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웹진

4월 6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나는 사흘간 캐스트로에 있는 호텔에 머물며 방을 알아보았고, 결국 이 도시의 북쪽 해변에 있는, 마리나라는 지역에 방을 구했다. 본래 샌프란시스코의 하위문화들로 유명한 캐스트로나 헤이츠 쪽에 방을 구하려 했지만 미국 역시 단기로 방을 임대하는 경우가 드물어 하는 수 없이 여피들이 주로 사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동네는 깨끗하고 안전한 대신 별로 볼 것이 없으며, 집은 아파트로 가구가 모두 구비되어 있고, 해변과 대형 마트가 바로 옆에 있어 편리하지만 개성이라곤 없는 곳이다. 하지만 벽이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커다란 병실을 연상시키는 집은 이렇다 할 전망은 없지만 곧 편안한 곳이 되었고, 아침에 블라인드를 열면 창밖으로 금문교가 쥐꼬리 만큼 보이는 전경에 익숙해지면서(나는 금문교에 쥐꼬리 다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이 도시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었다.

버클리대학은 내가 사는 곳에서 버스와 열차를 갈아타면 한 시간 정도 되는 거리로 그곳에는 일이 있을 때에만 가는데 처음 몇 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행정적인 일 처리를 위해 갔지만 이제는 갈 일이 거의 없어졌다. 버클리대학 한국학 연구소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거의 연락이 없는데, 내가 몇 가지 추진했으면 하는 프로젝트를 얘기했지만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추진된 것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곳에서는 이곳에 온 한국 작가가 추진하는 계획에 도움은 주지만 적극적으로 일을 도모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삼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체류 기간으로 인해 그 기간 내에 뭔가를 할 수 있는 실효성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게 이유인 듯하다.

나는 어디에 가든 신기하리만큼 잘 적응해버리는 편인데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며칠 지나지 않아, 아니 시차가 극복되기도 전에 이곳에 완전히 적응하게 되었고, 너무도 그런 나머지 처음부터 새로울 것이란 없었다. 그래서 처음 거주하게 된 도시가 주는 설렘 같은 것이 애초부터 자리할 수가 없었지만 이 도시는 알아갈수록 그 매력을 조금씩 드러내는 것 같다. 주로 며칠에 한 번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한 곳을 방문하고 나머지 시간은 산책을 하거나 공원 벤치나 풀밭에서 주로 비트 제너레이션 작가들과 히피 문화와 샌프란시스코와 관련한 책을 읽거나 가만히 누워 보낸다. 어떤 날은 반나절을 공원에서 보내기도
하는데 확실히 이곳의 공원은 본래 공원이 개인 정원의 개념이 확장되어 공공의 장소가 된 데서 유래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공원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공간과 너무도 밀접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시내에 있는 몇몇 공원에 가보면 풀밭 위에 앉거나 누워서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집의 거실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루 한 차례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금문교까지 산책을 한다. 자연이 비교적 잘 보호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바닷가에는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있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들이 벌이는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다. 부둣가에서 점심으로 싸간 샌드위치를 먹을 때면 갈매기들이 날아와 뭔가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는데 나는 녀석들의 애를 태우며 아무것도 주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떤 녀석들은 시중을 들 듯 내가 식사를 끝낼 때까지 내 옆에서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또 다른 녀석들은 약간의 분노와 원망과 상당한 탄식이 실린, 아주 괴로운 소리를 집요하게 내며 경우에 따라서는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무언의 시위를 하다가 결국에는 다음 기회를 엿보겠다는 듯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한다. 결국 이곳에서도 나는 어디에서나 그렇듯 이렇게 사소하고, 별 것이 아닌 것들에서 작은 즐거움을 맛본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깅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특히 저녁 무렵이면 해변 공원에 뛰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치 커다란 메뚜기들이 떼를 지어 지나가는 것 같다. 하지만 석양을 배경으로 뛰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메뚜기 떼처럼 장관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 나는 그들을 보며 한숨과 함께 속으로 약간 너무 한다고 생각을 하며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담배에 불을 댕겨 신경을 딴 데로 돌린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그렇게 뛰는 것에 대해 유감은 없지만 그들은 조용한 산책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훼방이 되며, 그래서 다소 거슬린다. 그리고 좀더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되면 나와 그들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그리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생각에도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한밤중에,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때 해변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즐긴다. 바람이라도 불면 부두에 정박한 요트들이 밧줄에 묶여 있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듯 삐걱거리며 아주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그 시각이면 낮과는 다른, 샌프란시스코만의 바다와 그 건너편 소살리토와 티뷰론과, 한국의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맑은 밤하늘이 만들어내는 인상적인 윤곽을 보며 천천히 걸을 수 있다(샌프란시스코 만은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와 버클리 외에도 여러 도시들이 인접해 있는 거대한 만으로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팽창하는 도시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대대적인 매립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환경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른 후 환경 보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되살아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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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서점인 시티라이트 서점 계단에 있는 사진. 비트 제너레이션의 대표작가인 앨런 긴즈버그의 아파트에 한 친구가 찾아와 찍은 사진. 앨런은 친구에게 커피가 담긴 철제 사발을 준 후 친구가 그 사발을 비우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나중에 친구는 개밥그릇처럼 보이는 그 사발이 그 집에 있던 유일한 사발로 앨런이 시리얼을 먹으려고 사발이 비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밤에는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채널은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미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들게 하는 오락 프로그램들로 넘쳐나지만 지역 사회의 기부금에 의해 운영되는 KQED라는 채널에서는 이 사회의 또 다른 진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수준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시사 프로그램들을 주로 방송하는 이 채널을 보면 짧지만 다채로운 미국 역사 속의 흥미로운 인물들과, 돈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대안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과 단체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사회에 기부 문화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 수도 있다.

이 도시의 좋은 점은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지만 세상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다채롭다는 것이다. 각 도시에는 코로 들이키는 공기와는 다른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가 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전자도 상쾌하지만 후자가 너무도 기분이 좋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이유가 다름 아니라 이 도시의 많은것이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유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이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상태일 것이다. 캐스트로에 가면 다정하게 걸어가는 동성애자들을 쉽게 볼 수 있고, 날씨가 좋은 때에는 알몸으로 다니는 나체주의자들도 만날 수 있는데, 그런 소수자들의 모습은 확실히 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다소 더운 화창한 어느 날에는 장난스런 생각으로, 앙상한 몸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며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지만 눈살을 찌푸릴 사람이 뭘 모르는 관광객들 말고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단념했다. 하지만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알몸으로 거리를 누비고 다닐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가 기분을 좋게 한다. 이곳의 가장 괜찮은 점은 웬만큼 정신 나간 짓을 해도, 그것이 타인에게 해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며칠 후면, 6월말에 열리는 성적 소수자 축제 SF Pride Celebration and Parade와 함께 이 도시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How weird street fair가 개최된다.
이 행사는 말 그대로 다들 얼마나 괴상한 모습을 하고 괴상한 짓을 할 수 있는지를 다투어 뽐내는 축제이다. 지난 해 축제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별로 놀라울 것은 없었지만 다들 그날 하루만이라도 정신이 나가고자 기를 쓰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날에는 나 역시, 평소에 충분히 이상한 생각을 늘 하는 편이니까 따로 괴상한 모습을 하고 괴상한 짓을 하지 않더라도 이 축제를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축제가 사람들의 뭔가를 많이 바꿔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축제들을 통해 사람들은 괴상하고 이상한 것이 사실은 얼마나 괜찮을 수 있는지를 깨닫고, 인간의 개성과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되는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볼 수 있고, 또한 그 시험과 기억은 이 도시 거주자들의 삶의 일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축제의 진정한 역할은 거기에 있을 것이며, 그러한 계기를 통해 도시는 좀더 많은 것들을 포용하는 곳으로 진화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