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30주년 기념원고 / 대산창작기금
연극이 끝나도 남는 책
차근호 / 극작가, 2004 대산창작기금 수혜, 제29회 대산문학상 수상
연출을 겸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극작가가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서는 연출가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극작가와 연출가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하다. 연출가는 동지이며 협업자이지만 때로는 극작가의 분노를 유발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희곡이 연극의 중심이었던 시대에서 공연이 연극의 중심이 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리허설에서 심혈을 기울여 쓴 대사가 잘린 것을 보게 되거나 희곡의 한 부분이 통째로 사라진 것을 보게 된다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극작가는 없을 것이다. 나도 그런 상황에 놓이자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대산창작기금 수혜자가 되었을 때 내 손으로 연극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기뻤다. 희곡 부문은 희곡집을 출간하는 것 말고도 공연 제작을 위해 기금을 쓸 수 있었다. 기금은 극단 창단의 밑거름이 되었다. 나는 내 희곡을 완벽하게 연극으로 옮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연출가로 마주한 연극은 작가로 마주했던 연극과는 전혀 달랐다. 작가는 글로 인물을 창조했지만 연출가는 배우로 인물을 창조했다. 어떤 연출가가 작가는 인물이 마음에 안 들면 지워버리면 되지만 연출가는 그럴 수 없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야 알 수 있었다.
다행인 건 내가 연출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린 것이다. 나의 짧았던 연출가 시대는 끝났지만 그래도 극작가로서 얻은 성과는 있었다. ‘내 희곡이 내 의도대로 무대화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답을 찾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한 문학이지 연극 자체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연출 작업을 해보지 않았다면 희곡과 연극의 본질적 차이를 깊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극작가에게 희곡은 연극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극작가에게 1차 출판은 공연을 의미한다. 책을 내는 것은 2차 출판이다. 공연이 1차 출판인 것은 희곡은 공연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출판이 없다면 읽히는 것을 포기한 희곡이 된다. 리허설 때문에 화가 난 나에게 연출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작가님, 연극은 끝나도 책은 남잖아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연극은 끝나도 책은 남지만 모든 책이 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는 책은 공연을 통해 검증되고 읽히는 책으로 남은 희곡일 것이다. 또 공연을 위해 쓰인 대본이 아니라 공연을 전제로 쓰인 문학으로서의 희곡일 것이다. 다행히 대산창작기금으로 희곡 공부를 한 덕분에 희곡과 대본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희곡에 관해서는 지금도 공부 중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지금 극작가로서 희망이 있다면 어느 한 곳에 도달해 보는 것이다. 그곳은 ‘제대로 된 희곡’ 그 언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