성여왕(889)때에는 보우국사가 승려500명을 모아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동방 제2선찰(第二禪刹)이라 불렸다.
절에 이르러 사찰 안내서를 읽다가 다음 대목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국사가 1,000여 명의 대중을 맞아 불법을 중흥하여 동방 제일선찰(第一禪刹)이 되었으며, 충렬왕 16년(1290) 천희 국사가 선풍을 관장하니 일국의 명찰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일연이 표충사에 머물렀다는 소식은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 적어도지금까지 나온 일연 관련 기록에서 이 같은 말은 없었다. 표충사에서는 무슨 근거로 일연의 주석을 적었을까?
종무소에 들러 그런 궁금증을 말했더니, 직원은 스님들의 거처로 나를 조용히 안내했다.
소개 받은 분은 이 절에 머물며 스님들의 교육을 맡는 무이(無二) 스님이었다.
사명대사를 연구하여 묵직한 연구서도 한 권을 냈다. 스님은 나에게 ‘영정사 고적(靈井寺古蹟)’이라 쓰인 고문서를 내보여 주었다. 영정사는 사명대사로 인해 표충사로 바뀌기 전의 절 이름이었다. 스님은 오래 전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이 문서를 찾았다고 했다.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보였다. “충렬왕 12년 병술년에 이르러 국사 일연이 해린(海獜)을 이어 머물렀다. 뭇 대중 천여 명이 가득 차 법뢰가 크게 떨치니, 충렬왕이 절을 높여 동방 제일의 선찰이라 불렀다.(至忠烈王十二年 丙戌 國師一然 踵獜而住 衆盈千餘 法雷大振忠烈陞寺 稱爲東方第一禪刹也)”
눈이 확 뜨이는 느낌이었다. 영정사에 네 명의 국사가 머물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 세 번째로 일연을 소개한 대목이다.
충렬왕 12년이라면 1286년이다. 이 때 일연의 나이 80세, 실은 3년 전 봄 개성에서 국사에 올랐으나 그 해 가을 고향으로 은퇴하여 어머니를 모셨고,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군위 인각사로 거처를 옮겨 만년을 보내고 있었다. 비문으로만 따지면 일연이 인각사를 떠났다는 기록이 없다. 1289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인각사에 머문 것으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표충사를 다녀갔다는 것일까.
사실 ‘영정사 고적’은 아리송한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지은이와 전승 과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명백히 믿을만한 안정감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일연 보다 앞서 있었다는 해린은 고려 초기의 국사인데, 그가 이 절에 주석했다는 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다. 일연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290년에는 천희(天熙) 국사가 이곳에 왔다고 써있다. 일연의 다음 국사라면 그의 제자 무극(無極)인데, 무극의 다른 이름이 천희이기도 했던가.
짧은 기간이나마 일연이 이곳에 머물렀다면 한 가지 풀릴 일이 있다. 지난2008년 봄호에 소개한 만어산의 이야기는 일연이 직접 이곳을 찾아서 취재한것인데, 아마도 표충사에 머물렀으므로 답사가 가능했으리라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