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문화재단 30주년 기념원고 / 축사
진실의 순간
정현종 / 시인, 제4회 대산문학상 수상
올해가 대산문화재단 창립 30주년이라고 합니다.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의 뜻에 따라 1992년 만들어진 대산문화재단은 그 이듬해 신창재 선생이 재단 이사장을 맡은 뒤 30년을 이어오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으로 한국문학을 후원해 왔는데요, 올해 재단의 새로운 비전으로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학적 경험을 통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며 성숙한 세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문학이 하는 일을 요약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문학이 하는 일차적인 일은, 글 쓰는 사람이 글쓰기를 통해서 자기 교육이나 자기 계발을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가 갖는 그러한 기능은 문학의 모든 분야가 똑같습니다. 무슨 글이든 글을 쓰려면 잘 생각해야 하고 깊고 섬세하게 느껴야 하는데 그러한 생각과 느낌의 과정을 통해 글쓴이의 정신은 성숙해갑니다. 다시 말하며 문학작품을 비롯한 모든 인문적 글쓰기는 독자에게 작용하기 전에 글쓴이 자신에게 작용한다는 말씀이지요(그러니까 각급 학교에서 학생에게 글쓰기를 부과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어떤 대화에서 “인간은 아래에서 위로가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성장하는 법”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모든 삶의 자유의 근본조건”이라고 했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자적인 세계를 무한한 것보다 높게 평가하려고 하죠. 그 때문에 우리는 만물의 순환을 방해하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의 원죄에요.”
어떤 글쓰기는 무엇인가를 제한할 뿐인데 비해 무한을 향해 열려 있는 글쓰기가 있습니다. 문학적 글쓰기가 우선 자기교육 과정이라고 한 것은 ‘무한을 여는’ 글쓰기의 수준에 이르기 위한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쓰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 정신의 수준이 그런 정도가 아니라면 독자는 정신의 무한 쪽으로 움직여 갈 수가 없겠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안에서 밖으로 성장하는 법’이며 그것이 ‘모든 삶의 자유의 근본조건’이라는 말에서 ‘자유’라는 말은 우리의 독자적인 세계를 무한한 것보다 높게 평가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그렇게 자유로울 때 우리는 만물의 순환을 방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음에 다름아닌 말이나 무지가 추동하는 행위를 통해서 ‘만물의 순환을 방해하는’ 일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무한한 것보다 높게 평가하는 것이 만물의 순환을 방해한다는 통찰은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문학 언어의 성질을 한없이 열려 있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게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상상의 언어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의 상상 활동은 정신의 다른 활동에 비해 항상 ‘무한’ 쪽으로 열려 있고 그것이 다름 아닌 문학의 미덕입니다(그러니까 무슨 설득력 없는 이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거기에 갇힌 채 작품을 써내는 것은 문학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앞에서 카프카의 말을 읽어 보았습니다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제 시집 『그림자에 불타다』에 실려 있는 제 산문에서 인용을 한 적이 있는데요,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릴케가 편지에 쓴 말입니다.
네, 삶에서 일들은 얼마나 기묘하게 일어나는지요; 그 속
어디엔가 일말의 오만은 없는 것인지, 바깥에 있기를
아주 좋아해서 모든 것과 대면하며, 즉 ‘일어나는’ 모든 것과
대면하며, 어떤 것도 잃지 않는-; 그럴 때도 그는
여전히, 아마도 처음으로, 삶의 실제 중심에 붙박혀 있을
터인데, 거기는 모든 것이 모이지만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름들-칭호들, 삶의 겉치레들-이 우리를 매혹했습니다.
왜냐하면 전체는 너무도 무한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누군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그걸 지칭하며 회복되는데,
그 열렬한 제한만큼 우리를 그릇되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하며, 우리를 죽입니다…
이 말은 그 뜻이 좀 더 분명해지도록 풀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바깥에 있기, 일어나는 모든 일과 대면하기, 이름들(칭호들), 삶의 겉치레들은 하나로 묶일 수 있고 그것들과 대조되는 것이 삶의 실제 중심- 모든 것이 모이지만 이름이 없는 실제 중심 그리고 전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체는 너무도 무한한데 ‘누군가’ 좋아하는 이름으로 그 전체를 지칭함으로써 그것(무한)을 제한한다는 것이고, 그럴 때 그 열렬한 제한은 우리를 그릇되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하며, 우리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기가 만든 것이든 남이 만든 것이든 수많은 제한에 길들여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그릇된 것, 죽은 것이게 하는 제한들에서 자유로울수록 그의 삶은 풍부한 것일 터인데, 얼마나 풍부하냐 하면 ‘전체’나 ‘무한’에 이어져 광활하게 풍부한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문학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가급적 그러한 성찰에 게으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러한 성찰에 소홀할 때 우리의 삶과 문학은 천박한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말을 좀 바꿔보자면 문학은, 다른 예술들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진실의 순간’과 만나게 하는 정신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고 예술 체험을 하는 이유는 거기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정신적 기쁨을 느끼게 하는 ‘진신’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카프카의 말을 들어 봅니다.
진실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누구에게서도 얻을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서 진실을 부단히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죠.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멸망해요. 진실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죠. 어쩌면 진실은 삶 그 자체일지도 몰라요.
『카프카와의 대화』(구스타프 야누흐, 편영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7)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문학을 합니다. ‘진실이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말, 진실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이것으로 축사를 갈음할까 합니다.
대산문화재단 30주년을 축하합니다.