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고 지내는 후배 소설가의 창작집 출간을 돕느라, 후배가 건네준 교정지를 훑어보았다. 판권란에 “2010년 4월 1일 초판 1쇄 찍음/2010년 4월 7일 초판 1쇄 펴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쇄일과 발행일을 밝힌 것인데, ‘굳이 인쇄일을 판권에 넣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쇄일과 발행일 간의 간격은 6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내 판권면을 보았다.
표기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이라는 난장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인쇄일과 발행일을 밝히고 있다. 여기는 발행일을 인쇄일에서 7일 뒤로 표시하였다.
그렇다면 책을 ‘인쇄’하고 ‘발행’하기까지 대략 6~7일 걸린다는 걸까? ‘발행’이란 뭘까? 아마 ‘발행’이란 공식적으로 책을 세상에 내놓는 것을 말할 것이다. 출판쟁이들은 ‘책을 서점에 깐다(‘깔다’의 현재형)’고 말한다.책을 만드는 과정에는 교정, 편집, 인쇄, 제본, 포장 등 여러 과정이 있는데 왜 굳이 ‘인쇄일’만 적어야 할까? 굳이 한 가지를 적는다면 텍스트―내용을 종이에 박아주는 ‘인쇄’를 적는 게 타당성이 있을 듯하긴 하다.
하여튼 나의 출판사 근무 경험으로 보면, 책을 인쇄하고 표지를 입혀 제본한 다음 완성품을 입고시키기까지는 대략 3,4일에서 6,7일 정도 걸린다. 그래서 아마 발행일을 인쇄일과 일주일 정도 간격을 두어 표시했나보다. 이것은 통상적인 제작 기일이고, 양장 제본 등으로 제작 공정이 복잡하거나, 중간에 휴일이 들어 있거나, 페이지 수가 아주 많거나 부수가 아주 많거나 하면 기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다.
이키! 타이쇼오(大正) 15년 5월 15일 인쇄 ― 식민지의 아픔이 그대로 찍혀 있다. 일본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니. 발행일은 5월 20일로 인쇄일과 5일의 시차를 두었다. 정가는 1원 50전. 발행소는 경성부 남대문통 1정목 17번지에 있는 회동서관이다(판권 앞면에 있는 한용운의 후기 ‘독자에게’에는 일본 연호를 쓰지 않고 “을축 8월 29일 밤”이라 적혀 있다. 을축년은 서력으로 1925년이다).
『님의 침묵』이 나온 해가 1926년이니, 인쇄일과 발행일을 판권에 적어온 역사는 매우 오래다. 당시의 법적인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 아래는 1977년에 나온 서정인 소설집 『가위』의 판권면이다.
이때에도 『님의 침묵』과 같이 본문 편집을 세로짜기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본문에는 한자가 노출되지 않았는데, 작품 제목은 한자를 노출해 표기했고, 판권 앞면에 있는 ‘후기’를 보면 출판사 이름을 적을 때만 한자로 썼다. 판권란엔 대부분 한자를 노출했는데, 본문과 달리 가로짜기다. 그리고 작가 이름이 새겨진 도장을 찍은 인지를 붙였다.
1977년 12월 5일 인쇄, 12월 10일 발행으로 되어 있다. 책값은 1000원. 와아~ 싸다. 지금 돈으로 치면 얼마쯤? 누가 내게 1000원 줄 테니 팔아라, 하면 절대 안 판다.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수고』의 번역본이다. 이때 ‘수고’는 “자네 참 수고했네”의 그 ‘수고’가 아니다. Manuskripte, manuscript의 그 ‘수고(手稿)’다. 이 책은 8월 20일 인쇄, 9월 1일 발행이니 12일 간격을 두어 발행일을 적었다. 책값 2500원. 역시 싸다.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요즘 같으면 1만원 이상 할 것 같다.
아래 판권을 보면 12월 26일 인쇄, 1월 15일 발행이니 20일이나 간격을 두었다. 연말에 나오게 된 책은 이처럼 발행일을 새해로 적는 경우가 많고, 12월에 서점에 내놓았더라도 인쇄일과 발행일을 다음 해로 넘겨 적기도 한다. 책을 내자마자 작년 구간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위 두 책은 판금 서적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만약 1986년 이전에 나왔다면 판매금지가 되었을 법한 책이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저술이고, 하나는 마르크스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니 말이다. 출판 시기를 보면 1987년 민주화의 진전 이후에 나온 책이다.
이른바 빨갱이 사상 즉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조인 칼 마르크스의 저작과 그에 관한 저술들은 70년대 중후반부터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 마르크스의 저작 번역이 공개적으로 활발히 출판된 것은 아마 이 무렵부터였지 싶다. 그런데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대에는 납본 제도가 출판 탄압에 악용되었다.
신간을 간행하면 당시 문화공보부에 납본을 해야 했고, 납본을 마쳤다는 납본 필증이 나오기까지의 기간이 14일인가 15일이었다. 그래서 80년대 중반 내가 출판사 근무를 시작할 때는 인쇄일과 발행일 간격을 15일로 하라고 선배들에게서 배웠고, 한동안은 판권에 그렇게 날짜를 박았다. 4월 10일 인쇄, 4월 25일 발행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인쇄해서 납본하고 필증을 받은 뒤 발행했다는 논리였지 싶다.
내가 출판사 편집사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것이 1984년 11윌이니, 위 두 책은 그 전 해와 그 다음 해에 나온 책이다. 돌베개문고로 나온 『우리들 가진 것 비록 적어도』의 판권면 앞에는 원고 모집 안내문이 있는데, 노동자의 삶을 표현한 창작 원고와 노동자의 체험을 담은 생활 글을 모집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글쓰기로 노동자의 각성과 문학의 갱신을 이루고자 한 당시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위 두 책의 판권을 보면 인쇄일과 발행일의 간격이 정확히 15일이다. 하지만 발행일을 인쇄일에서 15일 뒤로 했다고 해서 책을 다 만들어놓고 발행일까지 기다렸다가 출고하는 일은 없었다.
신간을 내면 문화공보부에 직접 납본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간동에 있는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접수하였다. 납본 부수가 몇 권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이 책들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가고 정보기관의 검열용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납본을 하면 납본을 했다는 증서인 납본 필증이 당연히 나와야 하는데, 행정상의 절차로 발행하는 일종의 영수증인 이 증서를 발행해주지 않으면서 책을 팔지 못하도록 압박하는 일이 있었다. 납본 제도가 독재 정권의 입맛에 거슬리는 출판물을 제재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던 것이다.
엇, 6일 만에 무려 4쇄를 찍었다. 2월 19일 초판 1쇄 인쇄, 2월 25일 초판 4쇄 발행이라고 되어 있으니. 초판 인쇄일은 있는데 발행일이 없다. 4쇄 발행일이 적힌 4쇄본인데, 1쇄 발행일을 표시하지 않고 1쇄 인쇄일을 적었다. 책의 출판일은 인쇄일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발행일을 기준으로 하니, 이런 경우 1쇄 발행일을 적는 것이 옳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출판계와 독서계에 판과 쇄의 구분 의식이 명확하지 않아, 실질적으로 2쇄인데도 ‘재판 발행’이라고 표시하고 3쇄인데도 ‘3판 발행’이라고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인들끼리 만나면 “네 책 재판 찍었니?” 이렇게 물었는데, 이때 ‘재판’은 사실상은 ‘2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초판 발행 때부터 아예 ‘초판 1쇄 발행’ 또는 ‘제1판 1쇄 발행’ 식으로 쓰는 출판사들이 많다. 초판 1쇄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에서? 아무튼 판과 쇄의 개념을 명확히 해서 책의 이력을 밝히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아래는 『거대한 전환』 번역본의 판권면이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병폐가 드러나면서 눈길을 끌고 있는, 시장을 보는 다른 관점을 보여준 칼 폴라니의 명저다.
무척 두꺼운 책이고 책값이 4만원에 육박하는데, 반년 만에 3쇄를 발행했으니 대단하다. 우리 독자들의 수준이 대단하다. 판권에는 보통 초판 발행일과 최종쇄 발행일을 적는데, 여기서는 각 쇄 발행일을 모두 적었다. 3쇄 인쇄일과 발행일을 함께 적었는데, 사실 3쇄 인쇄일 정보는 굳이 기록할 의미가 있는 정보도 아니요 독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도 아니니 생략하는 것이 좋다.
아래는 용산 참사 현장을 중심으로 1년간 뜨겁게 현장 활동을 했던 미술가들이 작업한 것을 기록한 사진집 『끝나지 않는 전시』의 판권이다. 판권의 편집 형태는 앞에서 본 것 같은 형식을조금씩 변형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디자인 요소에 따라 이처럼 좀 특이한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판권의 위치도 책 끝에 놓던 관습이 90년대부터 바뀌기 시작해 요즘은 대개 속표지 바로 뒤에 배치한다.
여기엔 초판 인쇄일은 적혀 있지 않고 발행일만 나와 있다. 요즘 나온 책들을 펼쳐 보라. 인쇄일과 발행일을 함께 적은 책도 있지만, 대부분 발행일만 적었다. 인쇄일을 적는 관행은 일제 시대부터 내려온 지난 시대의 유습일 따름이다.
4 판권의 인쇄일과 발행일은 실제 인쇄일과 발행일에 일치할까? 그렇지 않다. 맞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이다.책의 편집자가 판권의 인쇄일과 발행일을 편집 작업의 최종 마무리 때에 확정한다고 해도 인쇄일과 발행일을 딱 맞출 수는 없다. 출력실에서 필름을 출력하고 필름 교정을 본 후, 인쇄소로 필름을 넘긴다. 인쇄소에서 판을 굽고 인쇄기에 걸어 인쇄한 후 제본소로 넘긴다. 제본소에서 접지 등 성책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으로 여러 업체를 거쳐 책이 만들어지니, 예정한 날짜에 딱딱 맞게 진행되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따라서 대개 일주일 이내의 오차는 발생하게 마련이다.
회갑이나 정년퇴임 등 무슨 기념일에 맞춰 출간하는 경우는 그 기념일을 발행일로 적기도 한다. 잡지 같은 경우 실제 나오는 날짜와 관계없이 매월 1일이라든가 5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발행일을 딱 정해서 표시하기도 한다. 또 학술지 등은 다소 출간이 늦었더라도 책이 나와야 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에 발행일을 앞당겨 책이 나와야 하는 기일에 맞추기도 한다. 책의 표지는 책의 얼굴이다. 책의 판권도 책의 또하나의 얼굴이다. 책의 지문(指紋)이기도 하다. 간기(刊記)라고 하는 판권란의 기록. 오랜 세월이 지났을 때 책의 출생과 이력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간기는 가장 기본적이고 신뢰할 만한 것이 된다. 그래서 간기는 정확히 기록되고 필수적인 사항은 빠짐이 없어야겠다. 외국 책을 보면 판과 쇄, 발행일을 세세하게 기록하지 않는 나라도 많은데, 출판 시기를 확인할 필요가 있을 때는 참 곤란해진다.
그런데 간기에 나타난 쇄수와 책의 총 발행 부수는 비례할까? 그렇지 않다. 가령 같은 3쇄라 해도 발행 부수는 천차만별이다. 대형 베스트셀러 작가의 경우 초판을 3만~5만부 찍는다고 보면, 3쇄면 총 5만~10만부가 된다. 보통의 작가가 소설을 출판했다면 초판 3천부에 2,3쇄 각 1천부해서 5천부를 발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게 다 독자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그만큼 제작해서 서점에 나가고 일부는 창고에 재고로 대기 중이라는 거다. 3쇄 5천부라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다. 시집이라면 초판 1000부에 2,3쇄 각 500부씩 찍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같은 3쇄라도 10만부도 될 수 있고, 2000부 또는 그 이하도 될 수 있다.
쇄수는 그 책을 인쇄한 횟수일 뿐이고, 쇄수가 같아도 발행 부수는 각기 다르다. 중국의 경우는 판권에 발행 부수를 적고 있으므로 판권을 통해 발행 부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찍어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 숫자가 실발행 부수와 늘 일치하는 숫자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일종의 마케팅 기법으로 쇄수를 늘리는 경우가 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미 80년대 후반에도 대중적인 베스트셀러를 주로 기획 출판하는 출판사에서는 그렇게 쇄수를 조정해 찍는다는 이야기가 출판계에 돌았다. 가령 책이 잘 팔려나가서 2쇄에 3만부를 더 찍게 되었다면, 이때 쇄를 나눠서 찍는다는 것이다. 실제 나눠서 찍는 것은 아니고, 한 번에 찍으면서 판권 페이지만 인쇄판을 바꿔서 쇄수를 늘리는 방식이다. 그러면 2쇄 1만부, 3쇄 2만부 이런 식으로 해서 제작 부수는 같지만 쇄수가 늘어나게 된다. 독자들은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벌써 3쇄 또는 그 이상 발행된 책을 사게 되고 그만큼 책이 반응이 좋은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수십만 부가 나간 어떤 베스트셀러는 1만부 단위로 쇄를 바꿔 표시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90년대 초던가 서점에서 그때 한창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를 들춰보다 판권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출간된 지 3년이 채 안 된 책이었는데, 벌써 백 몇 쇄를 찍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보통 한번 찍을 때 3~6개월 이상 판매할 부수를 예상해서 찍기 때문에, 아무리 예측보다 책이 잘 팔려나갔다 해도 그렇게 찍었을 리가 없는 허수(虛數)였다. 하지만 언론에 집중 노출되거나 법정 스님의 입적과 같이 어떤 계기로 한창 바람을 탈 때는 오전에 제작 발주한 책을 몇 시간 만에 다시 발주를 내기도 하고, 제작 부수가 많거나 인쇄소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불가피하게 쇄를 나눠서 찍기도 하니 이런 경우 단기간에 쇄수가 많이 늘어난다. 더러는 오류 수정의 필요 때문에 증쇄하기도 한다.
오랜 기간을 두고 100쇄, 200쇄 쇄를 거듭한 책은 그만큼 대중 독자가 많이 찾고 생명력이 긴 책임에 틀림없다. 그 쇄수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수많은 독자와 책이 교감해온 아름다운 증표요, 독자가 책에 선사한 영예로운 훈장이다. 하지만 다른 경우 100쇄니 200쇄니 하는 숫자가 실제로 의미 있는 간격을 두고 거듭 찍은 것만을 의미하는 정확한 실수(實數)가 아닐 수도 있다.누가 수십 년 후에 어느 책의 출판 이력을 연구한다면 분명 판권란을 유심히 볼 것이다. 만약 그가 순진하게 판권의 기록을 곧이곧대로 읽는다면 당시의 출판 실상과는 괴리가 발생할 수 있다. 판권, 그것은 사실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상황의 기록이기도 한, 책의 또 다른 표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